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금(純金) / 정진규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손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아내는 말했다 나의 금거북이와 금열쇠를 가져가느라고 온통 온 집안을 들쑤셔놓은 채로 돌아갔다 아내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운 비방(秘方)이다 나도 얼른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게 잘하셨다고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이 손재수가 더는 나를 흔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나의 행운을 열 수 있는 열쇠의 힘을 내가 잃었다거나,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내가 거북이처럼 장생할 수 있는 시간의 행운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님께서도 그가 훔친 건 나의 행운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징의 무게가 늘 함께 있다 몸이 깊다 나는 그걸 이 세상에서도 더 잘 믿게 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상징은 언제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금방 우리를 등돌리지 못하게 어깨를 잡는 손, 손의 무게를 나는 안다 지는 동백꽃잎에도 이 손의 무게가 있다 머뭇거린다 이윽고 져내릴 때는 슬픔의 무게를 제몸에 더욱 가득 채운다 슬픔이 몸이다 그때 가라, 누가 그에게 허락하신다 어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내게 손님이 다녀가셨다 순금으로 다녀가셨다
[심사평]
공초문학상은 운영세칙상 20년 이상의 시단 경력과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1년간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뽑게 되어 있다.이것은 중진 이상의 시인을 대상으로 하되 반드시 작품에 주어지는 문학상임을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나라 시문학상 가운데 가장 품위 있는 상으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상의 비중에 걸맞는 시인들의 대상 작품을 엄정하게 가려 뽑고 다시 토의를 거듭한 끝에 정진규의 시 ‘純金’을 올해의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시 ‘純金’은 정진규가 오늘의 시단에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산문시의 한 전범이다. 짜임새가 빈틈이 없을 뿐 아니라‘純金’으로 표상되는 물질적 가치관과 집에 도둑이 들어 잃게 되는 상실감 사이의 시대적 ‘상징의 무게’가 밀도 있게 실려 있다.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화자의 체험이 도저한 시적 사유와 만나고 다시 사물과 사건 속에서 작은 우주를 형성해나가는 문채(文彩)는 생각의 틀을 한 차원 고양시켜준다. ‘純金’의 값이 이처럼 시로 매겨지는 일도 바로 저 공초(空超)시의 무소유의 세계와 맞닿고 있음이 아닌지? 이 작품으로 상의 중량감이 더해질 것이다.
- 심사위원장 이근배(재능대 교수·공초숭모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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