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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펼치다 / 엄정숙

 

바다를 펼치다가 손을 베인다. 어제 베인 데를 오늘 또 베인다. 상처는 졸다가 놓친 한 줄 비문秘文이다. ‘바다를 썰어 드립니다’는 ‘숙자상회’ 간판에 추가로 붙은 로고다. 자투리 천에 쓴 글씨는 비가 오면 잘려나간 바다처럼 구겨진다. 그런 날은 뽕짝과 화투를 펼쳐 불쾌지수의 비늘을 걷어낸다. 주문받지 않은 회를 뜬다. 화투 아이콘이 일러준 오늘의 운세에 따라 도다리와 광어를 판가름한다. 시간마다 바뀌는 운세의 빛깔은 휴대용 티슈처럼 추억을 닮아 간다. 레깅스 바지보다 빡빡한 하루, 라면을 끓이거나 감자 칩을 씹으면서 바다를 읽는다. 처음 대면한 바다는 수직이어서 지문을 스캔할 때마다 쓸데없는 바람이 불었다. 바다는 그녀가 정독한 단 한 권의 책, 결국 바다의 책사策士가 되었다. 그녀는 바다를 얇게 썰어 파도가 씹히지 않게 하는 일을 좋아하고, 무게를 따지는 사람들은 바다의 첫 페이지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한밤중, 그녀는 거래 장부를 펼쳐 숫자 대신 제문을 적는다. 아직 펼쳐보지 못한 야생구역의 물때썰때와 수평선을 자르지 않는 고집 센 감성은 줄돔 무늬 표시를 한다. 그녀의 책갈피는 늘 젖어 있어 펼칠 때마다 간간한 해조음이 입안에 철썩 달라붙는다. 그녀는 계절도 없이 산란하는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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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날라리 / 박라연

 

핏빛의 자오선

달은 계속해 떨어지고 있어
그리고 너라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1. 관측일기 : 0000년 어느 별 행성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달은 계속해 떨어지고 있어
그렇지 않니?
그리고 나 또한 펜을 들었지.

푸른 눈의 아이
그들의 유일한 혈맥을 타고 온
너란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2. 관측일기 : 0000년 어느 별 행성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오전 9시에 쳇바퀴가 돌고 오후 6시에 멈췄어
이제 곧 시작 될 시간.

언제쯤 달이 지표면에 닿을까
계속해 보내고 있으니

언젠간 알아 줄 거야
달은 계속해 떨어지고 있단 걸

폐쇄된 기찻길 선로엔 무성히 풀만 자라났지만.

 

3. 관측일기 : 0000년 어느 별 행성에서

아직도 달은 계속해 떨어지고 있어
그들이 계속해 잊고 있듯이

너 라는.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단 걸

그렇지 않니?
오늘만은 무사히 이 비행(非行)신호가 그들에게 닿기를.

 

4. 관측일기 : 0000년 어느 별 행성에서

핏빛의 자오선

달은 계속해 떨어지고 있어
그리고 너라는 사람이 이제는 없었어.

사라져 버렸지. 이곳에서. 영영.

 

5. 관측일기 : 0000년 어느 별 행성에서

낯선 그대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
방방 거리던 그대 모습을 처음 보던 날
그들에게 도착할 수 없는 그대가 떠나던 날도

핏빛의 자오선엔
여전히 달이 계속해 떨어지고 있어.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 모를거야
그대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그들이 그대를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내가 차마 그대에게 말해 줄 수 없었듯이
그들은 이미 건전함에 빠진 날라리인걸

햇빛가림에 반응만 하지. 나처럼. 줄었다 커졌다 줄었다 커졌다.

