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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나희덕

 


2. 수상작품 : 「엘리베이터」외 4편

 


「엘리베이터」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버렸다
11층, 9층, 7층, 5층……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들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야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이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홀수층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시 사람들이 채워진다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아우성이 채워지고, 문이 닫히고,
빽빽해진 모판은 비워지기 위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1층, 3층, 5층, 7층, 9층, 11층……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입으로 들어갈 밥과 국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밥과 국을 삼키지 못할 육체를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손을 잡으려는 수많은 손들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병든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손들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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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정현종(시인, 연세대 교수), 김화영(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김선학(동국대 교수), 김명인(시인, 고려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날아오르는 나비와 내려앉는 나비」

장석남, 나희덕 두 시인을 두고 어느 쪽을 수상자로 추천할까 망설였다.
장석남은 매력적인 시인이다. 어떤 분은 ‘타고난 시인’이라고도 말했다. 가령 <수묵 정원 9-번짐> 같은 시를 읽어 보면 그런 말이 수긍된다는 느낌이다. “번짐,/번져야 사랑이지//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같은 곳을 읽고 있으면 그의 시적 역동성이 읽는 이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번져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 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살구를 따고>) 같은 치밀한 묘사 위에 덧없는 삶의 한 순간을 덜렁 올려 놓을 경우 또한 그렇다. 그러나 예심을 거쳐온 이 시인의 시편들이 이런 수준과 긴장을 항상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좀 아쉬웠다.
반면에 나희덕 시인의 시편들은 언제나 일정한 구조적 긴장과 특유의 어법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점이 미덕이다. 엘리베이터, 밥상, 젓가락, 맨밥, 현관문, 신발, 호미 같은 사소한 일상의 소도구들이나 거미줄, 기러기 떼, 월식, 새, 나비, 나무, 구름, 비 같은 가시적 대상이나 현상들로부터 존재와 무, 죽음 같은 근원적 문제로 태연하게 건너뛰어 직행하는 그 속도와 고즈넉해서 더욱 섬뜩해지는 시선이 여운과 우울한 감동을 길게 남긴다. 대체로 그의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 슬픔 속에는 일정한 균형을 잡아 주는 무게 중심 같은 것이나 삶의 전모를 흐릿하게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 또한 내장되어 있어서 그 슬픔을 조용하게 견디며 통과하는 암시 구실을 한다. 가령 “한 발은 나비를 신고/한 발은 땅에 디딘 채/절뚝절뚝 봄길을 날아 걸어왔으니//나비야, 나비야,/이 검은 땅 위에 다시 내려와 앉아라/내가 너를 신겠다”의 어두운 초현실주의가 그렇다. 나는 결국 이 “내려앉는” 나비 쪽의 손을 들기로 한다. 나희덕 시인의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란다.(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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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문인수

 

 

2. 수상작품 :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외 4편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지라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 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그립다는 말의 긴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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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이성선(시인),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觀想의 깊이」

심사가 마친내 문인수와 박용하 두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자 심사위원들은 모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인수에게는 觀想의 깊이가 있다면, 박용하에게는 패기가 있다. 박용하에게서는 자신의 視像과 이미지를 강요하려는 조급함이 약점이라면, 문인수의 시는 얼핏 보기에 선동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처음부터 문인수의 편에 서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박용하의 더 훌륭한 시들이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그의 어깨에 수상의 짐을 올려놓는 것이 반드시 이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안정감과 신선함을 동시에 지닌 시인을 찾는다면 문인수에게서 그 시인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문인수의 시는 주로 자연에 관해서 노래하며, 그 자연관은 한국적 산수화의 전통과 일정하게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자연이 드러나는 방식은 개량 한복에서 연상되는 것과 같은 그런 오종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레도 아니며 자기 기만도 아니다. 그의 자연에는 착할래야 착할 수 없는 어떤 의붓자식의 한 같은 것, 일을 벌써 저질러 놓고 원망을 듣는 놀음꾼이나 또다시 길 떠난 가객의 속 그늘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말해 보아야 이해될 턱이 없다는 듯 길게 표현되지 않는다. 시인은 말을 하려다 말고 북채만 한번 부러져라 내리치는데, 이 암묵법은 오히려 모던하다.
「3월」, 아직 날씨 춥고 꽃만 뜨거운데, 무덤 속의 아버지, 어머니 두런거린다: 가슴속에 고려장을 했기 때문인가. 「10월」, 호박 따낸 자리가 고름 짜낸 자리처럼 가을 한복판이 움폭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지만, 회복기의 환자처럼 아프겠지.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좋다, 그런데 왜 북채는 동백이 떨어져 선혈지는 순간에만 난타하는가, 왜, 아깝게도 심사 대상 기간 밖에 있는 좋은 시「동강의 높은 새」, 새파란 산 구비들 이어져 “일자무식의 백리 긴 편지를 쓴다”는데,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제 몸 내던지고 살아온 시인은 아직도 세상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축하한다.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출석 부르는 이 의문들을 축하한다.(황현산)

