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모래내 그림자극 / 박 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처럼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에서 먼저 달려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나와 처음으로 스친 그림자는 담에 널린 담요를 걷어 한쪽 다리가 없는 비둘기를 감싸안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림자는 비둘기를 날려주고 담요를 다시 널어놓았다 그 그림자는 옆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다음 그림자는 비디오테이프의 같은 장면을 서른 두 번 돌려보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열한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는 울었고 스물 여섯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가 사정을 했다 그림자는 말 더듬는 일을 즐겨 할 것이다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언젠가 버스 옆자리에 함께 앉고 싶은 그림자다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 같이 고음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