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내 그림자극 / 박 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처럼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에서 먼저 달려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나와 처음으로 스친 그림자는 담에 널린 담요를 걷어 한쪽 다리가 없는 비둘기를 감싸안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림자는 비둘기를 날려주고 담요를 다시 널어놓았다 그 그림자는 옆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다음 그림자는 비디오테이프의 같은 장면을 서른 두 번 돌려보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열한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는 울었고 스물 여섯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가 사정을 했다 그림자는 말 더듬는 일을 즐겨 할 것이다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언젠가 버스 옆자리에 함께 앉고 싶은 그림자다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 같이 고음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몰랐다 엄마의기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밖에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 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가슴에 안아야 했나요
천장엔 옷가지가 우거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속의 새들이 쪼아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고 싶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의 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 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 내밀었다 짧아지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기에 맞춰 몸을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 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에서 잠드는 우리는 제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속에 담아온다
* 베누아 페터즈
바람세탁소
수면의 바람이 강변의 벚나무에게 옮겨간다
나무에 장이 서는지, 잎들이 소란스럽다
새벽의 퉁퉁 부은 눈꺼풀 속에 지난밤의 꿈을 담아왔다 천막을 팽팽하게 끌어당기면 물건을 팔거나 사러 온 사람들은 장에 가기 전에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렀다 두고 간 옷가지에 묻어있던 주변 마을의 흙들은 저마다 조금씩 빛깔이 달랐다 그새 얼마나 컸냐,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기침소리 앞세워 안개를 걷어내는 할아버지 내 고추 그만 만져요 발갛게 익어 떨어질 것 같잖아요
바람이 벚나무의 가지를 손보고 있다
다음 장이 서면 바람은 벚꽃을 내놓을까
보따리를 풀어놓고 할머니들은 줄지어 앉았다 수다가 들풀로 피어난 그 밭둑 사이에서 나는 보폭을 잃고 둥둥 떠다녔다 자주 길을 잃었지만 실밥이 옷자락에 묻어 나풀댔으므로, 집을 잃지는 않았다 바싹 마른 노을이 걷히면 물건을 팔거나 산 사람들은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러 집으로 갔다 장터에 남은 바람이 빨랫감을 더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로 불어왔다
벚나무가지 바람이 수면으로 돌아온다
벚꽃잎 신발 한 켤레 사 신고 하류를 향해 걸어간다
히말라야 변기
히말라야에서 찍어 온 사진 한 장이 욕실에서 머무르던 밤이었지 꿈속에서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지 거울 속에서 눈 대신 변기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 변기에 담긴 거울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들 때, 거울이 내 표정처럼 쩍 금가며 말했어
눈물은 안에서부터 차오르지 않아 한 무더기 말과 냄새처럼 피어나는 풍경들을 네 시선이 고이는 곳에 싸질러 두는 거지 거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구멍 속으로 빨려들다 변기 밖으로 몇 방울 튀면,
그게 눈물이야 나를 보고 싶을 때면 변기를 열지 입을 대고 외친다 여보세요 메아리가 들려온다 변기에 입을 대고 외친다 나야 네 눈망울에 내 얼굴이 찰랑댄다
바람은 메아리를 두텁게 얼리고 어둠을 얼렸지 욕실의 창밖은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이었어 정상에 다가갈수록 추워지는 기압골에서 별빛은 가려졌다 드러났다 했지 지상의 온기는 죄다 빨려 들어갔고, 언저리에 묻어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보며, 오- 해가 떴다 외쳤지 구멍은 뭔가 빨려 들고 있는 중에는 보이지 않지 내 체온을 느끼고서야 따뜻하다고 말했어 아침이면 거울 속에서 나는 부은 몸을 떨며 언 채로 구조되었지