핏빛의 자오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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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번역하다 / 주명숙

 

데면거리는 마음을 슬쩍 데불고 나온 곳이었다

피해갈 수 없는 결재란처럼 층층시하다

힘주어 누르며 계단을 내려서는데

난간에 얹힌 울림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시공의 틈으로 흡입하는 시간의 발화,

탕 안의 공명 현상처럼 둥글게 살찐 소리와

찰진 여운을 머금어 주는 낮은 채도의 알파파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알맞게 버물려졌다

난간에 기대어 비스듬해진 내리막 같은

출구

 

손잡이를 돌려 나가려는데 아래쪽에서 나는 인기척

여자가 컥, 울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묻은 채 토해 내는 속울음

얼결에 부록이 되어 버린 나는 덩달아 철렁,

숨소리도 끄고 곁에 앉아버렸다

건물의 부록 같은 한동안의 위안이

계단 끄트머리마다 미끄럼 방지선으로 새겨진다

수리부엉이의 날개 짓을 닮은 날숨 한 자락들

인디언 체로키족의 입담이라면

이 삶의 귀퉁이들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었을까

 

여자의 젖은 등을 그저 바라보다가

, 소리 나게 문을 열었다

 

열렸으면서도 닫힌 공간의 은근한 압력

가슴 한켠의 추를 가만히 느끼며

그래, 여기는 비상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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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속엔 바다가 없다 / 김부회


파도가 눈에 밟혀 바다를 모니터에 욱여넣은 사내가 있다
바다의 푸른 치맛단을 들추던 저녁이면
사내의 뜨거운 귓바퀴 속에서
아프로디테의 은밀했던 이야기가 소용돌이쳤다
수평선 위로 태양이 붉게 달궈진 다리를 놓는다
주름진 자궁 속을 더듬던 사내의 두 눈
해변의 허리춤, 밀물에 떠밀려온 부품처럼
해안선을 그려 넣은 눈빛이 흔들거린다
간혹 먼 거리 거슬러온 운석들 마디마디
분절된 해변의 모래알을 깨우고
오래된 시간들 하나둘 쓰다듬으며 퇴적되어 갈 것이다
바다의 물빛을 구멍 난 가슴에 공그르며
잃어버린 기억을 제 뼈에 깊숙이 음각하는 사내
구름을 껴안고 산란하는 달, 달빛의 살점들과
별들의 가는 뼈가 바다의 내장으로 수장될 때
뮤 대륙* 사라진 도시 어디쯤 파헤치면
함께 수몰된 부장품들이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색 바랜 페인트를 벗겨낼수록 또렷하게 각인되는 기억들
바다를 이식한 모니터가 끝내 거품을 게워낸다
사내의 곁에서 안달루시아의 개**한 마리 컹컹 짖는다



* 기원전 70,000년 경 남태평양에 존재한 가상의 대륙
**살바도르 달리의 영화제목


[당선소감]

흑룡이 비상하는 한 해, 임진년의 여명이 붉다.

얼핏 스쳐가는 지난 1년의 시간 속에서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들을
시로 쓰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본다. 가슴 설레게 다가온 당선 이라
는 말, 앞으로 헤쳐 나갈 문학의 길이 두렵다는 생각이 앞선다.

할 수만 있다면 시린 밤하늘의 별자리들을 뚝뚝 떼어, 그 이름의 자음과 모음을 다시 조립
한 낱말들에, 내가 알게 된 이 도시의 색을 채색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낡고
경직된 내 삶의 지난한 시간들에게 자성의 경각을 심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눌한 글에 생명을 불어주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 최정신 시인님, 마경덕 시인님, 박연
휘님, 이종원님, 박영수님 등등 시마을 동인 문우 여러분 모든 분들의 격려와 부단한 조언,
그리고 끝없는 자기성찰에 의미를 부여하게 해 준, 가족과 시의 토양을 제공한 시마을 문우
여러분 모두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서툰 제게 당선의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박인과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제 좀 더 치열한 공부를 하라는 격려에 부족하지 않게 최선을 다 하는 모습으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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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인 / 김봉래

 

