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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 정호승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밥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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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아 상실의 깊은 성찰공초의 무소유 삶과 상통

 

우리 현대시의 새벽을 사자후로 활짝 연 공초 오상순 선생을 기려 제정된 제19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정호승 시인이 선정되었다. 수상작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가 내포한 자아 상실의 깊은 성찰이 동해의 드넓은 공간과 천년고찰 낙산사의 종소리 여운에 담아 웅장한 원음(圓音)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올해로 시력 40년을 맞는 정호승 시인은 등단 이후 꾸준히 그리고 왕성하게 창작을 해 오며 독창적 시 세계를 열어 왔을 뿐 아니라 특히 감도가 깊은 시로써 오늘의 한국시 위상을 한 단계 높여 온 시인이다.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에서 저 공초가 일찍이 꺼내 들었던 허무혼의 선언이나 방랑의 마음에 어찌 그리도 맞닿아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 얻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이루어 내는 것을 실현하고자 했던 공초의 정신이 예순여섯 해 뒤에 태어난 정호승 시인의 뇌파에서 자장을 일으켜 더도 덜도 깎고 보탤 것 없는 완성품으로 되살아난 것 같아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끝으로 수상작은 정호승 시집 밥값에서 가려냈음을 밝힌다.

 

- 심사위원 이근배·임헌영·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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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 / 이성부

 

 

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지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 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도둑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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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모국어 혈맥 타고 무위이화공초정신 구현

 

올해는 국권 침탈에 의한 모국어의 수난이 시작된 지 100년을 맞는 해다. 저 사나운 어둠이 나랏말씀과 내 나라의 글자를 무너뜨릴 때 이 겨레 정신의 혼불을 피워 아시아의 여명을 노래한 한국시의 선각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세계와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공초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구상, 박두진, 설창수 선생 등이 나서 제정한 공초문학상 운영세칙에는 지난 1년간의 발표 작품과 등단 20년 이상의 시력을 가진 시인을 대상으로 하며, 인품을 참조한다는 좀 특별한 조항도 있다.

 

18회 수상자는 시집 도둑산길을 출간한 이성부 시인으로 수상작은 백비’(白碑)가 선정되었다.

 

시력 50년을 맞는 이성부 시인은 1960년대 한국시의 백두대간을 등반한 이후 시대정신과 모국어의 깊은 혈맥을 타고 독보적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이번 수상작 백비가 실린 시집 도둑산길은 그의 반 세기 시업(詩業)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룬 절정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어느 한 작품도 저 웅휘했던 공초시와 맥락이 닿지 않는 것이 없지만 백비는 특히 무위이화(無爲而化·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의 공초정신이 구현된 선시의 어법을 밟고 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던 것은 아닌지에서 글자를 새기지 않아도 마음으로 읽고 전하는 불립문자의 진수를 담고 있다.

 

산과 더불어 생각하고 산에서 시를 떠올리는 산의 시인 이성부, 아무리 파헤쳐도 다 알아낼 수 없는 대자연의 장엄과 온 몸으로 부딪쳐 써내고 있는 시들은 그가 쏟아 부은 시간과 내딛은 발걸음만큼이나 이 땅의 모국어의 높은 탑을 쌓아가는 것이다.

 

수유리 빨래골에 장좌불와(長座不臥)하고 계실 공초께서 시 백비를 보시고 아마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며 크신 손을 내밀 것이다. 공초문학상에 빛을 더 해준 이성부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임헌영 문학평론가, 신달자 시인·이근배 공초숭모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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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 눈물 / 신달자

 

 

슬픔의 이슬도 아니다

아픔의 진물도 아니다

한 순간 주르르 흐르는 한줄기 허수아비 눈물

 

내 나이 돼봐라

진 곳은 마르고 마른 곳은 젖느니

 

저 아래 출렁거리던 강물 다 마르고

보송보송 반짝이던 두 눈은 짓무르는데

울렁거리던 암내조차 완전 가신

어둑어둑 어둠 깔리고 저녁놀 발등 퍼질 때

소금끼조차 바짝 마른 눈물 한줄기

너 뭐냐?