뒷모습
집 안에서 어렵지만 집 밖의
옥상에 가면 그의 굽은 등과 마주볼 수 있다
산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팔이나 다리 중에 하나가 사라지고 없는,
지난 산행에서 돌아오던 그의
왼쪽 다리는 간데 없고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풍란 한 촉을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말없이 가리키는 고갯짓을 따라 먼 산에 가보면
흰 양말을 벗어둔 그의 왼쪽다리가
등산로 구석 나무그늘 아래서
까맣게 여문 발톱들을 매달고
꼼지락거리며 쉬고 있었다
오래 전, 두 팔을 심어 둔 산의 날씨는 사나웠다
바람이 불면 그의 두 팔은 나부낀다
야! 똥 방위라고 놀리던 집주인의 목 언저리에서,
손님의 수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내 대신
그릇이나 가구들을 집 앞에 생가지처럼 부러뜨려 놓으면서,
팔 대신 뿌리내린 가녀린 화초들은 나부낀다
그때마다 지난밤에 걷히지 못한 어둠들이
웅크린 어깨에 안개로 걸려
아침까지 펄럭인다
하나 남은 오른쪽 다리는 어디에 심을까
옥상 화단에 몇 안 남은 빈자리들을 살펴보는지, 그는 더 웅크린다
화단의 흙을 누군가 다져놓았다
누가 틔운 뒷모습인지 그 발자국에서도
그림자가 자라기 시작한다
[심사평]
당선작으로 결정한 최정진 씨(기울어진 아이 외 19편)는 투고 작품 전편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든든했다 전체적으로 언어의 밀도가 높고, 오랜 숙고 끝에 얻었을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시편마다 풍요롭게 내장되어 있다.
의도적인 여백의 창조가 필요하다 싶을 만큼 넘치는 이미지들이 다채로운 비유들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지만, 그 실족은 그대로 또 다른 매혹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미지의 결여보다는 이미지의 잉여가 시를 출발하는 시기에는 장점이 될 수 있음에 우리는 동의하였다 이는 시적 언어에 대한 충분한 자의식을 이 시인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관찰과 습작의 내공, 상상의 기미를 포착하는 기민함, 이미지가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처와 조우하는 진정성, 서정적 언어 속에서도 전복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내장한 점 등을 골고루 평가하여 최정진씨를 신인 시인으로 모신다.
한국에 온지 4년째 되는 쁘띠와 다카의 신부 리나의 전화 결혼식이 열리는 날, 소주병에 눌어붙은 붉은 두꺼비마냥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이 공단 쪽방에 모여 있다.
춥게 웅크린 저녁이 그들을 따 마시는 동안 한번 서로의 안주가 되어보지 못한 쁘띠와 리나가 전화선을 비집고 입장한다. 신부의 여린 숨결에도 찢기고 터진 등허리들은 기역니은으로 엎어져 아프다하는데 작업복으로 가만히 수화기를 감싸는 사내, 젖은 그림자가 바다를 건널까, 취하여 비틀대는 어둠들을 비끄러맨다. 마을 까지*의 설교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 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 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 거, 요새는 전화로도 섹스를 한다는데, 이 참에 첫날밤도 전화로 세우지 그러나? 엷은 웃음들이 서로의 콧김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구공탄처럼 금세 뜨거워지는 두꺼비들.
비비기 전 갓 엎은 공깃밥처럼 리나의 꿈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이슬람 종교 지도자 직위 호칭.
엑스트라
- 만적의 난
나무깽이와 죽창을 틀어쥔 채 흡반같은 카메라 앞에서 만적의 난을 재현하는 새벽
자정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태풍에 밭뙈기를 잃은 만적 불황에 일자리를 잃은 만적 경마에 처자식을 잃은 만적이가 씨벌헐 씨벌헐 무릎을 찧어가며 31시간 혁명을 일삼는 중이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 엑스트라인가 쉴 새 없이 죽창을 휘두르며 나는 노비 혁명을 주도한 만적이가 최충헌의 家奴였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차별이 차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혁명이 혁명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지만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봉수대처럼 집채는 불 타 오르고 보조 출연자들은 똥돼지처럼 소리치는 반장의 악바리에 똥줄기가 빠지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들 만적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깨동무로 싸맨 채 봉기의 창끝으로 冬天을 가른다.
