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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純金) / 정진규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손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아내는 말했다 나의 금거북이와 금열쇠를 가져가느라고 온통 온 집안을 들쑤셔놓은 채로 돌아갔다 아내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운 비방(秘方)이다 나도 얼른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게 잘하셨다고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이 손재수가 더는 나를 흔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나의 행운을 열 수 있는 열쇠의 힘을 내가 잃었다거나,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내가 거북이처럼 장생할 수 있는 시간의 행운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님께서도 그가 훔친 건 나의 행운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징의 무게가 늘 함께 있다 몸이 깊다 나는 그걸 이 세상에서도 더 잘 믿게 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상징은 언제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금방 우리를 등돌리지 못하게 어깨를 잡는 손, 손의 무게를 나는 안다 지는 동백꽃잎에도 이 손의 무게가 있다 머뭇거린다 이윽고 져내릴 때는 슬픔의 무게를 제몸에 더욱 가득 채운다 슬픔이 몸이다 그때 가라, 누가 그에게 허락하신다 어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내게 손님이 다녀가셨다 순금으로 다녀가셨다

 

 

 

도둑이 다녀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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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공초문학상은 운영세칙상 20년 이상의 시단 경력과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1년간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뽑게 되어 있다.이것은 중진 이상의 시인을 대상으로 하되 반드시 작품에 주어지는 문학상임을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나라 시문학상 가운데 가장 품위 있는 상으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상의 비중에 걸맞는 시인들의 대상 작품을 엄정하게 가려 뽑고 다시 토의를 거듭한 끝에 정진규의 시 純金을 올해의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純金은 정진규가 오늘의 시단에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산문시의 한 전범이다. 짜임새가 빈틈이 없을 뿐 아니라純金으로 표상되는 물질적 가치관과 집에 도둑이 들어 잃게 되는 상실감 사이의 시대적 상징의 무게가 밀도 있게 실려 있다.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화자의 체험이 도저한 시적 사유와 만나고 다시 사물과 사건 속에서 작은 우주를 형성해나가는 문채(文彩)는 생각의 틀을 한 차원 고양시켜준다. ‘純金의 값이 이처럼 시로 매겨지는 일도 바로 저 공초(空超)시의 무소유의 세계와 맞닿고 있음이 아닌지? 이 작품으로 상의 중량감이 더해질 것이다.

 

- 심사위원장 이근배(재능대 교수·공초숭모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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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토막 / 이탄

 

 

여름날,헤엄을 치고 놀 때

즐거웠다,

물을 먹으며 공을 던지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대개 우리들은 노는 일에 몰두했다

 

어깨 위로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을 때

바위처럼 살리라

구름처럼 살리라

그러면서 산 속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 여름날 해변가는 그냥 있는데

또 다른 물결이

앞에 서서

길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는

나무토막처럼 물 위에

떠 있을 것이다.

 

정말?

 

 

 

 

윤동주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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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심사위원들은 예년에 해왔던 관례에 따라 우선 각자가 후보 작품들을 추천하였고 이를 논의한 결과 이탄 시인의 나무 토막을 이의없이 제8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이탄 시인은 1964년 등단한 이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우리 시단의 중진 시인이다. 그동안 시인은 휴우머니즘에 토대하여 삶의 애환을 중후하게 노래한 시들을 써왔고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음으로 여기서 그의 문학성을 재론하는 것은 사족이될 것이다.

 

이번 수상작 나무 토막역시 언뜻 일상사의 한 단면을 단순하게 스케치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인생에 대한 깨우침이 전류의 섬광처럼 빛나는 작품이다.그리고 이 시에서 보듯 사소하고 평범한 소재를 통해 생의 깊이를 통찰할 수 있는 그의 시적 사유와 상상력이야말로 시인이 지닌 문학적비범성이라고 할 만하다.유년 시절,물장난을 치고 놀던 강변에 다시 돌아온노년의 화자는 이제 인생이란 흐르는 물에 떠가는 한갓 나무토막에 지나지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여기에는 인생을 달관한 자의 처연한 아름다움과삭막한 우수가 한 가지로 녹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 심사위원 金奎東(원로시인) 李根培(재능대 문예창작과 교수) 宋秀權(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 吳世榮(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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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만이 집이 아니고 / 오세영

 

 

출가出家라니

정녕 어디로 간단 말이냐.

머리 깎아 바랑 메고

산으로 간단 말이냐.