 

 

 

 

살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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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잘 구워진 언어의 사리

 

일찍이 한국시는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시인에 의해 눈을 떴고 그가 개척한 우주적 광활한 시세계를 딛고 오늘의 눈부신 팽창을 이루고 있다. 그 드높은 시의 정신을 받들고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공초문학상 제17회 수상작은 신달자 시인의 헛 눈물’(현대시학 20093월호)이 선정되었다. 공초문학상 운영조항에서 수상작 선정기준은 등단 20년 이상의 시인을 대상으로 인품이 훌륭하며 최근 1년간 발표한 신작시 가운데 수상작을 뽑는다.’로 되어 있다. 이 규정에 의해 선정된 신달자 시인은 40년 가까운 등단 햇수와 왕성한 창작 활동, 작품의 우수성, 인품의 고매함까지 모든 조건에서 상의 권위를 덧입히는 수상자라 하겠다.

 

수상작 헛 눈물은 겉으로 읽어도 저 공초가 해냈던 깊고 넓은 사유와 맞닿고 있음을 알겠거니와 글자들이 감추고 있는 뜻을 헤아려 들어가면 시인이 삶의 문턱을 얼마나 아프게 넘나들었으면, 또한 거기서 곪고 터진 생각을 얼마나 오래 깎고 다듬었으면 그 흔하고 비린 눈물을 이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사리로 구워낼 수 있을까 하는 섬뜩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울렁거리던 암내조차 완전 가신에서 이승을 몇 바퀴나 돌아 나온 듯한 체관(諦觀)이 묻어 나오는가 하면 소금끼조차 바짝 마른 눈물 한줄기’, ‘너 뭐냐?’고 던지는 화두가 비어 있음()조차 넘어서는() 경지가 아닌가.

 

오늘의 시가 산문 쪽으로 넘어가고 낯설게 하기라는 탈을 쓰고 본래의 모습을 지워가고 있음에 비하여 신달자 시인은 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언어의 절제성과 명료성으로 그 울림의 폭을 드넓게 열어 가며 꾸준하게 앞서 나가고 있다. 이 수상의 후보에 그의 시선집 바람 멈추다가 참고되었음을 밝힌다.

 

- 심사위원 조오현 시조시인, 임헌영 중앙대 교수, 이근배 공초숭모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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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 조오현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비슬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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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가 주관하는 제16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조오현(76)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집 아득한 성자’(시학 펴냄)에 실려 있는 아지랑이’.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제정된 공초문학상은 등단 20년 이상의 중견 시인을 대상으로 최근 1년간 발표한 신작시 가운데 수상작을 뽑는다. 올해 심사는 서울대 명예교수인 오세영 시인과 공초숭모회 회장 이근배 시인, 문학평론가 임헌영 중앙대 교수가 맡았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500만원과 상패가 수여된다. 시상식은 12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

 

서울신문사가 주최하는 제16공초(空超)문학상시상식이 12일 오전 11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올해 수상자인 조오현 시인을 비롯해 원로시인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 김남조 시인, 정진규 시인, 조정래 소설가와 김초혜 시인 부부, 신달자 시인, 한분순 시인, 이근배 공초숭모회 회장 등 문단 인사와 친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시상식은 노진환 서울신문 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공초 오상순 시인의 시 방랑의 마음과 수상작인 조 시인의 시 아지랑이낭송, 심사위원장인 시인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의 심사평, 조 시인의 수상 소감, 김남조·김종길 시인의 축사, 이근배 시인의 공초 선생 업적 소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노 사장은 공초문학상은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공초 선생을 아끼고 존경하던 구상 시인, 김기창 화백 등 시인 및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제정한 상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면서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조오현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고 말했다.