엑스트라2
- 서대문 형무소에서
스탠바이, 감독의 지시에 400번대 죄수복을 입고 우리는 감방 안으로 들어선다. 버짐나무껍질처럼 하얗게 부스러진 형무소 내벽 페인트 찌끼들, 비스킷 자르듯 뚝뚝 쪼개며 우리들은 서로 손병희다, 이정재다, 흰소리를 한다. 이윽고 주인공이 시구문으로 끌려가면 우리들은 감방 문을 두들기며 환호작약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환호하는 만큼의 아우성과 수당일 뿐.
캇, 스텝들이 옥사 밖으로 사라진다. 조명이 꺼지면 폐쇄된 우물처럼 젖어드는 고요.
문득 환호소리가 비명이 되어 나를 옥죈다. 마루에 주저앉자 비로소 손톱자국과 수십 년 묵은 먼지가 제 뼈를 드러낸다. 차마 알아볼 수조차 없게 흘려 쓴 글귀들 生生히 남아 압정처럼 고무신 신은 내 발을 찌른다. 용수를 쓴 채 이 곳을 지났을 사내들, 그들 역시 엑스트라에 불과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머리를 짓찧으며 죽어갔을까. 일당 삼만 칠천 원을 허리춤에 끼워 넣으며 나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형무소의 뼛가루를 공원에 뿌린다.
행인 1, 2 무심히 홍예문을 지나면 용수를 벗어던진 패랭이꽃 하나, 祝文처럼 묵묵히 조명을 켠다.
두루마리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두루마리를 뜯는다.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홀연히 떨어져 나와 두엄더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 한 점 한 점 두루마리의 살점을 뜯어 내 남은 몸을 닦는 동안 어느새 나와 두루마리는 한 몸이 되어 조심스레 풀어지기 시작한다. 가슴 속 한 잎 물방울 속 대롱 타고 쪼르르 내려와 기스락에 매달린다. 톡톡 새살 터지는 소리, 宇宙는 어디서부터 비워지는 것일까. 문틈 이마 위로 청솔모 한 마리 앞 이로 개암을 탁 터뜨리자 내 속이 환하게 열린다. 다 풀어낸 두루마리의 종이깍지처럼 몸속의 텅 빈 주름이 훤하다.
벽에서 배내똥 냄새가 하얗게 묻어난다.
탄피를 캐며
이 마을 사람들이 몰래 약초 캐러 사격장에 다녀간 사이, 사격 연습을 마친 우리들은 彈皮를 캐러 산에 들어갔습니다. 사람 손 밟은 풀들의 무릎이 흩뿌려져 있던 자리,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인형의 머리를 뚫고 온 탄피의 뜨거운 살갗 뿐.
우리는 서로에게 묻힌 파편을 캐내며 보았습니다. 사격장 山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 밤에는 먹지로 자신을 칠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문득 서로의 검은 얼굴을 들어 맞은편에서 탄피를 캐고 있는 이들을 훔쳐보았습니다. 저들의 머리와 우리 머리와의 거리,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공간을 지뢰를 품은 풀들과 크레모아 앞에 선 산짐승들이 메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콜록이며 애써 기침을 나누었습니다. 스적스적 바람에 실리어 떠가는 풀빛… 우리는 무엇의 껍데기일까, 우리가 이제까지 뚫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 탄창에 탄피를 채워 넣으며 우리는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불발시켰습니다.
내가 짜박짜박 걸어 다닐 때,가루농약을 콕콕 찍어 맛보고 있는 나를 엄마가 발견했다고 합니다.물로 입안을 헹구면,내가 그 물을 꿀꺽 삼켜버릴 것 같아 혀에 묻은 농약을 당신의 혀로 닦아내줬다고 합니다.
