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펼치다 / 엄정숙
바다를 펼치다가 손을 베인다. 어제 베인 데를 오늘 또 베인다. 상처는 졸다가 놓친 한 줄 비문秘文이다. ‘바다를 썰어 드립니다’는 ‘숙자상회’ 간판에 추가로 붙은 로고다. 자투리 천에 쓴 글씨는 비가 오면 잘려나간 바다처럼 구겨진다. 그런 날은 뽕짝과 화투를 펼쳐 불쾌지수의 비늘을 걷어낸다. 주문받지 않은 회를 뜬다. 화투 아이콘이 일러준 오늘의 운세에 따라 도다리와 광어를 판가름한다. 시간마다 바뀌는 운세의 빛깔은 휴대용 티슈처럼 추억을 닮아 간다. 레깅스 바지보다 빡빡한 하루, 라면을 끓이거나 감자 칩을 씹으면서 바다를 읽는다. 처음 대면한 바다는 수직이어서 지문을 스캔할 때마다 쓸데없는 바람이 불었다. 바다는 그녀가 정독한 단 한 권의 책, 결국 바다의 책사策士가 되었다. 그녀는 바다를 얇게 썰어 파도가 씹히지 않게 하는 일을 좋아하고, 무게를 따지는 사람들은 바다의 첫 페이지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한밤중, 그녀는 거래 장부를 펼쳐 숫자 대신 제문을 적는다. 아직 펼쳐보지 못한 야생구역의 물때썰때와 수평선을 자르지 않는 고집 센 감성은 줄돔 무늬 표시를 한다. 그녀의 책갈피는 늘 젖어 있어 펼칠 때마다 간간한 해조음이 입안에 철썩 달라붙는다. 그녀는 계절도 없이 산란하는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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