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모래내 그림자극 / 박 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처럼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에서 먼저 달려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나와 처음으로 스친 그림자는 담에 널린 담요를 걷어 한쪽 다리가 없는 비둘기를 감싸안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림자는 비둘기를 날려주고 담요를 다시 널어놓았다 그 그림자는 옆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다음 그림자는 비디오테이프의 같은 장면을 서른 두 번 돌려보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열한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는 울었고 스물 여섯 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가 사정을 했다 그림자는 말 더듬는 일을 즐겨 할 것이다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언젠가 버스 옆자리에 함께 앉고 싶은 그림자다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 같이 고음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728x90


기울어진 아이* / 최정진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밖에 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 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가슴에 안아야 했나요

 

천장엔 옷가지가 우거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속의 새들이 쪼아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고 싶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의 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 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 내밀었다 짧아지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기에 맞춰 몸을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 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에서 잠드는 우리는 제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속에 담아온다

 

* 베누아 페터즈

 

 

 



 

바람세탁소

 

수면의 바람이 강변의 벚나무에게 옮겨간다

나무에 장이 서는지, 잎들이 소란스럽다

 

새벽의 퉁퉁 부은 눈꺼풀 속에 지난밤의 꿈을 담아왔다 천막을 팽팽하게 끌어당기면 물건을 팔거나 사러 온 사람들은 장에 가기 전에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렀다 두고 간 옷가지에 묻어있던 주변 마을의 흙들은 저마다 조금씩 빛깔이 달랐다 그새 얼마나 컸냐,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기침소리 앞세워 안개를 걷어내는 할아버지 내 고추 그만 만져요 발갛게 익어 떨어질 것 같잖아요

 

바람이 벚나무의 가지를 손보고 있다

다음 장이 서면 바람은 벚꽃을 내놓을까

 

보따리를 풀어놓고 할머니들은 줄지어 앉았다 수다가 들풀로 피어난 그 밭둑 사이에서 나는 보폭을 잃고 둥둥 떠다녔다 자주 길을 잃었지만 실밥이 옷자락에 묻어 나풀댔으므로, 집을 잃지는 않았다 바싹 마른 노을이 걷히면 물건을 팔거나 산 사람들은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러 집으로 갔다 장터에 남은 바람이 빨랫감을 더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로 불어왔다

 

벚나무가지 바람이 수면으로 돌아온다

벚꽃잎 신발 한 켤레 사 신고 하류를 향해 걸어간다

 

 

 



 

히말라야 변기

 

히말라야에서 찍어 온 사진 한 장이 욕실에서 머무르던 밤이었지 꿈속에서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지 거울 속에서 눈 대신 변기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 변기에 담긴 거울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들 때, 거울이 내 표정처럼 쩍 금가며 말했어

눈물은 안에서부터 차오르지 않아 한 무더기 말과 냄새처럼 피어나는 풍경들을 네 시선이 고이는 곳에 싸질러 두는 거지 거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구멍 속으로 빨려들다 변기 밖으로 몇 방울 튀면,

그게 눈물이야 나를 보고 싶을 때면 변기를 열지 입을 대고 외친다 여보세요 메아리가 들려온다 변기에 입을 대고 외친다 나야 네 눈망울에 내 얼굴이 찰랑댄다

바람은 메아리를 두텁게 얼리고 어둠을 얼렸지 욕실의 창밖은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이었어 정상에 다가갈수록 추워지는 기압골에서 별빛은 가려졌다 드러났다 했지 지상의 온기는 죄다 빨려 들어갔고, 언저리에 묻어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보며, 오- 해가 떴다 외쳤지 구멍은 뭔가 빨려 들고 있는 중에는 보이지 않지 내 체온을 느끼고서야 따뜻하다고 말했어 아침이면 거울 속에서 나는 부은 몸을 떨며 언 채로 구조되었지

 

 

 



 

뒷모습

 

집 안에서 어렵지만 집 밖의

옥상에 가면 그의 굽은 등과 마주볼 수 있다

산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팔이나 다리 중에 하나가 사라지고 없는,

 

지난 산행에서 돌아오던 그의

왼쪽 다리는 간데 없고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풍란 한 촉을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말없이 가리키는 고갯짓을 따라 먼 산에 가보면