詩를 만난 지, 5년째입니다.나는 가루농약을 찍어 맛보듯 콕콕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그리고 내가 조제한 독을 혀끝에 올려 맛보았습니다.수없이,낙선했습니다.그때마다詩는 혀를 내밀어 나의 혀를 닦아내줬습니다.단번에 꿀꺽 독을 삼켜 심장으로 스미지 않게 우둔한 혀를 닦아내주었습니다.
독을 닦아내주느라 고통스러웠을 가족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특히,독 묻은 혀뿐만 아니라 기도로 날마다 내 영혼을 씻겨주신 어머니 김영심 여사와 아버지 박병문 님께 이 상을 바칩니다.기독교 동인모임<품시>에게 향기 나는 백합꽃 한 다발을,내 생의 수많은 인연들과 의령군민들께도 양떼구름 지나가는 푸른 하늘을 아침 창가에 내려놓고 싶습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뚜렷이 알겠습니다.나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의 손이 부끄러워지지 않게끔 열심히 시를 쓰는 일,그리고 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일!
제2회 천강문학상은 시, 시조부문을 분리시켜 시부문과 시조부문으로 나누어 모집했다. 시부문의 경우 전국에서 고루 응모해 왔고 기성과 신인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르고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32편이다. 본심에서 가려내는 기준은 다음과 같이 정했다. 1)쓸 데 없이 길게 쳐지는 작품은 제외한다. 2)목적 없이 우회하거나 내면화하는 작품도 제외한다. 3)언어미학에 닿지 못한 작품도 제외한다.
이런 기준을 놓고 작품을 읽는데 지나치게 심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그냥 지나가는 눈으로 시를 읽으면 실력이 탄탄해 보이고 어딜 내놓아도 뽑힐 만한 작품으로 보이긴 한데 정작 심층적으로 읽어나가면 대체로 겉도는 소리를 내는 것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겉멋을 내는 것으로 대상에 대한 골똘한 사색이 없는 것일 터이다.
난해를 위한 난해로 가는 시편들은 울림을 주지 않는다. 난해시라 하여 울림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난해가 하나의 흐름이나 목소리를 얻을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는 난해라 하더라도 소정의 울림을 준다.
대상으로 뽑아 든 <토구(土狗)>와 우수상으로 뽑아 든 <숫돌>, <눈부처> 3편은 앞에서 제시한 기준에 비교적 안착해 있는 시로 읽힌다. <토구>는 땅강아지과에 속하는 곤충을 소재로 쓰여진 우화적 터치의 시다. ‘토구’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데, 일상이라 했지만 사실은 생애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난해하지 않고 ‘토구’의 특색에 맞추어 나직 나직 말하고 있다. 욕심을 크게 내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인다. 어쨌든 ‘토구’가 살아감에 있어 대신할 수 없는 삶, 그 실존이 벗어날 수 없는 멍에라는 점을 각인시켜 준다.
우수상으로 뽑힌 <숫돌>은 숫돌이 가진 특질에 맞추어 이미지를 풀어내는 솜씨가 눈에 띈다. 숫돌은 대질리면서 닳는 것인데 ‘너를 위해 눕고’ ‘빛나는 너’를 위해 닳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사각지대에 있는 한 생애를 드러내면서 공동체라든가 사랑이라는 내포로까지 의미가 확산되고 있음이 예사롭지 않다.
같은 우수상으로 뽑힌 <눈부처>는 잘 익은 서정시다. 앵두 한 알 같다는 느낌을 준다. 작지만 완결된 맛을 보여주는 순서정의 시다. 우리는 시를 사변적으로 끌고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시의 출구를 철학적이거나 현학적인 어느 쪽으로 내어 보려는 지나친 지적 갈증에 빠져 있지 않은지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이럴 때에 ‘이것이다.’하고 대안이 되는 한 편의 시를 내놓게 된다면 <눈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눈사람처럼 곧 녹아버릴 것 같은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 따스함을 말해주고 있다.