생각이 뚜벅거리며 TV속으로 들어가요
그 뒤를 따라 시간이 들어가고
얼마 남지 않은 어둠이 힐끔거리며 뒤를 따르고 있어요
드라마가 종반부로 치닫자
사건은 삼각관계에서 생각이 가세한 사각구도로 전환 되었어요
배우는 준비된 대사로 예리하게 상대의 가슴을 도려내는데
생각은 할 말을 생각해 두지 않았어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생각,
몸서리 한 번 치고 배역으로부터 도망쳐 나오자
네모진 입을 시커멓게 벌린 TV가 삼킬 듯이 쫓아와요
피신처가 필요해요
땀방울이 침대 밑으로 흘러내려 호수가 되었는데
그곳에 풍덩 빠지면 몸을 숨길 수 있겠어요
잠시이긴 하지만 조금의 휴식은 취할 수 있지요
원고지로 배를 접어 먼 나라로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생각,
생각의 생각뿐인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조그만 창문 틈으로 새벽이 몰려와 침대를 밀어내요
곧이어 등장한 햇살이 호수를 말려버리면
벌거벗은 생각은 부끄러워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이젠 더 이상 피할 곳도 없거든요
데드라인,
달력의 숫자를 가두고 있던 빨간색 원이
스르르 풀려나 목을 죄려고 날아와요

 

 

 

바다 수선 / 이인숙

 

나의 바다를 세탁소에 맡겨야겠어요
지저분하고 찢긴 데가 많아요
바다를 맡기기엔 너무 크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정씨 아줌마는 보자마자 수선비 많이 나오겠다며 한숨 쉬죠
너덜너덜한 바다를 뒤집는 순간
물고기들이 옷 사이 헤엄쳐 다녀요
바다를 다시 뒤집으니 가게 안도 조용해지는군요
속을 잘 드러내지 않던 당신
 
아줌마는 찢긴 상처들을 재봉틀로 박기 시작해요
바다가 가끔 꿈틀거리고
구멍 난 곳에는 시냇물 끌어다 덧대고
박을수록 신이 나 무엇이든 끌어당겨요
찢긴 내 가슴도 촘촘하게 박아줄까요
그래도 흔적은 남게 되고 가끔 비 내리면 가려울 거예요
수선 끝낸 바다, 쳐다보니 구름 사이로 반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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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의 노래 / 조미선

 

일어서면

어김없이 뼈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우두둑 소리 높여 노래한다며

 

텔레비전에서

채용박람회 72세 할아버지

‘일자리만 주신다면 젊은 사람 보다

더 잘 할 자신이 있다오’

 

그 힘 자랑에

시간의 허물 벗은 숯

얕은 잠결에 문 틈 열고 들어오며

탁, 탁 튀는 노래 부른다

 

그 소리에

아직 하얗게 태워야 할 몸

많이 남아있다고

할아버지

타박타박 숯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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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차 팔던 날 / 최윤희

몇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가망 없다고
누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나는 차가운 종이에 종말을 서명했다
강철 심장으로도 못 견디는 게 있었구나
세월. 그 허름한 옷을 입으면
우리네 사막에는 모래바람 부는가
낯선 이에게 너를 두고 오는 버스 칸
끝내 아내 얼굴에 두 줄기 햇살 빛난다
툭 툭 어깨를 쳐봤으나
그럴수록 우물 속 깊은 두레박 소리가 난다
한 때 새파란 어깨를 걸고 쏘다니던
늠름한 은빛 기억 때문일까
이제 우리도 낡아 간다는 사실 때문인가
결코 헐값에 합의 한 건
손때 묻은 기억까지 처분한 게 아닌데
그녀는 고물만 보면
입에서 허기진 바람소리를 낸다
창밖으로 쫓아가는 가련한 시선
구식으로 물 긷는 미련한 낭만주의자
그 옆자리가 따뜻하다

 

 

 

창문 / 정성수

 

심부름을 갈 때마다 되창문이 열리고
마당 섶이나 마루 끝에 가래침이 떨어졌다.
어느 때는 내 발 아래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가래침을 슬며시 밟고는
할아버지가 눈치 채지 않게 짓이겼다.

뀅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웃집 할아버지는
산송장이었다.
그 때 심부름을 가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다.