흰 양말을 벗어둔 그의 왼쪽다리가

등산로 구석 나무그늘 아래서

까맣게 여문 발톱들을 매달고

꼼지락거리며 쉬고 있었다

 

오래 전, 두 팔을 심어 둔 산의 날씨는 사나웠다

바람이 불면 그의 두 팔은 나부낀다

야! 똥 방위라고 놀리던 집주인의 목 언저리에서,

손님의 수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내 대신

그릇이나 가구들을 집 앞에 생가지처럼 부러뜨려 놓으면서,

팔 대신 뿌리내린 가녀린 화초들은 나부낀다

그때마다 지난밤에 걷히지 못한 어둠들이

웅크린 어깨에 안개로 걸려

아침까지 펄럭인다

 

하나 남은 오른쪽 다리는 어디에 심을까

옥상 화단에 몇 안 남은 빈자리들을 살펴보는지, 그는 더 웅크린다

화단의 흙을 누군가 다져놓았다

누가 틔운 뒷모습인지 그 발자국에서도

그림자가 자라기 시작한다

 

 

 



 

 

 

[심사평]

 

당선작으로 결정한 최정진 씨(기울어진 아이 외 19편)는 투고 작품 전편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든든했다 전체적으로 언어의 밀도가 높고, 오랜 숙고 끝에 얻었을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시편마다 풍요롭게 내장되어 있다.

의도적인 여백의 창조가 필요하다 싶을 만큼 넘치는 이미지들이 다채로운 비유들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지만, 그 실족은 그대로 또 다른 매혹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미지의 결여보다는 이미지의 잉여가 시를 출발하는 시기에는 장점이 될 수 있음에 우리는 동의하였다 이는 시적 언어에 대한 충분한 자의식을 이 시인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관찰과 습작의 내공, 상상의 기미를 포착하는 기민함, 이미지가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처와 조우하는 진정성, 서정적 언어 속에서도 전복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내장한 점 등을 골고루 평가하여 최정진씨를 신인 시인으로 모신다.

여러모로 다채로운 가능성을 가진 젊은 시인의 출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최두석, 박수연, 김선우 






728x90


/ 김명철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며도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습격당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면적이어서

낮과 밤, 뼈와 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행알과 육삼빌딩과 깨진 돌과 핸들 꺽인

세발자전거와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지하철 탄 사내가 여자가 게릴라처럼 당신을 하얗게 습격해온다.

빈틈없는 생활

방심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당신에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한껏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당신은

저항하다 기어이 붙들리고 만다.

그 틈으로 당신의 절반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틈은 꼭 그만큼만 나 있다.


틈은 처음에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나중에는

당신을 제 마음대로 관리한다.







철근 구부리는 사내


내 안에서 그가 기둥처럼 넘어진 후

여름내 열병을 앓았네, 종잇장처럼 들떠 다니다

한 사내를 보았지. 여름도

백 년 동안의 맹독을 뽑아내려는지

녹물 같은 열꽃들 지천으로 꽃잎을 터뜨릴 때마다

신도시 여기저기에서 실밥처럼 터지는 혈맥,

사내는 이 완강한 여름을 맨몸으로 맞대면하지.

왜에 그랴아? 난 에미 잡아먹구 애비도 쥑인 년이여어.

독주를 퍼붓는 사내에게 눈을 흘기는 공사장 밥집 여자와

불화살 속에서 ㄷ자로 철근만 구부리는.

활대 같은 허리를 펼 때마다 허공에 지글거리는 눈빛을 쏘아 올리는

사내, 그때마다 사내 옆에 나도 꼿꼿이 서 있고 싶었네,

한밤 돌아서는 사내의 검붉은 등 뒤로도

여름은 허리를 굽히지 않았지

여름 한복판에 난 상처는 기어이 여름마다 더 깊고 넓게 도진다네.

쩡 쩌엉 강바닥까지 울린다 해도

겨울 울음은 봉합일 뿐 다음 여름을 가만가만

건너갈 수는 없지. 열꽃,

지지 않겠지만

철근 구부리던 사내의 눈빛을 나 잊지 못하네

제 그림자 속으로도 몸을 숨기지 않는 사내가 있다네.