 

수상자인 조 시인은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없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라는 공초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상을 받게 돼 부끄럽기 짝이 없다.”그렇지만 오늘은 무슨 상이든 좋은 것이니까, 기쁘게 받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남조 시인은 축사를 통해 조 시인에게서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문학성을 느꼈다.”목 마를 때 물 한 잔이 소중하듯 즐겁게 상을 받으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어 김종길 시인은 수상작 아지랑이는 전통적인 시조 형식을 과감히 해체해버린 데 그 의미가 있다.”며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에 이른 조 시인의 시세계를 기렸다. 한편 이날 참석자들은 시상식이 끝난 뒤 서울 수유리 공초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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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 이수익

 

 

몸을 풀어서

누에는 아름다운 비단을 짓고

 

몸을 풀어서

거미는 하늘 벼랑에 그물을 친다.

 

몸을 풀어서,

몸을 풀어서,

나는 세상에 무얼 남기나.

 

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꽃나무 아래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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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과 죽음극단 포착한 독특

 

마지막 남은 시인 5,6명 중에서 이수익이 금년도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 어려움 없이 심사위원 전원의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수익의 시가 맑고 선명한 것만큼이나 수상자로서의 이수익의 자격이 선명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온 그의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중에서 당선 시편을 오체투지(五體投地)’로 결정하는 과정 역시 수월하였다. 이 시가 갖는 간결성, 뜻의 함축성, 빛과 음영의 아름다운 어른거림 등이 읽는 이에게 선명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시란 영혼의 구조의 드러남이라고 믿고 있다. 이 때의 영혼이 별 고뇌도 모르는 평범한 영혼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련과 고뇌와 심미적 체험을 삭여 남다른 만큼의 수준에 이른, 그러한 영혼을 두고 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영혼이, 시어들이 엮는 뜻의 구조 속에 마치 살아서 피어오르듯이 부각된다. 시에서 영혼의 구조를 드러내는 시인은 그만한 경지에 가 있다는 말도 된다. 이런 말이 시인 이수익만큼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다.

 

이수익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말하면 허무를 덮는 아름다운 서정성의 그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때의 허무역시 퇴폐적인 허무가 아니며, 삶과 존재에 대한 비극적 체험으로서의 허무다. 비극적 체험과 미의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체험해오고 있는 바다. 쉽게 말해서 슬픈 노래가 아름답지 않은가. 이수익은 시인으로서 이러한 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시의 제목 오체투지는 땅에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엎드려 절대자에게 몸도, 마음도 봉헌함을 나타내는 일종의 종교의식이다. 이 시 역시 간결한 형식과 시어의 이미지의 선명함, 뜻의 깊이와 그늘의 짙음이 읽는 이에게 매우 큰 감명을 준다.‘누에’ ‘거미’ ‘의 병치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은 미물의 형제이며 동시에 천사의 형제일 수도 있다. 끝 연 3행이 주는 운동감과 색채감도 놀랍다.

 

이러한 시의 특색은 그대로 시인 이수익의 인품과 일치한다. 이수익 시인의 공초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이근배, 임헌영, 성찬경을 대표하여 성찬경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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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얼굴 / 성찬경

 

 

남한에서 나무가 연간 빨아들여 간직하는 물의 양이

150억 톤은 된다고 한다.

큰 저수지 여러 개가 저장하는 물의 양과 같다고 한다.

크고도 착하구나 나무가 하는 일.

그렇기나 하니까 나무의 자태가

저렇듯 늠름하고 멋있는 거지.

들에 솟은 몇 그루 나무의 시정(詩情).

보라 나무의 집단 저 숲의 위용을.

수목의 바다 센 바람이라도 불면

출렁이는 잎의 파동 웅혼한 율동.

저런 나무를 마구 학대하니까

세계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는 거지.

보아서 좋은 것은 본질도 곱다.

착한 모습은 착한 마음의 거울.

무섭다 독을 품은 버섯은 역시 독버섯.