법정 제3군 전염병. 폐결핵
폐결핵을 위해서
크리스마스 씰은 몇 장이나 사면되느냐고
대한결핵협회가 뭐하는 곳이냐고
인터넷을 뒤지며
때 늦은 공부를 한다.

옆방에서 아내가 밤새도록
가래침을 뱉는다.
가래침이 내 가슴 한 복판에 떨어질 때마다
유년의 되창문이 자꾸 자꾸 열린다.

* 되창문 : 초가집 안방문 옆에 조그만 유리창이 붙은 작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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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대한 짧은 소견 / 이상미

진찰실 한켠에선
눈 먼 소국이 그녀를 읽는다

하루 분량의 햇살을 다 털어먹어도
그만그만한
그녀의 증세를 점검한다

입 짧은 가을

시간은 어느 새
눈에 보이지 않는 인부들을 불러 내
들판을 시공하고

거둬 낸 풍경 몇 점만이
손잡이 나간
달력 속으로 들어온다

잠깐,
공복 중인 우주와 눈 마주치는

설명서에도 없는
고요 한 상
가득 받고 서 있는 오후

차도가 없는 그녀의 병은
늦게 퇴근하는 가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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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 고기리

계표기와 카드의 입맞춤 값 팔백 원을 지불하고
하루 몫의 등짐 추스르며 플랫폼에 선다
형광빛 광합성으로 젖무덤에 핀 광고판 속 장미꽃처럼
어제 놓고 내린 꿈 수정란의 꽃으로 다시 피우고 싶어
열차를 기다리며 괄약근을 조이는 사람들
뜨거운 입맞춤 후 쓰레기통에 버려진 종이컵들
빠듯한 일인분의 산소량을 아껴 호흡하며
몇 모금의 액체 속에 용해된 카페인을 아가미로
분리수거해 하품을 쫓는 사이
잠들었던 푸르른 성감대의 선로 우르르 울리며
바닥을 향해 비어가는 종이컵 속으로 열차가 도착한다

선에서 선으로 색에서 색으로
모든 오고 감의 끝이 무엇인가를 학습하기 위하여
해웃값 따질 겨를도 없이 암수 몸 맞대고 땅굴을 달린다
휴대전화 핸드폰 휴대폰 셀폰 모바일폰 DMB폰 …
육성과 기계음이 서로 접붙어 변종 불협화음을 산란한다
혼자서 인공호흡을 하는 노숙자의 가위눌린 숨소리가
카드 빚 쳇바퀴에 치인 누군가의 신음소리에 꺾꽂이 되고
선따라 색따라 타고 내리는 정거장마다
밤새 숙성된 수정란 좌석마다 포기 나뉘어 착상되는데
액정화면에서 무리지어 짝짓고 허공으로 날아간
메시지의 자음과 모음이
년상과 년하가 자리 바꿔 앉는 의식에 꽃가루처럼 날리고
통화중 튀어나와 광고지처럼 나눠지는 웃음소리가
벗은 제 허물을 먹고 몸을 풀어 날개를 짓는
우화(羽化)의 과정에서 잘린 더듬이
아, 손금을 고쳐 환승하고픈 한숨소리에 휘묻이되고 …
소리보다 더 옹골진 삶의 바탕인 침묵이 깨질 때마다
우연히 같은 지하철을 탔을 뿐인 사람들끼리
때론 눈을 흘기고 때론 빙긋 웃음을 흘리며
동승자의 대가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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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을 들여다 보면 / 강애나


하얀 종이 울리네요
바람결에 들리는 종소리는 낮은 엘토라죠
엘토종이 밤 이슬에 취해서 비틀거리네요
전날 밤 아마 과음했나봐요
부끄러운 달은 구름속에서 숨은채 나오질 못 하네요
바람결에 그 하얀 종에서 노래가 깔리고
원앙새 한쌍이 날아 오르죠
신부가 나온다고 하얀종 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있어요
축하객도 왁자지껄 하네요
오늘의 신부가 원앙새 소리와 함께
하얀 꽃신을 신고 향기따라 흔들릴 겁니다

보세요 저 하얀 울림속의 촛불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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