입상자 세 분은 지금처럼 그 고삐 그대로 쥐고 나가면서 자기들의 세계를 착실히 구축해 주기를 기대한다. 박수를 보낸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물을 먹고 있는 화분을 지켜보았다 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은 한 송이 꽃이었다
꽃에게는 화분이 전부였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한 삽의 흙이면 충분했다
우리가 한 삽의 흙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동요를 따라 부르던 시간, 열이 난 이마에 올려놓은 어머니의 손 그녀가 내게 전송해준, 두 개의 귤 그림 떨어져 있어도 함께한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짧은 문자 메시지들 그것들은 신이 미리 알고 우리 속에 마련해 놓은 화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 속에서 꽃 피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따뜻한 종소리
보리차를 마신 후 컵을 두 손으로 안는다
컵이 아직 따뜻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컵을 간절히 안았던 적이 있었나
컵은 보리차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
누가 잠시 머물렀던 기억으로 빈 컵이 나를 데우고 있다
이 기억을 나도 누군가에게로 옮겨 가야하리라
겨울이다 차가운 세상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구세군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데워진 것은 식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전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종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간장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내 놓는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몸은 잔뜩 부어올랐지만 가벼운 영혼을 붙잡기엔 아직 덜 무거웠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었다는 것을. 방에서 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그런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 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 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 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 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았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우주는 점이었다. 그 점이 고온과 고압을 견디지 못하더니 터졌다. 빅뱅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우주는 생겨났고 지금도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
시골에서 보내던 몇 년. 봄이 오면 집 앞에 피어있던 목련을 자주 쳐다보았다. 목련도 점이었다. 그 점에서부터 몽우리를 만들더니 마침내 터지는 그곳에 꽃을 피웠다. 벌과 나비들이 꽃가루와 향기를 몸에 묻혀 날아갔다. 나는 그것이 우주가 팽창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내 속에도 작은 점이 찍혔다. 그 점 역시 스스로를 견딜 수 없어 하더니 몽글몽글해졌고 가슴을 가득 채울 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어느 날 뻥뻥 터지기 시작했다. 터져 나온 조각들이 시였다.
과학책을 읽고 읽던 찰나 당선 연락을 받았다. 나는 아주 조금씩 붉게 변하던 별과 그 별을 매일 밤 관찰하고 기록했던 과학자를 떠올렸다. 그 별은 우주 팽창의 증거였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매일 밤을 지새우던 과학자는 내게 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 한편을 쓰기 위해 밤을 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나를 넓혀가던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직 몽긋몽긋 솟아오르는 점들이 내 속에 더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 점들을 스스로 눌러 터트려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 변명거리를 마련해준 심사위원님들과 한국문학방송에 감사드린다. 점이었던 나를 세상으로 터트려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기로 애초부터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평가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는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했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총응모자는 236명, 작품수로는 1,180편이었다. 예심에서 거르고 걸러진 10명의 작품 50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당초 5명의 작품 25편 정도만 본심에 부치려 작정하였으나 예상 외로 우수 작품이 많이 인지된 관계로 그 대상을 늘렸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인적사항이 삭제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김신영 시인(동서문학 등단, 문학박사)과 배찬희 시인(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인천여성문학회 이사), 석정호 시인(월간문학 등단, e문학회 회장), 최용석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중앙대 강사 역임) 등 네 분이 맡아 참으로 진지하고도 꼼꼼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했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시종일관 많은 고민을 했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좀 달리,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미리 배점한 가운데 채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기에, 당선작은 그와 같은 항목들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바란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러한 방침은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이번 신춘문예에는 미국, 아르헨티나, 호주, 독일, 중국 등 다수의 해외동포를 비롯해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은 물론 부산, 경남, 울산, 대구, 경북,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강원, 제주 등 전국 각지로부터 작품이 접수됐다.
당선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도 큰 관심과 함께 도전장을 던져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