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내밀다 / 맹문재
1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담장 가에 달려 있는 사과들이 불길처럼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 어기고 싶었다
손 닿을 수 있는 사과나무의 키며
담장 안의 앙증한 꽃들도 유혹했다
2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나오는데
주인집 방문이 열리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사과를 허리 뒤로 감추었다
마루에 선 아가씨는 다 보았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3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다시 놀랐다
젖을 빠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 소 같은 눈길로
할머니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나는 감추었던 사과를 내밀었다, 선물처럼
12일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13회 고산문학축전에서 맹문재 시인이 시부문 고산문학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이번 수상시집은 ‘사과를 내밀다’이다.
고산문학대상은 국문학의 비조인 고산 윤선도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한글의 우수성을 잘 우려낸 고산시가의 문학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국내 문학상 가운데 상당한 권위와 명예를 지니고 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맹문재는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마친 뒤 1991년 <문학정신>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공고를 졸업한 맹 시인은 한 때 공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가 있다.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을 받았으며 현재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수상소감에서 맹문재 시인은 “고산문학대상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고산의 시들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오우가’를 비롯한 ‘산중신곡’, ‘어부사시사’를 읽고 이번에 발견한 점은 화자가 움직인다는 것 이었다”고 말했다.
고산은 부단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맹 시인은 “그 움직임이 이치를 벗어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치를 지향하는 바가 분명했지만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고 여유로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고산의 시에는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품위를 지니고, 담백한 시선이었지만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아 고산의 어조는 힘이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이어 맹 시인은 “저는 고산의 시에서 움직임을 배웁니다. 이치를 고민하는 움직임, 새로운 이치를 지향하는 움직임, 물러서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움직임, 개인을 넘어서는 움직임, 시비를 가리는데 타협하지 않는 움직임, 이약하지만 큰 움직임...등”이라며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신경림 시인은 심사소감에서 "'사과를 내밀다'의 시들은 사회문제나 노동문제를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화 하면서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점을 상당부분 극복해 내고 있다"며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 시, 말장난으로 시종하는 시가 문학성 혹은 전위성 이라는 미명아래 횡행하는 우리 시단에서 이와 같은 시집은 아주 소중할 수 밖에 없다"고 극찬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해남군이 이끌고 고산문학 축전운영위원회(위원장 구중서)와 계간 ‘열린시학’이 함께 주관했으며 시조부문 수상시집은 조오현 큰스님이 펴낸 ‘적멸을 위하여’가 수상했다. 심사위원은 본상 심사에 김재현(현대시조포럼 회장·박시교(추계예술대 문창과 교수)·신경림(시인)·정희성 시인이 맡았다.
'국내 문학상 > 고산문학대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5회 고산문학대상 / 안상학 (0) | 2021.07.21 |
---|---|
제14회 고산문학대상 / 강형철 (0) | 2021.07.21 |
제12회 고산문학대상 / 이영춘 (0) | 2021.07.21 |
제11회 고산문학대상 / 오탁번 (0) | 2021.07.21 |
제10회 고산문학대상 / 이건청 (0) | 2021.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