고요한 균열


금줄이 대문을 가로지르자

눈발에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당 후박나무의 잔뼈까지 드러나는 새벽이어서

부정하거나 정한 것들도 쉬 드나들지 못했다


한 차례 더 늦겨울 폭설이 있었을 뿐 어둠도 가벼움도 바람도 정갈했다 눈 속에 동백이 피었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터의 무게중심이 대문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시작했다 집 벽에 굵은 금이 가로로 그리고 세로로도 지나갔다 몇 달만에 집은 붕괴되었다


집 없는 내 이마를 송곳처럼 파고들던 빗줄기와 햇살

그는 모자도 없이 먼 길을 떠났다


공터의 구석진 오후, 세발자전거의 꺾인 핸들 위로 덩굴풀이 마음대로 발을 얹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거실이었고 마당이었고 드높은 옥상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천 년을 살았다


오늘 아침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금줄을 쳤다 내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돌멩이의 시위


햇빛이 내시경처럼

머릿속까지 비집는 백주대낮,

4차선 고속도로를 달리던 덤프트럭에서

돌 하나가 갑자기 뛰어내린다. 깨진 머리로

도로 한 중앙에 버티고 앉아

입을 다문 채 눈알을 희번덕거리고 있다.


내 작은 머리통보다 더 작은 돌멩이의 어디에서

저토록 송두리째 몸을 내어던지는 맹랑한

배짱이 나오는 것일까.

두세 갈래로 찢어지는 단말마의 비명 자국과

끌끌거리는 욕설과 가래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돌멩이.

트레일러가 짱짱한 서슬에 놀라 움찔,

허리를 비틀다가 중심을 놓친다.

버둥거리는 트레일러의 꽁무니에

연신 코를 뭉개는 갤로퍼와 소나타와 신형 프라이드


갈수록 핏대를 세우는 돌멩이

방음벽 귀마저 한 모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죽어라,

내 자동차 뒷범퍼에 다글다글 매달리는,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소리들을 안으로 꽉꽉.

붙잡아맨 저 침묵.





728x90


전화 결혼식 / 이정하

한국에 온지 4년째 되는 쁘띠와
다카의 신부 리나의
전화 결혼식이 열리는 날,
소주병에 눌어붙은 붉은 두꺼비마냥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이 공단 쪽방에 모여 있다.

춥게 웅크린 저녁이 그들을 따 마시는 동안
한번 서로의 안주가 되어보지 못한
쁘띠와 리나가 전화선을 비집고 입장한다.
신부의 여린 숨결에도 찢기고 터진 등허리들은
기역니은으로 엎어져 아프다하는데
작업복으로 가만히 수화기를 감싸는 사내,
젖은 그림자가 바다를 건널까, 취하여 비틀대는 어둠들을 비끄러맨다.
마을 까지*의 설교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
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
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
거, 요새는 전화로도 섹스를 한다는데, 이 참에
첫날밤도 전화로 세우지 그러나?
엷은 웃음들이 서로의 콧김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구공탄처럼 금세 뜨거워지는 두꺼비들.

비비기 전 갓 엎은 공깃밥처럼 리나의 꿈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이슬람 종교 지도자 직위 호칭.







엑스트라 

- 만적의 난

나무깽이와 죽창을 틀어쥔 채
흡반같은 카메라 앞에서
만적의 난을 재현하는 새벽

자정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태풍에 밭뙈기를 잃은 만적
불황에 일자리를 잃은 만적
경마에 처자식을 잃은 만적이가
씨벌헐 씨벌헐 무릎을 찧어가며
31시간 혁명을 일삼는 중이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
엑스트라인가
쉴 새 없이 죽창을 휘두르며 나는
노비 혁명을 주도한 만적이가
최충헌의 家奴였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차별이 차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혁명이 혁명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지만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봉수대처럼 집채는 불 타 오르고
보조 출연자들은 똥돼지처럼 소리치는
반장의 악바리에 똥줄기가 빠지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들 만적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깨동무로 싸맨 채
봉기의 창끝으로 冬天을 가른다.