 

 

파란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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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최정례

 


2. 수상작품 : 「3분 자동 세차장에서」외 4편

 


「3분 자동 세차장에서」

소낙비 쏟아지는 게 좋아 소낙비 속에 물레방아간 같은 소낙비
매맞는 움막 같은 수숫단 같은 수숫단을 비집고 들어가는 3분 자동
세차장이

라디오를 끄고 기어를 중립에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라는 주
문을 외는 거야 중립 브레이크 중립 브레이크 레이크 이크

병든 도깨비처럼 황소 뱃속*에 세들고 싶었지
“황소님 주인님 방 한 칸 빌려주세요 애는 낳았는데 한겨울에 어
디로 이사를 가란 말인가요 며칠만이라도 더“

기습결혼을 했었지 황소 뱃속 같은 곳에서 아이를 낳고 아파트가
당첨됐으나 허물어지고 길길이 뛰고 난리치고 아무나 붙잡고 사정
했지만

“초록이 켜지면 출발하시오”
나가라는군 초록불이 켜지면 방을 빼라는군 빗자루와 비누걸레
는 늘 협박하지 옷 입고 샤워하다 3분 만에 밀려나는군 아무리 방
망이로 땅을 쳐도 끄덕하지 않는 나라 이상한 나라

 

*이상(理想)의 동화 「황소와 도깨비」에서

 

 

 

빛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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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석좌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김명인(시인, 고려대 교수), 최동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형식의 획득과 방기」

정호승과 최정례의 시편들 사이에 선택지가 놓였을 때, 나는 최정례 쪽을 선택했다. 그 까닭은 두 가지였다. 첫째, 김달진문학상은 작품상이어야 한다는 것. 둘째, 기왕이면 여러 수상의 경력에 덧입혀주기 보다는 첫 수상의 영예로 이 상의 성격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 여타의 문학상과 차별성이 있으리라는 것.
거명된 두 후보자만 두고 말해도 각기 장단점은 있을 것이다. 가령, 정호승의 시편들은 넘쳐나는 우수의 서정성이 우리의 보편적인 가락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비애의 형식을 일깨워 그것이 인간 심사의 한 본연임을 되살려낸다. 그의 시가 널리 읽혀지는 까닭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외화(外華)로만 흐를 때, 상투성에 닿아버린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고 보니 최정례의 시편들은 그 상투성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데서 호감을 준다. 분방하기까지 한 상상력이 형식을 얻을 때, 빚어지는 시적 공간은 일상의 외피들을 한꺼풀 벗겨내고, 그 속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게 한다. 일상을 낯선 각도에서 마주치게 하는 솜씨에는 최정례다운 바가 있다. 그러나 마땅한 형식을 얻지 못했을 때의 두서없음은 이 시인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심사 자리라는 게 곤혹스러움을 자초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들 두 시인 사이의 선택은 더 어려웠다. 그것도 사저인 인연에 깊이 얽혀 있음에랴!(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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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남진우

 


2. 수상작품 : 「타오르는 책」외 4편

 


「타오르는 책」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웅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물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타오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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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정현종(시인, 연세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문명사적 죽음의 탁월한 형상화」