절대 어김없다 사기꾼 얼굴은

나는 사기꾼이요 하고 말하고 있다.

판독을 잘못하여 더러 속긴 하지만.

풀밭에 둥실 뜨는 달빛처럼

모습을 칠하는 본질.

안과 밖 이 조응(照應)이 큰 신비다.

늘 푸르고 천연한 나무여.

 

 

 

 

송운松韻 성찬경 시세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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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올해로 시력(詩歷) 반세기를 맞는 성찬경 시인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역사적 현장성의 사회의식의 시가 주류를 이뤄온 한국 시단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시학의 이단아인데, 따지고 보면 공초 선생 또한 근현대 시단의 한 이단아였다. 이단이어서 좋다는 뜻이 아니라 두 시인이 추구해온 역정은 다른데도 도달점에 가까워지면서 이렇게 닮을 수가 없다는 점이 새삼 소중하게 평가받은 것이다. 가히 한국 현대시단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이한 시학적 개성이 돋보인다는 뜻이다.

 

공초 선생이 불교를 중심한 동양사상의 주관적 인식론에서 출발했다면, 성 시인은 가톨릭적 가치관으로 자연과학적인 존재론에서 시적 형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전자가 인과응보에 의한 존재의 총체적인 인식론에 자리했다면, 후자는 약간은 난삽한 과학과 문학이 혼음한 듯한 존재의 분석론에 치중해 왔다.

 

공초의 시가 서정적 감성만으로는 근접하기 어려운 불교와 동양사상의 합성 위에 펼쳐지는 오묘한 사유의 언어라면, 성 시인의 시세계는 모더니즘 이론만으로는 근접이 어려운 요인을 간직한 광물성적인 미의식의 결정체로 구축돼 있었다.

 

그런데 성 시인은 최근 시집에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탁류 속의 은둔자였던 공초의 시세계로 성큼 다가서고 있다. 그는 가톨릭과 불교는 물론이고 과학과 문학, 식물학과 광물학까지도 핵 융합시켜 모든 존재의 진실을 인식하는 방법론을 터득한 것 같다.

 

마음과 얼굴은 바로 이런 성찬경 문학의 한 꼭짓점을 이루고 있다. “보아서 좋은 것은 본질도 곱다./ 착한 모습은 착한 마음의 거울이라고 외모만 보고도 속내의 가치를 판단하는 비의를 전수하는 이 시는 가히 화엄의 세계에 이른 시인의 원숙함이 스며 있다. 설사 판독을 잘못하여 더러 속긴 하지만/풀밭에 둥실 뜨는 달빛처럼/모습을 칠하는 본질이라는 구절에서 존재와 본질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임을 깨닫는 선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시인은 우주율(宇宙律), 밀핵시(密核詩), 요소시(要素詩), 반투명 이론이라는 숱한 관문을 거쳤다. 그 미학적 고행이 시인으로 하여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들 수 있다는(시집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를 연상하시라) 터득을 가져온 셈이다. 실로 반세기만의 득도로 이룩된 이 시집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세대에게 두루 읽힐 수 있는 명상시의 오롯함을 간직하고 있다. 즐거운 상상 여행길 같다. 문단 선배에게 드리는 공초문학상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 심사위원 이근배·임헌영·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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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너무 많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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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1965년에 등단한 천양희 시인은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아픈 침묵 뒤 1983년 작품 활동을 재개, 쌓인 분노를 하소연처럼 토해냈으나,1990년대를 전후하여 그 고뇌를 도리어 새로운 삶의 원동력으로 바꿨다.

 

공초문학상 수상작이 실린 시집 너무 많은 입’(창비) 후기에서 그녀는 시 생각만 하다가 세상에 시달릴 힘이 생겼다.”며 시와 삶과 인간을 변증법적으로 일체화시켰다. 밖을 향한 증오와 염세의 기개를 내면을 향한 사랑과 위안의 정서로 바꾼 이 경이로움은 오상순 시인의 관조와 달관의 미학이 느껴진다.