엑스트라2 

- 서대문 형무소에서

스탠바이, 감독의 지시에 400번대 죄수복을 입고 우리는 감방 안으로 들어선다. 버짐나무껍질처럼 하얗게 부스러진 형무소 내벽 페인트 찌끼들, 비스킷 자르듯 뚝뚝 쪼개며 우리들은 서로 손병희다, 이정재다, 흰소리를 한다. 이윽고 주인공이 시구문으로 끌려가면 우리들은 감방 문을 두들기며 환호작약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환호하는 만큼의 아우성과 수당일 뿐.

캇, 스텝들이 옥사 밖으로 사라진다. 조명이 꺼지면 폐쇄된 우물처럼 젖어드는 고요.

문득 환호소리가 비명이 되어 나를 옥죈다. 마루에 주저앉자 비로소 손톱자국과 수십 년 묵은 먼지가 제 뼈를 드러낸다. 차마 알아볼 수조차 없게 흘려 쓴 글귀들 生生히 남아 압정처럼 고무신 신은 내 발을 찌른다. 용수를 쓴 채 이 곳을 지났을 사내들, 그들 역시 엑스트라에 불과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머리를 짓찧으며 죽어갔을까. 일당 삼만 칠천 원을 허리춤에 끼워 넣으며 나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형무소의 뼛가루를 공원에 뿌린다.

행인 1, 2 무심히 홍예문을 지나면 용수를 벗어던진 패랭이꽃 하나,
祝文처럼 묵묵히 조명을 켠다.







두루마리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두루마리를 뜯는다.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홀연히 떨어져 나와 두엄더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 한 점 한 점 두루마리의 살점을 뜯어 내 남은 몸을 닦는 동안 어느새 나와 두루마리는 한 몸이 되어 조심스레 풀어지기 시작한다. 가슴 속 한 잎 물방울 속 대롱 타고 쪼르르 내려와 기스락에 매달린다. 톡톡 새살 터지는 소리, 宇宙는 어디서부터 비워지는 것일까. 문틈 이마 위로 청솔모 한 마리 앞 이로 개암을 탁 터뜨리자 내 속이 환하게 열린다. 다 풀어낸 두루마리의 종이깍지처럼 몸속의 텅 빈 주름이 훤하다.

벽에서 배내똥 냄새가 하얗게 묻어난다.







탄피를 캐며

이 마을 사람들이 몰래 약초 캐러 사격장에 다녀간 사이, 사격 연습을 마친 우리들은 彈皮를 캐러 산에 들어갔습니다.
사람 손 밟은 풀들의 무릎이 흩뿌려져 있던 자리,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인형의 머리를 뚫고 온 탄피의 뜨거운 살갗 뿐.

우리는 서로에게 묻힌 파편을 캐내며 보았습니다.
사격장 山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
밤에는 먹지로 자신을 칠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문득 서로의 검은 얼굴을 들어 맞은편에서 탄피를 캐고 있는 이들을 훔쳐보았습니다. 저들의 머리와 우리 머리와의 거리,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공간을 지뢰를 품은 풀들과 크레모아 앞에 선 산짐승들이 메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콜록이며 애써 기침을 나누었습니다. 스적스적 바람에 실리어 떠가는 풀빛… 우리는 무엇의 껍데기일까, 우리가 이제까지 뚫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 탄창에 탄피를 채워 넣으며 우리는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불발시켰습니다.






728x90


누나들 / 이성진

 

밤은 우주의 성격이다

 

누나들이 손을 잡고 걸어온다

학교 앞 문방구 창문 불이 꺼지고

백색 줄무늬 검은 나무들의 손을 잡고

바람 부는 방향으로 기린이 되어 걸어가면

남서풍이 북동향에서 불어온다

이것이 언덕의 학교로 들어가는 비밀번호

 

바람 부는 언덕을 따라

학교 운동장에서 폭죽놀이 하는 누나들

폭죽을 다 써버리면 누나들은 긴 머리카락을 잘라 창()을 만들고

운동장을 휘감은 검은 공중을 향해 던져버리면

하늘이 하얗게 찢어지고

누나들의 수줍은 보조개도 하얗게 탈색된다

운동장은 흑과 백만 남으면

누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우는 법을

새들에게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언덕의 학교 아래

이제 문방구도 사라지고 아무도 걷지 않는 골목

누나들은 검은색 가터벨트를 입고

가슴을 내놓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동그랗게 말아 쥔 왼손의 동공 안에서 옛 애인이