장삼 걸쳐 법장法杖 짚고

바다로 간단 말이냐.

바람 따라 향기 좇아 이른 계곡엔

도화桃花는 시나브로 꽃이 지는데

하염없이 개울물은 흘러가는데

강물 따라 소리 좇아 이른 바다엔

파도는 실없이 부서지는데

출가라니

누굴 따라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집만이 집이 아니고

집 밖에 있는 것이 또 집인데

비로봉 만물상 곰바위 밑에

앉은뱅이 민들레나 되란 말이냐.

지리산 세석대 널바위 밑에

가지 꺾인 소나무나 되란 말이냐.

출가라니

집 밖이 또 집인데

정녕 어디로 가란 말이냐.

 

 

 

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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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올해로 7회를 맞은 공초문학상은 시 부문에 시상하는 문학상으로 그동안 수상자들의 면면을 볼 때 그 높이와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상이다.

 

이에 부응해 5명의 심사위원들은 운영 규정에 명시된 ‘20년 이상의 문단 경력이 있는 작가로 작품의 우수성뿐 아니라 수상자의 인품도 고려한다’ ‘전년도 6월부터 당해년도 5월까지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는 취지에 맞는 시인의 작품을 고르기 위해 3명 이상 대상자를 추천한 뒤 다수 득표자 2명으로 압축, 의견을 개진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문학상의 참뜻을 살리기 위해선 국외자적 위치에서 고독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창작 활동을 하는 시인들에게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시집 벼랑의 꿈을 펴낸 오세영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했다. 수상작은집만이 집이 아니고’. 오세영 시인은 시력(詩歷)30년 넘게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해오면서 일관되게 한국시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중진 시인이다. 이번에 펴낸 제10시집 벼랑의 꿈은 고승들에게서나 접하던 선시의 내밀한 정서를 현대적 삶에 새롭게 접목시키고 있다. 특히 수상작은 자기 존재의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표출되는 정신적 방황을 서정적이고 모던한 언어로 포착, 현대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이런 성과는 저 무소유의 존재론적 시사상을 펼쳤던 공초의 문학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 심사위원 대표 이근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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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들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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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깨달음 과정 속에 시인의 인생론 함축

 

공초문학상은 등단 20년 이상 되는 시인이 최근 1년 동안 발표한 작품(시 혹은 시집)중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문학 정신과 이념에 걸맞는 시를 그 심사대상으로 삼고 있다.

 

심사위원 일동은 각자 후보자 2명씩 천거하여 그 추천의 변과 각 시인들의 특장 등을 논의한 뒤 3명으로 압축된 후보를 대상으로 면밀한 토의과정을 거쳤다. 심사위원 일동은 그간 공초문학상이 한국 시단의 대가급 시인들에게 수여된 점을 주시하는 한편 권위 있는 문학상일수록 중앙문단 중심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하면서 지방문단에도 앞으로 넉넉한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충분한 토의 뒤 심사위원 일동은 저마다 충분한 수상 자격을 갖춘 3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무기명투표를 실시했는데 만장일치로 신경림 시인을 1998년도 제6회 공초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수상작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동명의 시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지난 3월 간행됨)이다.

 

신경림 시인은 70년대 이후 어두웠던 한국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시종 서정성 짙은 인간주의적 문학사상으로 서민 대중들의 삶을 전통적인 민요 형식의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현대 한국 시문학사의 한 흐름을 형성시켰다.

 

특히 이번 수상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여정이 이라는 이미지의 변모로 축약되어 있는데,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느낄수록 /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는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여 그간 시인의 추구해온 인생론이 미학적으로 절묘하게 진테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공초사상이란 무엇일까. 식민지와 분단 시대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 지향할 바를 허무혼을 화두로 삼아 암중모색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허무혼이 이제 신경림 시인의 인생론과 접점을 이룬다는 게 오늘의 우리 시문학을 위하여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심사위원 일동은 공초의 문학사상이 신경림 시인의 수상을 계기로 더 큰 지평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 심사위원 章湖 李根培 任憲永 宋秀權 李憲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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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 / 박제천

 

 

항아리를 보면 붕어 불러들이던 된장항아리 생각난다

항아리를 보면

잡은 붕어 내보이던 투명한 달항아리 생각난다

항아리를 보면

그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잠자던 관항아리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비를 생각하면,

항아리 또한 비가 된다

개여울 속 하늘 속 땅 속 어느 곳이든

내가 만든 비들은 하나같이

항아리같은 추억,

항아리같은 사랑,

항아리같은 죽음을 만든다

 