예심에 올라온 다섯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을 한 결과 남진우 씨의 「타오르는 책」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만장의 일치를 보았다. 후보자들 중 한 분은 심사하는 당일 다른 문학상을 수상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어 제외되었고 다른 분들은 혹은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않다든가 혹은 개성이 약하든가 혹은 좀더 지켜 보자든가 하는 이유로 밀리게 되었다.
남진우 씨는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 시인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그가 작년에 출간한 그의 시집에서 우리 시대의 황량한 삶을 죽음의 이미지로 잘 형상화시킨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의 심사 대상에 오른 작품들 역시 그와 같은 개성이 드러나 보인다. 특히 수상작 「타오르는 책」은 진정한 삶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한계성을 불과 언어의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에 있어서 완전한 삶이란 완전한 언어를 소유하는 데서 가능하다.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나아가 자신과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상적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완전한 언어를 갖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신화시대에 경험한 이 언어, 즉 이 시에서 ‘불타는 책’으로 상징된 이 완전한 언어가 인간이 물질로 타락한 우리 시대에는 그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은 문명사적 죽음의 의미를 「타오르는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면 「타오르는 책」이 다소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모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 또한 예술의 하나인 까닭에 미학성 역시 중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고형렬 씨의 「성에꽃 눈부처」, 나희덕 씨의 「그 때 나는」, 장옥관 씨의 「살구꽃 필 때」등의 작품들도 좋았다.(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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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고진하

 


2. 수상작품 : 「즈므 마을 1」외 5편

 


「즈므 마을1」

푸른 이정표 선명한
즈므 마을*,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궜을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지고
저물녁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모은다
즈므 마을,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 나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어딘 내 걸음을 가로막아도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뜬 별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 송이버섯 같은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 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보자,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

 

*. 즈므 마을 : <저무는 마을>에서 유래된, 강릉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

 

 

야생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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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김주연(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김선학(동국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4. 심사평

「성화(聖化)된 이미지와 생명의 시」

심사평은 작가들의 세계에 대한 가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혼동되는 일이 있다. 모든 작가들은 그들의 개별적인 세계를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개별적인 비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심사는 언제나 이른바 상대평가로 연결되기 마련이며, 거기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것 이외의 요소가 이따금 개입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 작가의 대상 작품 말고도 그 작가의 전체적 역량이 고려되는 일이 때로 불가피한 것이다.
심사대상이 된 다섯 명의 시인들, 고진하, 남진우, 장석남, 최승호, 함민복의 시들을 읽으면서도 이러한 요소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었다. 가령 장석남과 최승호는 그 동안의 수상 경력을 이유로, 그리고 함민복은 적은 분량을 이유로(물론, 심사자들에 따라서 그 이유는 다소간 다르기는 했지만) 우선 양보되었다. 따라서 초점은 고진하와 남진우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으며, 고진하의 시가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높다는 이유에 의해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수상작 「즈므 마을 1」은 이 시인의 다른 작품 「黙言의 날」과 함께 매우 아름다운 시다. 강릉 근처의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을 담담하게 적고 있는 「즈므 마을 1」은 시인 자신의 성화(聖化)된 심성과의 조용한 교환을 통한 성화된 이미지가 신뢰를 준다. 반면에 깊이에 있어서 다소간 평이하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남진우의 시들은 이와는 매우 상반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고진하의 시가 생명의 시라면 남진우의 시들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나 매혹을 떨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양자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관심과 대상이 확연히 다른 것은 사실이다. 남진우의 시는 이번에 새를 대상으로 한 것들이 많았는데, 난해성에 관해 심사자들의 논의가 있었다. 의식을 시의 대상으로 할수록 시적 애매모호성에 대한 배려와 그 성취는 부담스러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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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송수권

 


2. 수상작품 : 「쪽빛」 외 6편

 


「쪽빛」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때늦은 숨비기꽃 몇 송이 막 피어나고
신신한 아침 햇빛 입을 대다
기절한다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무심히 조약돌을 던지면
팽팽한 수평선이 입을 벌리고
바다는 서슬진 유리처럼 퍼어런
금이 선다