웃고 울고 흑과 백이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이 광경을 관음하는 문신사(文身士)

귀까지 찢어진 입을 씰룩거리며

전자회로를 바늘로 촘촘히 쪼고 신음소리가 완성되면

누나들의 늑골 속에 삽입된다 그러면

방 안의 절벽에서 밀봉됐던 우는 새들이 폐수로 흘러나오고

누나들의 눈빛은 반짝이지 않는다

혓바닥 속에 하나씩 박힌 피어싱 위로 있는 힘껏

목구멍을 넘어오는 마지막 계절풍을 불어보지만

난쟁이들은 기다렸다가 망치로 모조리 박살낸다

 

미처 흑 혹은 백이 되지 못하고

회색으로 살아버린 누나 K가 주변을 살핀다

라디오를 틀고 염산 같은 햇볕을 멀리서 쳐다보며

응달에 몸을 말리다가 누나의 머리채는

곧 근육 소년단에게 부여잡히고

문신사와 난쟁이들이 킥킥대며 구경한다

라디오와 영화 음악과 디제이와 스피커가

사각형의 다른 꼭짓점에 서서 보고만 있다

세상은 흑과 백인 줄 알았다며 누나 K는 울어보지만

절벽 쪽으로 질질 끌려가고

바위에 묶여 아래로 던져진다

 

누나 K가 즐겨 듣던 라디오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고 있다




728x90

2010 작가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 눈 외 4편 _ 김소형

 

 

 

 

그곳은 흰 방이었다

둥!

먼 곳에서 북소리가 났지

질긴 살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는 걸었다

걷고, 걷고, 걸었어.

 

방의 전등이

아무 때나 켜지고

꺼지는 곳에서

 

푸른 밤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어

 

나는 썩은 나무판지에 누운

사내들 옆에서

잠이 들기도 했지

눈을 떴을 땐 사내들은

늘 죽어 있더군

 

나는 그들의 머리칼로 짠

긴 그림자를 바닥에 깔고

시체의 가죽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방이여!

영원히 굴러다오!

개의 입에 물려 있을 때에도

대지가 물어뜯을 때에도

 

눈은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씹어 먹을 거야

눈은 당신을 천천히 삼켜

한 구의 신선한 시체로 밀어놓을 거야

 

그리고

영영

이 하얀 방

나무판자 위에 올려놓고

시체를 두드릴 테지

방의 전등이 켜지고

다시 꺼질 때

바로 그때

둥, 둥

 

 

 

 

 

그건 아주 낡은 벽이었지

하얀 점이 그려진

그런 벽

너는 비밀을 적고

나는 하얗게 덧칠하는

그런 벽

점은 더욱 커졌지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오른 하얀 점

마치 시간의 물집 같았지

 

밤,

나는 힘껏 벽의 물집을 뜯었어

안은 텅 빈 통로이더군

천장엔 거꾸로 매달린 실타래가 가득,

내가 톡 하고 건드리자

실타래가 쩍 벌어졌어

그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는 거 있지

 

그들은 딱딱하게 굳어

녹색 돌이 되고

붉은 돌이 되고

검은 돌이 되고

차곡차곡 쌓였어

그만, 나는 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셈이야

 

내 비밀을 말해줄까

사실 내 팔뚝에는 하얀 점이 있어

점은 더욱 커져 물집처럼 부풀었지

말랑말랑한 부분을 잡고

껍질의 경계선을 뜯어내면

살이 뜯겨져 팔뚝 안이 보여

그 속에는 죽음의 핏줄도

우울의 뼈도 없어

마네킹처럼 텅 빈 팔뚝,

쩍쩍 갈라진 그 속에는

아주 작은 팔이 자라고 있거든

그만, 나는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백한 셈이야

 

 

 

사물함

 

 

사물함을 열었더니

늙은 염소가 얼어 있었어

목이 뒤러 꺽인 채

나는 뜨거운 밤이 들어갈까 문을 닫았지

 

두 번째 사물함을 열었더니

집 나간 어미가 나를 보았어

거기서 뭐하세요

무서워, 무서워

나는 자물쇠를 걸어주었단다

 