 

작은 꽃이 언제 다른 꽃이 크다고 다투어 피겠습니까/새들이 언제 허공에 길 있다고 발자국 남기겠습니까/바람이 언제 정처 없다고 머물겠습니까”(‘좋은 날’)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각자의 운명을 보듬을 수밖에 없는 하잘 것 없는 인생살이의 실체를 만난다. 그 삶이란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 밑이다”(‘목이 긴 새’)는 한계 인식과 벗어날 길 없는 백팔번뇌의 굴레이기에,“생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마음의 경계’)는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슬픔의 심연에서 이 시인은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희망이 완창이다’)라며 염세적인 낙천주의자로 변모한다.

 

나는 부지런히 내 색깔을 바꾸었소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변신의 명수라 하오 변신 잘 하는 나를 변질 잘 하는 놈이라 착각은 마오(중략)/나는 잘 살 수 있소 나는 평생 변신하고 변모하면서 살려 하오”(‘카멜레온’)라는 새 다짐.

 

그러나 정작 그녀는 모나게 살 줄밖에 몰라 구르는 것들은 모서리가 없어 모서리/없는 것들이 나는 무섭다 이리저리 구르는 것들이 더 무섭다”(‘구르는 돌은 둥글다’)고 말한다.

 

변질이 둥근 것이라면 변모는 모난 것이란 은유에서 시인의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마음의 달’)라는 절창의 의미가 밝혀진다.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변질이 얼마나 호사스러운가를 절감하면서도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고요한 자태로 자신을 제어하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가. 뻔질난 변질로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짓밟히면서도 변모는 거듭하지만 여전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 달에게 계속 빌어야 할 사항만 늘어나는 사람들에게 천양희의 시는 큰 위안이다.

 

- 심사위원 이근배·임헌영·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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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고통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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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거울 속의 꽃을 꺾는 詩境

 

사람에게는 사물의 이치를 새겨들을 수 있는 나이가 있다고 한다.그렇다면 시의 나이는 얼마나 오래 살아야 귀가 트이는 것일까? 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정현종 시인의 시 경청을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결정하면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정현종 시인은 60년대 들머리에 시단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후 사물에 대한 깊은 인식을 서정성으로 용해시킨 첫 시집 사물의 꿈으로 이미 시단에서 자기 좌표를 설정해놓은 시인이다.그리고 시대적 현상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일관되게 사람과 자연,사람과 시간 등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화두를 불지펴 놓았다.

 

시선집 고통의 축제와 시집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로 한꺼풀씩 말의 껍질을 벗겨오면서 오늘의 수상작 경청을 담고 있는 시집 견딜 수 없네에 이르러 그의 시 세계는 한층 자유로워지고 사물과의 내통에 있어서도 평화로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청은 이 시대의 갖가지 소음을 진공흡입기로 빨아들이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통신수단이 첨단화되고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고 있음에 비해 사람들의 귀는 점점 절벽이 되고 눈도 어두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불행의 대부분은/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의 말문부터가 매우 직설적이면서 심상치 않은 경구를 담고 있다.

 

대통령이든 신이든/어른이든 애이든/아저씨든 아줌마든/무슨 소리이든 간에/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은 아주 귀에 익은 듯하면서도 새삼 아프게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특히 내 안팎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밖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것은 더욱 어렵다.

 

얼핏 보면 쉬워 보이는 경청의 세계는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현종만이 뽑아낼 수 있는 수월경화(水月鏡花)가 숨어있다.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한 고요 속에/세계는 행여나/한 송이 꽃 필 듯에 부딪치면 아하 저 공초선생의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시법을 얻었구나 하는 울림을 받는다.공초문학상의 빛을 더해준 정현종 시인께 경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이근배·김종해·임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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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언저리 / 김지하

 

 

,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달마(達摩) 안에

 

한매(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풍란(風蘭) 곁에도

 

있다

 

맨 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하며.