그런 항아리 가득 볼펜을 꽂아놓고

나는 문득 비의 자서전, 항아리의 자서전을 구상한다

청개구리가 된 부처를 받아들이는 비의 일생,

살도 정도 불에게 내어주고,

사리와 뼈만 남은 부처를

그 안에 쉬게 하는 사리 항아리의 일생

 

그러다 문득, 붕어라고 쓰면 붕어가 뛰어 나오고

된장이라고 쓰면 된장내 구수해지는 입체 볼펜으로

항아리 하나를 그린다,

그 안에 전생의 메모리칩이 내장된

내 항아리 하나를 하늘에 띄워놓고 흥얼거린다

 

달아 달아 천년만년 나랑 놀던 달아

 

 

 

풍진세상 풍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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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그의 시는 치열한 정신적 고투의 산물

 

박제천은 1966현대문학벽시계등의 시가 추천되어 등단한 이후 지난 30여 년간 일관되게 자신의 시적 세계를 확장 심화시켜 왔다.

 

그의 시는 치열한 정신적 고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감각이나 감정이 아닌 이 정신의 싸움은 서양 정신과 동양 정신의 대결을 통하여 깊고 넓은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게 만든다.

 

그의 시를 불교적 돈오의 경지나 도가적 허무의 융화로 보는 것은 그의 시에 깊이 스며 있는 동양적 사유와 시 정신에 주목한 결과이다.

 

그의 시는 자기 내면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을 통해 쟁취된 것이다. 그의 시는 일상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자아가 드러내는 깊은 시성과 진실의 각성을 목표로 한다.

 

그의 시는 깊은 사색을 담고 있으며, 상상력의 자유자재한 구사를 특징으로 한다. 다만 지나치게 관념의 유희에 기울 때 그것이 현실의 방기나 시적 상상의 이완으로 이어질 체험을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교적 상상과 노장적 사유를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시켜 활달한 상상으로 펼쳐 보인 그의 시적 세계는 우리 현대시사 하나의 장관으로 기록될 것이다.

 

- 심사위원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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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덩이 / 김여정

 

 

어머니의 눈물이 방울방울 호박잎에 맺혀 있는 돌담길에 열세 살 어머니의 휜 고무신 한 짝이 조각배로 떠 흐르고 있었더란다. 어머니는 열세 살에 어머니의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세 오랍동생들의 어머니가 되어 호박넝쿨에 주렁주렁 슬픔을 키우며 살았더란다. 호박넝쿨에 호박이 주렁주렁 영글 무렵 열일곱 처녀 어머니는 물 설고 낯설은 아버지의 바다로 시집을 왔더란다. 밤낮으로 어린 세 오랍동생을 못 잊어 어린 명도무당의 휘파람 소리를 따라 어느 달 밝은 밤 몰래 보따리를 쌌더란다. 하지만 어린 새색시가 십 리도 못가서 아버지의 썰물에 쓸려 다시 아버지의 바다 가운데로 되돌아오고 말았더란다. 그 후로 어머니는 울타리 밑에 호박씨를 묻으며 피눈물 한 됫박씨도 같이 묻었더란다. 해마다 어머니가 심은 호박넝쿨에는 붉은 호박덩이가 사월초파일날 연등처럼 빛났더란다. 어머니의 세 오랍동생들은 어머니의 눈물이 별이 되어 빛나는 하늘을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보며 미루나무처럼 잘도 자라주었더란다. 어머니의 눈물의 전설에 따라 걷는 돌림길에 열세 살 어머니의 흰 고무신 한 짝이 하늘에 반달로 떠 있었다.

 

 

 

김여정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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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가 주최하는 제4회 공초문학상 시상식이 1일 상오 11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 서울신문사 손주환 사장은 시 호박덩이로 수상한 김여정 시인에게 상패와 상금 5백만 원을 수여했다.

 

시상식은 손 사장의 식사, 공초문학상 심사위원장 장호 시인의 심사 경과보고, 문덕수 문예진흥원장의 축사, 수상 소감, 홍신선 수원대 국문과 교수의 수상자 작품세계 소개순으로 진행됐다.