세 번째 사물함을 열었더니

잃어버린 악몽이 가득 차 있었네

뱀의 눈을 가진 남자

하반신이 잘린 채 눈알을 뽑고 있지 뭐야

내가 쳐다보자

그는 갓 뽑은 눈알을 내게 주었어

그가 웃으며 문을 닫았지

 

마지막 사물함은 굳게 잠겨 있더라

퉁, 문을 두드리고

퉁퉁, 발로 두드리다

아까 받은 눈알을 밀어넣고 안을 들여다보니

길 잃은 사물들이 춤을 추고 있었어

모든 사물함을 다 잠글 수 있는 자물쇠 주변에는

둥글게 퉁, 퉁, 제를 지내듯

 

어느새 나는 지루한 시계가 되어

그들과 뛰어다녔단다

그렇게 하루를, 도 하루를

사물함 안에서 자물쇠를 걸고, 그렇게

 

또, 세계를 닫았단다.

 

 

 

 

 

 

나는 뿔을 만들어

매일 밤,

점점 벌어지던 치아는

굵은 뿔로 변했어

뿔, 입 속에서 솟아난 하얀 돌

 

바다로 뛰어든 너,

내가 너를 부르자

너는 소금 뿔이 되었다고 말했지

뿔, 파도에 날리는 유령들

 

나는 매일 밤을 기다려

밤, 그건 우리를 끌어안는 뿔이니까

 

뿔을 만들고 싶다고?

이건 내 속에 사는 박쥐인데

이건 피리를 부는 해골인데

이건,

이건,

 

그게 아니라면

그럼 그건 당신의 뿔이야

뿔, 당신이 찾는 모든 것,

뿔, 당신의 모든 것,

 

우리는 매일 밤 뿔을 만들지

단단하고

텅 빈,

또 하나의 당신인,

그런 뿔을

 

 

 

검은 오렌지와의 대화

 

 

우리는 아침마다 기차역에 가

기찻길에 낡은 구두를 벗어두고

때론 담배를 피워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뜨거운 레일에 누워

늘어진 하늘에 불을 붙이지

불붙은 하늘은 돌돌 말려 자갈이 돼

하늘에서 덜어지는 푸른

이제 의식이 시작돼

침묵의 돌을 입에 넣고

서로의 비명을 움켜쥐거든

서서히, 빠르게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우리가 짓밟혀 늘어질 때가지

화르륵 불붙어 돌돌 말린 검은 오렌지가 될 때까지

우리는 검은 오렌지가 되어

데굴데굴 굴러갈 거야

당신은 우리에게 말했지

이런, 검은 오렌지잖아

당신은 몸을 둥글게 말고 말했지

시체의 둥근 빰을 닮았고

가슴에서 솟아난 눈물과도 닮았네

검은 오렌지, 내게 말해줘, 검은 오렌지

늘어진 것을 바라보다 불을 붙이며

검은 오렌지, 내게 말해줘, 검은 오렌지

당신이 말해줘

 

 

 

 

 

2010 작가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 명왕성의 퇴출 외 4편 _ 임유리

 

 

명왕성의 퇴출

 

 

우주도 신간도 진화하고 있으니 비대해지지 않은 것은 당신의 문제다

태양은 여전히 뜨겁고, 구겨진 넥타이를 맨 당신이 들어선다

책상이 있던 자리에 별자리로 빛나는 건 떠다니는 먼지들뿐

이제 당신이 할 일은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어정쩡한 자세로 종이컵 속 회전하는 커피를 본다

당신과 우리의 거리만큼 옆자리의 동료와도 멀어져버린 당신

자신을 행성이라 믿었던 날들은 이제 어디서 찾을까?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 당신은 은하계를 둘러본다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를 퀘도를 이탈하지 않은 채 견뎌냈다

 

아주 먼 우주의 일이므로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숟가락 안에서 얼굴을 찾다

 

 

우리는 집도 잡도 없는 가족이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불규칙으로 들고 나지요

시든 얼굴로 불 꺼진 도시에서 돌아와 누울 곳을 찾지요

하지만 숟가락이 있지요

숟가락은 모두에게 하나씩 똑같이 있지요

어떤 것도 크게 떠서 한 입 가득 먹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숟가락이지요

 