 

 

 

절, 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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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황톳길’(1969)로 등단한 이후 김지하의 시력(詩歷) 34년은 그 어느 영혼의 항구에도 정박하지 않고 사상사의 나침반에 시혼을 내맡긴 채 표류하는 미학적 항해사였다.

 

출항 때의 저 뜨거운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다져진 저항시들이 받았던 지지와 갈채와 성원은 세계문학사상 희귀한 혁명시의 성공사례였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로 군부독재에 단독자로 맞서,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견인해냈다. 유신통치가 끝나는 지점에서 김지하 시인은 저항시인에서 사상시인으로의 변신을 시도했으며, 이후 오늘까지도 그의 지적 편력의 허기증은 지속되고 있다. 그는 변혁의 사상사적 원동력을 토착적인 민중신앙에서 탐구하면서 밥, 생명사상, 율려(律呂)사상 등등을 창출, 전개해 왔다.

 

그는 저항시를 뒤로 자리바꿈시키고도 끊임없이 변혁(개벽)에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세계사와 민족사를 응시하면서 간헐적인 발언으로 사회적인 관심을 유도해 냈다. 그의 행동과 작품은 당대의 민중이 원하든 않든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파장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설사 반역사적인 발언일지라도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야기되어 역사적인 진보에 도움을 주는 역기능까지 가진 이 미묘한 시인의 역할은 다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바로 김지하 시인의 몫이다.

 

,그 언저리는 시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슬픔의 정치학화개에 이은 새로운 문화 정치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인 방향 전환의 시도이다. 절에 가서도 절의 모습을 못 찾는 이 시인의 처절한 궁극적인 시대정신의 갈구 자세가 바로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김지하의 긴 항해 앞에 곧 새 미학적 항구가 보일 듯한 예감이 든다. 아마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시경(詩經)’의 세계로의 귀환일지 모른다.

 

- 심사위원 임헌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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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2

 

 

풀이 몸을 풀고 있다

바람 속으로 자궁을 비워가는

저 하찮은 것의 뿌리털 끝에

지구라는 혹성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지상地上을 잠시 빌어 쓰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풀은 흙을 품고 있다

바람 속에서

풀이 몸을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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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개인 집단 간 화해 미학 서정적 묘사

 

수상자 김종해 시인은 40여 년의 시력(詩歷)을 지닌 시인이다. 그런 만큼 그의 시적 대응은 굴신자재(屈伸自在)의 도저한 경지와 폭을 지니고 있다.

 

특히 수상작으로 결정한 ·2’는 아직도 우리 시가 자유롭지 못한 개인집단의 수용 미학을 훌륭하게 성취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어 그 가치의 한전범(典範)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시의 마지막 행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2’풀이 몸을 풀고 있다.”로 각각 끝나고 있다. 여기에는 내가 풀이되고 풀이 내가 되는 개인과 집단의 소통, 화해가 있다. 에고의 초탈과 극복이 있다. ‘을 종속 개념으로부터 풀어내고 있다. 개체가 전체가 되고 있으며, 전체가 개체가 되고 있음의 이 생산 형국에서 우리는 해방과 자유라는 놀라운 실체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단순 전위가 아니라 발견이며 놀라움이며 견자(見者)라는 시인으로서의 본성이다.

 

아울러 여기에 시인은 짧은시 형식을 통해 풀이의 늘어짐 그 이완을 막고 있고,또 다른 시편들을 통해서는 생명의 관능성과 우주적 황홀을 시로 구체화, 오늘의 우리 시들이 지적 통제에 경도한 나머지 잃고 있는 순수 서정의 감동의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을 들어가는 길을 몰라/하늘 바깥에서 노숙하는 텃새”(‘텃새’),“찰나 속에 스치는/황홀한 우주의 블랙홀을/오늘도 잡았다”(‘열쇠’),“이 별을 떠나기 전에/내가 할 일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별’) 등의 시구를 보라.

 

- 심사위원 정진규(현대시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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