 

손 사장은 식사를 통해 김시인의 시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치열한 시정신이 수상의 동인이 되었으며 30년 경력과 시적 노력이 수상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서울신문사는 공초문학상이 국내 문학상 중 최고 수준이 되도록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시인 구상· 이원섭씨, 서울신문사 이동화 상무이사 주필·반영환 논설고문 등 공초문학상 운영위원, 시인 홍윤숙·이근배씨, 문학평론가 김용직(서울대교수유종호(연세대교수)씨 등 심사위원을 비롯해서, 시인 한분순· 이탄· 이은방· 한영옥· 추은희· 허영자· 이일향· 강계순· 이섬· 이나명씨, 소설가 홍성유· 김지연씨, 수필가 박현숙씨, 영화평론가 김종원씨, 문인협회 부이사장 성춘복· 함동선씨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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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 / 홍윤숙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

붉은 표시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힌

발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에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스려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 그

아름다운 낙하를

 

 

 

홍윤숙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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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40여 년 쓴 작품서 묵은 포도주 향기나 수상작 낙법…」뛰어난 상상력 발휘

 

시인 홍윤숙이 우리 시단에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중반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시력은 줄잡아도 40년이 넘는다.

 

한 시인이 오랜 세월 시작 활동을 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긍정적인 각도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오래 묵은 포도주처럼 좋은 방향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끼어들 수 있는 부작용도 생각될 수 있다. 자칫 그의 시가 안이해질지도 모른다는 부정적 그림자가 그것이다.

 

시인 홍윤숙은 후자와 같은 우리 생각을 문자 그대로 기우에 그치게 하는 경우다. 오랜 시력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포착하는 그의 눈길은 여전히 매섭고 맵짜다. 또한 그것을 도마 위에 올려 요리하는 손길 역시 날래고 훌륭하다.

 

뿐만아니라 이번에 수상작으로 추거된 낙법놀이에는 한국 시단이 가져야 할 좋은 시의 또 하나 자격요건이 내포되어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현대에 와서 시는 서정시를 가리킨다. 그런데 서정시는 그 속성이 사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것과 함께 형태가 축약적인데 있다. 이런 속성 때문에 서정시는 자칫 편향된 노래가 되기 쉽고 소수 호사가들의 애장품으로 떨어질 공산도 크다.

 

그런데 시인 홍윤숙은 그런 부정적 가능성을 정서의 보편성 확보로 극복했다. 또한 신선한 시상 제시로 그의 시가 많은 사람에게 애송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낙법­놀이·33에서 시인 홍윤숙은 모과 향기의 낙하를 우리 자신의 한계 의식과 일체화시키기에 성공했다. 이 기법,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번 수상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김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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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물감 / 박남수

 

 

지도위에

파란 물감을 엎질렀다.

바다에 반도가 잠긴 것은 아니다.

중간에서 동강난 분단위에

파란 물감이 엎질러져

한 색으로 파란빛을 뿜은 것이다.

오죽하면 대낮에

엉뚱한 꿈의 물감을

엎질러놓았겠는가

반도에 물감이 엎질러져

한 빛깔이 되면 된다.

꿈의 물감이 영롱하게 드러나면 된다.

허리를 동인

분단이 덮이어 사슴도

넘나들고, 사람도 그랬으면 된다

 

 

 

초판본 박남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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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가 공초 오상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공초문학상 제2회 수상자에 재미시인 박남수옹(76)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지난해 현대시에 발표한 꿈의 물감으로 조국 통일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심경을 담은 시다.

 

1918년 평양에서 출생한 박 시인은 39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주로 일제 식민지하의 농촌 생활을 소재로 택해 시대의 암흑상을 그리다가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월남했다. 57년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유치환 등과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고 같은 해 제5회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데 이어 월남 전후의 작품을 묶은 시집 갈매기 소묘를 발표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유신 시절인 75년 도미했다.

 

박 시인은 이 나이에 상을 받는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후학들에게 미안하기도.그렇긴 해도 내 개인으론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게 기특하고 고맙고 그래요. 57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은 이래 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은 4일 오전 11시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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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녀들의 마을 / 이형기

 

 

내 소싯적 벚꽃놀이 때는

꽃나무 밑에 서면 웅웅대는 벌들의 날개짓소리

온몸 후끈후근 닳아오른 꽃들은 그 소리에 홀려

자궁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황홀한 꽃가루받이의 집단 오르가즘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늘 이 과수원에도

만발한 사과꽃을 토플리스로 치장하고 나서서

소싯적 그때처럼 홀려대는 그 소리 기다리고 있건만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아 활짝 열어만 놓고

아무 것도 받아들일 게 없는 그녀들의 자궁

무참한 부끄러움!