아무도 없다

저 물 밖 물쟁이로 떠돌다 온 세월
이젠 떠나지 않으리라
내 영혼 속에 잠든 바다
쪽빛 물발로 깨워서 당신의 이름
뜨겁게 부르리라

 

 

 

허공에 거적을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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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박태일(시인)

 


4. 심사평

「가락과 서정적 안정감」
꼬불꼬불하여 읽기 힘든 산문화 경향이 시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또 억지춘향의 재담도 여기에 끼어든다. 이런 가운데 가락과 정감을 아울러 지닌 작품을 대하면 시의 본령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는 흐뭇함을 경험하게 된다.
송수권 씨의 작품을 대하면서 그러한 반가운 마음을 경험하였다. 정감과 가락과 격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상의 수상작이 빌려서 이름을 칭송하는 바 문인의 작품 세계와 반드시 일치하거나 유사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김달진 문학상이 전통적인 가락과 정감과 서정적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는 송수권 씨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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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이문재

 


2. 수상작품  : 「타워 크레인」외 4편

 


「타워 크레인-고독한 산책자의 몽상·7」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 아니다, 그러하니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잠 안쪽에서도 두 눈 뜨고 있어야 하느니
내 눈이 먼저 가 닿아 내가 불려가는길, 사라졌다,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겁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안구 패여나간 나는 말할 뻔한다, 뻥 뚫려 허당인 내 두 눈구멍 속으로 서울은 24시간 형광을 불밝혀 놓는다, 의안은 울지 않느니
내 정수리 위에 거대한 타원 크레인 하나 박혀 있다, 엔진 끄지 않는다, 몸속의 엘리베이터도 멈추지 않고 오르내리느니
내 안에 서울이 죄다 들어와 있구나, 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저것들이, 어,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는 것들이, 저 분명한 것들이

 

 

혼자의 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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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박두진(시인)

 


4. 심사평

「모색과 열정」

제6회 김달진 문학상의 수상작으로는 이문재 시인의 「타워 크레인」외 4편이 선정되었다. 최종심에 오른 김윤배·이성복·이성선·황지우 그리고 이문재 등 다섯 시인의 작품을 심사한 결과다. 최종심사를 위촉받은 사람은 김윤식·황동규·김재홍·최동호·박두진 다섯이었다. 심사 방법은 한 심사위원이 두 사람씩 추천하여 다득표순으로 축소 논의하기로 한 바, 나는 김윤배·이성선·황지우 세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이성선·이문재·김윤배 순으로 나타났다. 다시 2차 투표를 한 결과는 이성선과 이문재가 각 2표, 그리고 김윤배가 1표였다.
한참의 논의 과정에서 이성선과 이문재가 팽팽히 맞섰으나, 이 과정에서 상의 성격 내지 특성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실험적 성격의 참신함에 비중을 두자는 의견과 김달진의 시 세계를 고려하자는 의견이었다. 장시간 논의 끝에 결과는 이문재로 하기로 하였는바, 이것은 상의 특성을 좀 젊게 가자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문재의 시는 다소 불안정하면서도 도시적 삶의 문제를 정열적으로 파헤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어떤 점에서는 김윤배의 시가 더 성실하고 치열한 면도 있었고, 이성선의 시가 안정된 면도 있었지만, 이문재의 이러한 열정이 긍정할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도 이문재가 수상 시인으로 결정되는데 대해 이의가 있었다.
어차피 상의 심사를 최고라기보다는 최선의 작품을 고르는 일, 이 점에서 이문재씨가 앞으로 더욱 정진해서 큰 시인으로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차 안정돼가는 김달진 문학상이 더욱 발전하기를 빈다.(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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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송재학

 


2. 수상작품 : 「감은사에 가다」외 5편

 


