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大개방 / 방수진
1
선전물이 붙는다 오늘 하루뿐이라는 창고大개방
준비 없는 행인의 주머니를 들썩이게 만든다 간혹
마음 급한 지폐들이 앞사람 발뒤꿈치를 따라 가고 몇몇은
아예 선전물처럼 벽에 붙어버린다
떨어진 상표딱지, 올 풀린 스웨터, 뜯어진 주머니, 비뚤거리는 바느질까지
다들 제 몸에 상처 하나씩 지닌 것들이다
습기 찬 창고에서 울먹이는 소리는 여간해선 지상으로 들리지 않는 법
2
조금은 잦은 듯한 창고개방이 우리집에도 열린다
일 년에 다섯 번 혹은 예닐곱으로 늘어나기도 하는 그날엔
아버지 몸에서 하나 둘씩 튀어나오는 물건들을 받아내느라 힘들다
하지만 나는
집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냄비며 플라스틱 용기들이
조금씩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때론, 손끝에서 퍼진 그 울먹임이 아내의 머리를 찢고
다리에 멍울을 남기고 깨진 도자기에 발을 베게 만들지만
아버지의 창고 그곳에서
누구도 딸 수 없었던 창고의 자물쇠가 서서히 부서지고,
서로 쓰다듬을 수 없어 곪아버린 물집들이
밤이면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제 심장소리에도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3
아직, 연고 한 번 바르지 못한 상처들로 창고가 북적거린다
창고의 문을 열어두는 이유는
더는 그것들을 보관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서로 다리 한 쪽씩 걸치고 있는
우리들의 절름발이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몇 번의 딱지가 생기고 떨어졌어도
한번 베인 자리는 쳐다보기만 해도 울컥하는 법이지
그래서 창고 개방하는 날
거리에는 저마다의 창고에서 빠져나온
우리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을 치며 쌓여가고 있었다
[당선소감] “곪아 터져가는 모든 것을 가슴에 품겠다”
무작정 밤길을 거닌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이름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기지개를 켜는 그곳에서, 상처 입은 것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곧 물러터질 것들과 이미 썩어 문드러진 것들의 변주 교향악. 제멋대로 음계를 오르락내리락,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가고 나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지요. 조금씩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에서 제가 얼핏 본 것이 당신이었나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어 나오는 진물을 봅니다. 상처 입은 것들의 요람을 찾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을 등에 업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내 언어가 그곳까지 닿아 조용히 잠들 수 있기를 바라왔습니다. 교향악 악보에 하나씩 그려지는 내 언어의 음표들은 누구를 부르고 있나요.
갑작스레 받은 당선소식도 이 오선지위로 떨어지는 그들의 눈물 같은 것이겠지요. 손꼽아 봅니다. 그들의 상처 덮어줄 이파리를 찾아 길을 나선 밤들을.
아직 많이 부족한 제 시를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묵묵히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군 생활 열심히 하고 있는 동생 성현이, 뜨거운 시를 쓰자고 약속했던 은지, 현진이를 비롯한 문예창작단 학우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선후배님들, 현아, 부산 죽마고우 그리고 정신적 나침반이 돼 주었던 진아, 은지, 유나, 가연, 신정, 미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진흙에서 손수 저를 캐내주신 박주택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영이, 김원경 시인 두 분 모두 건필하시기를. 지금도 서울에 대학 간 손녀 자랑이 삶의 힘이라고 하시는 할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해여중 서욱성 선생님 아직도 시와 함께 길을 걸으시나요. 뵙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어 주신 한종수 님을 비롯한 이 넓은 중국 땅에서 만난 멋진 인연들 모두, 감사합니다.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온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뱉어낸 언어들이 저마다 길거리를 활보하며 춤추는 밤입니다. 세상 모든 상처 받은 것들의 울음을 거두어가는 일, 그것들을 빼곡히 오선지에 그려가는 일이 제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울음과 절규로 시를 쓰겠습니다. 제가 빚어낸 언어들이 조용히 잠들 수 있도록 세상 모든 곪아 터져가는 것들을 가슴에 품겠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따귀를 때리고 갑니다.
그래도, 웃고 싶은 오늘입니다.
[심사평] “시적 대상 장악하는 힘 뛰어나”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30명이었다.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보통 본심에는 10명 안팎이 오른다. 예심 심사위원들은 좋은 작품이 많아서 행복했는지 모르지만, 본심 위원들은 고통스러웠다. 30명의 개성이 아니라 4~5개의 유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응모작들은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먼저 눈에 띄었다.
우선 작품의 길이와 형태가 거의 같았다. 행을 구분한 시의 경우, 대부분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다. 또 산문시가 압도적이었다. 어떤 응모자는 응모작 7편이 모두 산문시였다. 시의 길이와 형태에 대한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많이 겹쳤다. 흔들리는 가족, 이주 노동자에 대한 연민, 외국 여행(주로 유럽) 체험, 신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해석 등이 자주 노출되었다. 두 응모자가 ‘노르웨이 숲’이란 같은 제목을 달기도 했다.
응모자들은 저마다 뛰어난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초점이나 색채, 구도, 즉 미장센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그 대상을 왜 ‘촬영’하는 것인지, 또 그렇게 촬영하고 편집한 ‘화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감독이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가 있으니까 찍는 것처럼 보였다. 예비 시인들은 시는 오로지 이미지의 배열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시에서 이미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시가 되기 어렵다. 이미지 과잉은 곧 메시지(의미)의 결핍이다. 시에서(삶에서도 그렇지만), 과잉과 결핍은 결코 미덕일 수가 없다. 시 역시 ‘타인에게 말걸기’라면, 이미지 과잉으로는 독자에게 말을 걸 수가 없다. 더구나 저 독자가 시대와 문명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하루빨리 자폐적인 시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셋이었다. 김학중씨의 ‘저니 맨’, 박은지씨의 ‘열쇠, 도장’ , 그리고 방수진씨의 ‘창고대(大)개방’. 김학중씨의 ‘저니 맨’은 삶의 한 국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선이 돋보였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해 아쉬웠다.
박은지씨의 ‘열쇠, 도장’과 방수진씨의 ‘창고대개방’ 두 작품 중에서 당선작을 골라야 했다. 문장은 박씨가 세련되었으나,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힘이나 시의 구성에서 방씨가 조금 앞서 있었다. ‘조금’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시길 바란다.
김학중·박은지씨는 조만간 다른 경로를 통해 시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부디 등단 시기나 절차에 과민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는 데뷔가 아니고, 데뷔 이후다. 시인이 된 이후, 어떤 시를 쓰느냐가 문제다. 당선자 방수진씨는 오늘 아침 활자화된 당선소감(초심!)을 평생 잊지 말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문재·장석남(대표집필 이문재) / 예심 강정·이장욱·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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