 

꽃들이 모두 석녀가 되어버린 마을

위생적으로 멸균(滅菌) 처리가 된 무기질(無機質) 침묵

침묵만 가득 찬 마을 한복판에

심약한 레이젤 카아슨*’여사가 새파랗게 질려 있다

가을에 사과가 열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걱정도 팔자군, 수입하면 그만이지!

 

* 레이젤 카슨 : 미국의 과학자이자 녹색 운동가. 침묵의 봄의 저자. 1964년 작고.

 

 

 

이형기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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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와 공초오상순선생숭모회(회장 구상)는 선생의 서른 번째 기일을 맞아 3일 상오 11시 문인·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수유리 빨래골 묘소에서 기제를 올린다. 이와 함께 하오 4시부터 서울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올해 처음 제정한 공초문학상시상식을 개최한다. 1회 수상자로는 이형기 시인이 선정됐다.

 

오상순 선생을 기리는 공초문학상의 첫 번째 수상자 선정된 이형기 시인은 시단의 선비로 후배들에게서 존경받는 이형기 시인(60·동국대 국문과 교수)상의 가치는 수상자에 의해 결정되며 그 상의 이미지의 팔할은 첫 수상자에 의해 지워진다는 통설을 되새기는 듯 기쁨에 앞서는 두려움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 교수는 경남 진주산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6살 때인 1949문예지를 통해 등단, 천재 소리를 들었다.적막강산」「심야의 일기」「예보」「풍선심장등 시집을 펴냈으며 감성의 논리」「한국 문학의 반성」「시와 언어등 비평집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를 신문기자 이형기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서울신문 정치부 기자를 거쳐 고 이병주 선생이 주필을 맡고 있던 부산 국제신문에서 폐간 당시 마지막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20여 년을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서 잔뼈가 굵은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이번 제1회 공초문학상 수상 후보에 오른 시인으로는 성찬경· 박재삼· 박성룡· 김남주 ·고은· 박희진 씨등 쟁쟁한 한국 시단의 중진들이었다.

 

심사는 박두진· 이근배· 설창수씨 등 시인 3명과 박철희(서강대)교수, 신동욱(연세대)교수 등 문학평론가 2명 등 모두 5명이 맡았다. 선정이유는 공초문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한 연구에도 일가견을 가진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공초는 그의 문학성뿐만 아니라 근대정신사에서도 특출난 인물이었습니다. 무소유· 무정처의 그의 생애 자체가 시를 뛰어넘는 한 편의 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신 공초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씨와 공초의 인연은 서울 명동 청동다방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유명한 공초의 청동문학속에 자신의 단상도 몇 점 들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 공초문학에 관심을 가져 오상순의 시와 공사상이란 논문을 남겼다. 게다가 이번에 고인을 기리는 문학상까지 타게 됐으니 공초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굵다란 인연의 동아줄로 얽혀 있었던 셈이다

 

 

 

* 공초와 공초문학상

 

“공정성, 객관성, 작품성은 문학상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3대 조건이다. 공초문학상은 이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렇기에 수상자들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공초 오상순

이근배 시인의 말이다. 20년 동안 이어 온 공초문학상의 의미를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공초 오상순(1894~1963)은 1920년대 한국 신시운동의 선구가 된 동인지 ‘폐허’를 결성하며 서구의 폐허 의식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이후 ‘허무흔의 선언’ ‘방랑의 마음’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등 명시를 발표하고 지론이던 독신주의를 지키며 혈육 한 점, 집 한 칸 없이 그득한 담배 연기처럼 살다 간 기인이었다.

공간을 초월해 시간 속에 영원히 산다는 의미로 ‘공초’라 불렸고 즐겨 피운 담배 연기 속에 묻혀 있다고 해서 ‘꽁초’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무일푼, 무소유로 일관하며 문학을 교리처럼 설파하고 세계 평등사상과 인간 해방의 꿈을 품은 뜨거운 지식인이자 ‘시를 몸소 체험한 유일한 시인’으로 불린다.


공초문학상 역시 공초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상자들을 냈다. 1993년 첫 수상자인 이형기 시인부터 박남수, 홍윤숙, 김여정, 박제천, 신경림, 오세영, 이탄, 정진규, 김종해, 김지하, 정현종, 천양희, 성찬경, 이수익, 조오현, 신달자, 이성부, 정호승 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에 대한 열정과 인간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문학적 절정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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