깊은 사막의 모래를 퍼내듯 말의 갈증은 줄지 않아요

그래도 숟가락은 밥을 퍼내죠

달그락하는 소리를 내지요

 

오목한 숟가락

밤의 벽을 긁어대 어둠을 탈출할 수 있게 하지요

마지막 빠삐용이 되지요

 

상의 모서리마다 숟가락에 잠긴 얼굴들이 있지요

오늘도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만날 일이 없지요

그저 챙기고 빨고 핥으면 되는 시간

모두를 모이게 하는 건 숟가락이지요

 

입안에 넣었다 뺀

잘 닦이지 않은 얼룩은 썰물 대의 모래 자국처럼 남아 있지요

그 안에 잠긴 얼굴이 낯설어

다시 한 입

 

벽에 핀 곰팡이처럼 푸르게 빛나는 별 하나

이곳에 와 박힌 밤이지요

 

 

 

 

오후 세 시

 

 

투명한 것들은 이미 모두 떠나고

낡은 칫솔이 되는 시간

어딘가에 걸려서 물기를 바삭 말린 하나의 익숙함이 되는 시간

 

양치질을 하고 난 후 입가에는 허옇게 치약 자국만 남고

텁텁한 입 안에는 침이 고인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는 내 일이 아닌데도 할 일들만 쌓여가고

나는 이력을 고치며 괜한 불안을 부정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어딜 가나 여백이 많은 것은 별로 환영받지 못해서

다들 뭐든 채워넣을 궁리만 하는데

창틀께에 햇빛만 자리를 못 잡고 서성이고 있다

 

뒤집힌 채 뒹구는 증명사진을 붙인다

그 속의 나는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지만

오후 세 시의 세계에서는 이탈의 기회를 노리는 눈빛만 있다

 

이 사이에는 아가 먹음 음식물이 빠지지 않았다

부드러웠던 미세모

닳고 닳아 바깥으로 뻗쳐 있다

나의 사이도 매만지지 못하는

낡은 칫솔이 되는 시간

 

 

 

 

통조림을 따는 밤

 

 

통조림 하나를 흔들어 딴다

가볍게 만난 우리는 통조림을 딴다

유통기한은 많이 남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으므로 통조림을 딴다

 

통조림의 고리가 발딱 선다

림을 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갇혀 있던 시간이 동그랗게 말리면서 날 선 채 열린다

통조림 속의 세계는 흥건하다

끈끈하고 향기롭다

그녀가 미끄덩거리는 내용물을 집어 든다

오랫동안 사우나 한 듯 팅팅 불어 있는 그의 손가락 같다

그들은 함께 먹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달콤한 것을 쪽쪽 남김없이 먹는다

 

위로의 방법을 모를 땐 이렇게 간단히 먹는 것만 권한다

일단 개봉하면 바로 드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므로

금세 빈 통조림만 남았다

 

그 안으로 그들이 들어간다

큰 변형 없이 살균된 상태

귓바퀴 안으로 물이 차오른다

가공된 어둠 속에서 그들이 숨을 쉰다

 

깡통의 겉포장에

오늘자 싱싱한 날자가 찍힌다

말캉하고 시원한 통조림이 쏟아지길 기다린다

 

 

 

언어의 그늘*

 

 

어디서 본 듯한 문장을 인용한다

가벼워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때에 따라 주석은 생략한다

사과가 사과일 때 사과처럼 행복하다는 건

겸손을 위한 거짓말

 

너를 읽기 위해서는 번역된 자막이 필요하다

낡은 천으로 감산 얼굴이 있다

보이는 것은 눈

사랑을 잃은 사람의 눈

글자가 지워진 오래된 책이다

그 제목을 말하려면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를 숨겨야 한다

촘촘하게 짜인 말의 카펫 속에서

낙타 한 마리는 잠시 쉴 수 있는 문양

너는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경전을 문신으로 남긴다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와

그 이름을 수첩에서 지웠다

순간 그는 정말 죽었고

나는 확실해진다

내 증상은 단어이며 본문에 잡혀 있다

 

*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소장품전(언어의 그늘) 중.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