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 박현웅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반짝거리는 털을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몇 마리 신기루가 보였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는 중이다
평생 모래를 건너도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
오래전 모래 속에서 귀를 빌려온 죄로
사막에 소리를 맡기고 다녀야하는 은빛여우
넓은귀로 입맛을 다신다.
사구의 그림자가 모래 속에서 걸어 나와 주름으로 눕는 밤
은빛여우의 눈은 빛의 껍질을 벗겨낸 말랑한 과육
소리에 민감한 어둠덩어리다
허기진 소리들이 더욱 환해지며 서로의 먹잇감이 되듯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
찾아야할 작은 먹잇감이다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식사를 끝내고
약간의 풀이 있는 곳, 여우가 제 발자국을 오래 천천히 핥는다.
작고 빛나는 사막 한 마리가 죽어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는 칼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느리게 생명을 쓰러뜨린다.
여우의 몸을 떠난 숨결이 오래
은빛 털을 핥는다.
걸음을 내려놓고 날개 없이 은빛 털들이 날아오른다.
채색하는 모래바람은 일렁이는 밀밭풍이다
사막에서 살찌는 것은 바람뿐이다
[당선소감] 나의 경전에 무릎 꿇고 기도 치열한 문장으로 갚겠다
펑펑 내린 눈이 무릎까지 찾아온 밤, 잠들어 있는 방을 나선 소년. 무릎까지 쌓인 눈을 걷는 것보다 어둠이 더 무서웠지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산 중턱 성당에 다다른 소년의 발과 무릎에 흰 눈이 가득 묻었고 등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 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듯 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소년은 손을 모아 내용도 형식도 없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 때의 그 소년이 지금 제 시의 모양일 것입니다.
한계점이 제 축이었던 시절. 부풀어 오르기 전 먼저 허물어져 보라고, 소실점에서 기다려 보라고, 변곡점은 거기에 있다고 수없이 스스로 되뇐 나의 경전에 오늘 무릎을 굽힙니다.
내 시의 첫 독자이면서 가끔 무서운 사랑으로 A4용지를 찢어 버리는, 귀한 나의 아내에게 가장 깨끗한 영광을 돌립니다. 처음 나에게 시 쓰기로의 권유와 늘 곁에서 바른길을 들고 지켜봐 주시는 최성훈 선생님, 시를 켜놓고 밤을 새우고 있을 우리시(詩) 회원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따뜻한 냉정으로 지도해 주신 박해람 선생님, 가장 귀한 감사를 마음 숙여 올립니다. 하루하루의 공부가 참 즐거웠습니다. 치열한 문장으로 갚겠습니다.
또한 각각의 이름만으로도 두려운 경운서당 학우님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며 함께 수학할 수 있어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끝으로 심사위원이신 이문재 선생님, 장석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첫 걸음이지만 선생님들의 선택에 누가되지 않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중앙일보사와 앞으로 신세 질 귀한 지면에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곱씹을 만한 잠언투의 시어 적막한 내면 짜임새 있게 표현
오병량씨와 박현웅씨가 최종적으로 남았다. 상상력의 진폭과 언어구사의 활달성에서는 오병량씨가 좋았다. 오래 시를 써온 흔적도 역력하다. 헌데 무언가 자기 정서가 확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물론 신인에게 그 점을 갖추라는 주문은 무리겠으나 이번 응모작의 경우는 자꾸만 이즈음 회자되는 시들을 좌고우면한 흔적이 있어서 믿음이 덜했다.
가령 이런 구절들이 그렇다. ‘계절은 나무가 가진 옷장의 형태’(‘나무의 취향’ 중)나 ‘내 몸을 다녀간 들숨의 필체…’ 운운의 구절 등은 울림 없는 기교에 머물러 안타까웠다. ‘목도리 사용법’같은 좋은 시를 다른 시가 뒷받침하지 못했다.
당선자가 된 박현웅씨의 시는 그에 비해 문장과 감성이 안정되어 있다. 신인에게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장점만은 아니지만 다른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들이 발랄한, 하다못해 발칙한 감각의 소유자들이 대다수여서 외려 귀하게 여겨졌다. 당선작으로 고른 ‘사막’은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적막한 내면을 짜임새 있고 간결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사막’은 실감으로는 우리에게 낯선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미래의 은유로 읽을 때 절실한 풍경으로 다가선다.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찾아야 할 작은 먹잇감이다’같은 잠언투는 어눌하지만 곱씹을 만한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자칫 전통 서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좀 더 활달해지기를 권하고 싶다. 축하를 드리며 꽃밭 이루시길 바란다.
박은지씨와 박유진씨 등의 시도 읽을만 했는데 뭔가 비슷비슷하다. 개별적으로 보면 개성적인 듯한데 나란히 보면 비슷하다. 그게 뭘까 생각해보길 바란다.
신인 문학상에 응모하는 것은 문청들에게 하나의 큰 축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마디가 만들어지고 그 마디들이 쌓여 나중에 좋은 시인의 훈장이 될 터. 낙선의 고통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해질 것이다. 축하와 안타까움을 위하여! 한잔씩 하시길 바란다.
본심 심사위원 이문재·장석남(대표집필 장석남) / 예심 심사위원=권혁웅·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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