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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외투 / 김은상

 

사내가 구름장을 끌어 덮는다
공중을 터뜨리며 쏟아지는 함박눈
고무로 동여맨 하반신을 쓸어안는다
가르랑거리는 숨을 밟고
지나가는 단단한 굽 소리들
사륜 널빤지 아래서
깨진 구름조각으로 출렁거린다
양손으로 바닥을 당길 때마다
한 뼘 한 뼘 기우는 지평선 위
민달팽이 긴 발자국이
살얼음 까는 잔물결로 술렁댄다
상자 속으로 동전이 떨어질 때
반짝 성에 낀 속눈썹 치키는 사내
팽팽하게 일어선 검은 주름이
애벌레 등피처럼 꿈틀거린다
모였다 흩어지는 게 몸이라는 듯
종아리에 쌓인 살갗 흘러내려
외투 안쪽 절반이 떨어져 간 길들
덜컥덜컥 사내의 몸통을 휘감는다
늑골 속 눈발이 뒤척이고 있다

 

 






저수지 / 김은상

 

아버지의 무릎에 물안개가 일렁거린다
손바닥을 대자 손톱에 담긴 달 잔물결에 빠져 현이 울렁댄다
물속에 머리채를 담그고 밤을 중얼거리는 수양버들처럼      
병상 위에 묶인 검은 맨발 고향 저수지를 서성 거린다
죽고 없는 친구들의 이야기 한참 허공에 풀어 놓다가도
댁은 뉘신지, 던진 말이 늑골 속 물수제비로 날아든다
낚고 싶은 기억 한 줄이 있어 내가 누구, 핏줄을 물어도
빈 잇몸으로 삐비꽃을 씹으며 젊었던 한때 둔덕을 헤맨다
몸속을 맴도는 나이테도 오래되면 멀미를 하는지
포르말린 향기 가득한 달의 요의 기저귀에 그려넣은 백발의 아기
엄마, 잠결에 흘러나온 가는 목소리 가랑잎 한 장으로 파문 속에 잠긴다
요강 같은 달무리 물의 지문을 지우고 수문 아래로 떠내려간다 

 

 




하늘로 흐르는 하지정맥류 / 김은상

 

  벚나무가 파릇해진 길을 하늘로 밀어 올린다
  간밤 소나기에 어깨를 걸고 재잘대던 양철 지붕들 모스부호로  초근목피를 간질였는지  가지마다  꽃망울이 돋아있다
  사내가 헐렁한 대문을 밀고 삐거덕삐거덕 걸어 나온다
  끈적거리는 그림자가 어깨를 당겨 기역자로 구부러진 등허리 납작 고개를 수그린 집들과 엉켜 젖은 바닥 위를 꿈틀댄다
  몇 겹 접힌 양복바지를 무릎까지 추켜 올리자 때묻은 소용돌이 종아리에 펼쳐진 검푸른 등고선을 흔든다
  벚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겨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복사뼈 밑 그늘이  밑동에 흥건하게 고인다
  영등포역을 지나가는 열차 소리 덜컹덜컹  정맥 속으로 스며들어 사내가 떠나온 길들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처마 밑 폐지를 등에 업은 손수레가 들개처럼 주저앉아 몸을 말리는 아침 골목의 하지정맥류가  비린 그늘들을 수혈한다
  사내가 벚나무에 등을 기댄다 흔들리는 꽃망울들 공중을 쓰다듬어 꽃받침 가득히 햇살을 채운다
  하늘로 파고드는 핏줄들 팽팽하다










[심사평]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 앞에 놓인 작품은 「때」외 5편,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 「손의 영정」외 9편, 「서쪽으로의 일출」외 9편, 「밤의 그네」외 19편이다.


 「때」외 5편의 응모작 중에서 주목받은 작품은 「몹쓸, 소나타」이다. 이외의 작품들과 함께 이 응모자가 공들인 것은 소재의 병치라는 기법을 활용하여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인데, 「몹쓸, 소나타」에는 그 단면의 실상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이 이 작품의 성취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문장이 불안하다는 점이 이 응모자의 결점이다. 문장이 불안할 때 시의 리듬도 소멸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물과 사건에 그것들의 잠재되고 은폐된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들이다. 시적 발견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그러나그 발견을 위한 언어들의 배치가 평이하다 보니 발견의 노력 자체가 설명적이다. 문제는 발견이 아니라 그 발견을 시적으로 가공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것이 언어를 공교하게 꾸미는 능력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발견된 시적 의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시의 구조로 용해되는가의 문제이다. 「손의 영정」외 9편은 무난한 작품들이다. 언어들이 자연스럽고 시상의 형상화에 무리가 없다. 이는 응모자의 시적 공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것이다. 그런데 한 편의 시가 최종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그 자연스러움 못지 않게 결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결기를 시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힘이 시의 언어들에 굴곡을 부여하면서 매듭을 맺어주는 것이다. 이 응모자에게는 그 힘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심사자들은 김은상 씨와 박찬세 씨를 함께 당선작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김은상 씨는 무엇보다도 시적안정과 완결성이, 박찬세 씨는 과감한 상상력이 장점이라고 판단되었다. 우선 김은상 씨는 안정적이고 미적인시상 전개와 아울러 결말부를 맺는 능력이 돋보였다 현실인식도 만만치 않다. 갈고 닦은 언어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경우인데, 다만 한 가지 시의 형식이 지나치게 단순해서 상상력을 한정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기로 한다. 박찬세 씨의 시는 정격과 파격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의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이것은 아직 자기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않은 신인이기 때문일 터인데, 전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못지않게 유행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용기야말로 박찬세 씨의 진정한독특성을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최근의 한국시단은 젊은 상상력의 활기와 소란 그리고 풍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듯 보인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일이야말로 흥미 있는 일인데, 신인의 출현을 경험하는 즐거움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신인들은 한국문학의 새 자리를 어떻게 채워나가게 될까? 실천문학이 내보이는, 크게 대비되는 두 명의 시인이 그 답을 채워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된 분들에게 축하를 보내면서 끝까지 고려 대상이 되었던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선우, 박수연,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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