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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雁行 / 오탁번

 

 

해 설핏 기운 북녘 하늘로

나울나울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고래실 논바닥에서 벼이삭 쪼아 먹고

미꾸리도 짬짬이 잡아먹어

날갯죽지에는 보동보동 살이 올랐겠다

휴전선 넘어 날아갈 때는

형제끼리 총 겨누는 사람들이 미워서

물똥도 찍찍 내갈기겠다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황해도 연안 갯벌에 내려앉아

북녘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

천수만 갈대밭 흔드는

겨울바람 소리도 전해주겠다

압록강 건너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씨 뿌리던

광막한 만주벌 날아갈 때는

기럭기럭 기럭기럭 슬피 울면서

천오백 년 전 고구려 때

흙 속에 깊이 묻혀

여태껏 눈도 못 튼 볍씨의

긴긴 잠을 흔들어 깨우겠다

나볏이 줄지어 날아가는

이웃 형제처럼 수더분한 기러기 떼여

고구려 사람들의 鳥羽冠 깃털같이

못자리에서 쑥쑥 자라는 모를

마을 사람들이 두렛일로

한 모숨 한 모숨 모내기하듯

몇 천만리 아득한 북녘 하늘을

나울나울 정답게 날아가겠다

 

 

 

 

알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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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이 주최하고 고산문학축전 운영위원회(위원장 오세영)와 계간 '열린시학'이 주관하는 제11회 고산문학 대상 수상자로 시 부문에 오탁번 시인, 시조 부문에 박시교 시인이 16일 각각 선정됐다.

 

수상작은 오탁번 시인의 '우리 동네'(시안)와 박시교 시인의 '아나키스트에게'(고요아침)다.

 

시인 오탁번은 1943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학과, 국문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1969년에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에 돌입했다.

오 시인은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8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시집에는 ‘1미터의 사랑’, ‘벙어리 장갑’ 등 다수와 시론집 ‘현대문학 산책’, 한국 현대시사의 대립적 강조‘, ’현대시의 이해‘ 등이 있다.

“정말 뜻 밖이다”라고 운을 뗀 오 시인은 이어진 ‘모국어에 대한 경례’라는 제목의 수상소감에서 “뜻밖인 만큼 처음소식을 듣고는 어리둥절했는데 며칠지나면서 고산문학대상은 소중한 기쁨으로 소중히 다가왔다”고 밝혔다.

오 시인은 또, “고산의 시적 상상력의 먼 지평에는 민족신화의 재생이라는 역사적 당위성을 갖고 있고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고귀하고 값진 것이 아닐 수 없기에 ‘모국어에 대하여 경례’하는 내 모습을 보고 고산 선생이 지긋이 웃고 계실 것 같다”는 소감을 발표했다.

이 날 고산문학대상 수상식에 앞서 삼호학당과 해남문화원 주관으로 고산 시가 중 자기가 애송하는 작품을 낭송하는 고산시가 낭송대회가 열려 대회에 참가한 고산을 사랑하는 어르신들의 소중한 시가 낭송이 행사장을 울렸다.

한편, 고산문학축전은 녹우당서 청소년 백일장을 시작으로 '고산의 뜰에서 시를 줍다'라는 주제로 '고산문학의 밤' 행사가 성황을 이룬 가운데 진행됐으며 15일 낮에는 해남 문학유적답사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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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해 / 오탁번

 

 

간밤에 비 오고 바람 불어

새벽에 지팡이 짚고

밤 주우러 나간다

알밤은 다

한발 빠른 다람쥐 차지

나는 송이밤 몇 개

 

해가 뜨면

풀밭이 된 마당에서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버마재비

제 세상 만난다

고추잠자리 떼

혼자 어지럽다

 

낮곁 내내

보행기 미는 노인 한둘

텅 빈 동네

벼 익는 논배미마다

지는 해

더디다

 

 

 

알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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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미덥게 펼쳐진 순수회귀의 시학

 

자유와 허무, 방랑의식과 민족혼을 처연한 감성과 큰 스케일로 노래했던 공초 오상순 선생의 시적 위의(威儀)는 오늘날 한없이 왜소해지고 사사로워진 우리 삶의 성찰적 역상(逆像)이 되어주기에 족하다.

 

선생을 기리는 공초문학상 제28회 수상자로 선정된 오탁번 시인은 이러한 공초 선생의 면모에 최대한 부합하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활달한 언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실물적으로 포착하고 재현하는 능숙한 역량으로 이미 우리 문학사의 고전이 된 분이다. 그의 시세계는 기억 속의 유년과 고향에서 시작하여, 가장 순수한 원형을 간직한 원서헌근처의 생명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져온 과정을 담아낸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우리 기층언어에 대한 지극한 헌신을 이루어낸 시집 알요강’(2019)은 이러한 만유 공존의 상상력을 극점에서 드러낸 명품이다. 거기 실린 수상작 하루해하루해아래서 때로 부지런하고 때로 느리게 움직여가는 자연의 풍경을 부조하면서도 낮곁 내내/보행기 미는 노인 한 둘을 대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더디게 스러져가는 삶을, 쓸쓸하지만 환하고, 비어 있지만 가득한 삶의 역리(逆理)로 노래하고 있다. 오탁번만의 천진성과 반()근대적 시법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순은(純銀)이 빛나는 아침으로부터 뉘엿하게 기울어가는 해거름까지, 하루해의 시간을 근원적 시선으로 발견한 순수 회귀의 시학이 미덥게 펼쳐진 것이다.

 

- 심사위원 이근배·유자효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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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 / 오탁번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내린다 속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 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게 첫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당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정지용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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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출신 시인 오탁번 씨가 지용회가 제정하고 계간 '시와 문화'사에서 주관하는 제9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지난 88년 정지용 시인이 해금된 후 정지용 시인의 높은 문학적 성과와 문학사적 위치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 상은 지난 한 해 동안 뛰어난 작품 한 편을 선정해 수상하는 것이다.

 

오탁번 시인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로 당선되고 뒤이어 동아일보, 대한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오탁번 시인은 시작을 통해 서정성과 주지적 감각을 아름답고 탄력 있게 결합함으로써 서정시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수상작 백두산 천지는 정지용 시인의 시 '백록담'과 짝을 이룰 만큼 서정성과 깊이가 돋보인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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