「감은사에 가다」

감은사는 없다 감포 바다가 눈 높이까지 밀려와도 감은사 스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돌들을 쌓아 놓은 두 개 석탑이 감은사를 변명한다 지도에도 감은사로 적혀 있고 길을 물어보면 모두 아 감은사 말이지요, 감탄한다 시커먼 찰주까지 남아 있는 감은사 탑과 탑의 균열은 감은사의 부재와 더불어 꽃핀 현호색을 에워싼다

저 연보라빛 현호색을 가로질러 감은사를 볼 수 있으리라

절은 늘 가파르다 계단과 회랑과 높은 천장의 가파름은 삶과 절의 경계인 것 현호색은 감은사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동안 보라빛인 양 내 속에서 번진다

그곳에 감은사가 있어야 하는지 저녁 예불 소리를 듣거나 석등의 불빛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몇 백 년 동안 감은사는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감은사에서 바다까지 수로의 기록과 석탑을 찾았다 내가 감은사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곧 밀어닥칠 해일의 기미와 내 마음을 본뜬 수줍은 현호색 무더기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감은사에서 너무 지체했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이나 바람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먼저 그것들을 짊어지기도 한다

 

 

내간체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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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김종길(시인), 장호(시인),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4. 심사평

「참신한 시상과 활달한 상상력운동」

본심에 회부된 일곱 분 모두가 수상시인으로 뽑힐 만한 능력과 자질을 지닌 분들이기에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30대로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60년대에 데뷔한 시인부터 80년대 시인까지 각기 경륜과 특징이 있어서 한 사람을 뽑아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다소 연륜이 있는 시인으로 임영조씨와 보다 젊은 시인으로는 송재학씨를 추천했다. 임영조씨의 작품들은 비교적 깊이가 있고 완성도가 높았으며 작품의 수준이 일정해 보였고, 송재학씨의 시는 참신한 시상전개와 활달한 상상력 운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임영조씨의 시들은 안정돼 있는데 비해 생동력이 덜해보였으며, 송재학씨의 시들은 완성도가 다소 덜했지만 시적 패기와 열정이 신선하고 뜨겁게 다가오는 게 장점이었다. 심사위원들의 경우 두 분은 완성도 쪽에 점수를 후하게 매겼다. 이 과정에서 김달진 문학상의 선격이 논의되었고, 그 결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 높은 평가를 주어 왔던 상의 성격을 고려하여 나는 송재학씨를 수장작으로 미는데 적극 동의하였다.
제5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송재학씨의 「감은사에 가다」외 5편들은 참신한 시상과 활달한 상상력 운동이 돋보이는 게 특징이다. 광물적 상상력과 식물적 상상력이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부딪치면서 현대적 삶 속에서 마모돼 가는 인간성과 위축돼 가는 생명력을 복원해내는 힘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도 장점이다. 〈산의 터널 공사가 시작되었다/ 햇빛과 소나무가 무너진다/ 는개와 푸른 새순/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의 길이 갈라지고 부딪치는/ 그곳에는 절벽이 없다/ 늙은 여자의 化粧은 봄날을 힘겨워 한다/ 다홍치마 아이가 목덜미를 봄볕에 맡긴다/ 〔중략〕/ 늑골을 뜯고 비집고 올라오는 노루귀 흰 꽃 옆/ 우레와 폭우가 서성대는 봄밤〉(「봄날」)과 같은 시에서 보듯이 광물심상과 식물심상이 빚어내는 날카롭고 부드러운 화음 속에 따뜻한 생명의 울림과 율감을 섬세하게 포착해서 형상화해내는 힘과 눈이 돋보이는 것이다. 다만 비교적 긴 산문시 호흡을 지닐 경우 시상의 중첩과 동어반복적 요소 및 율감의 매끄럽지 못한 것들이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곳곳에 튕겨 오르는 신선한 시정신의 건강성과 감각의 신선성은 앞으로의 더 큰 발전에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시인의 앞날에 더욱 정진이 있어서 대성해 가기를 빌면서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김재홍)

 

 

 

파란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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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이하석

 


2. 수상작품 : 「가야산」외 5편

 


「가야산」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엘레지꽃들이 고개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무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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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김종길(시인, 고려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정현기(연세대 교수)

 


4. 심사평

 

이기철의 <아름답게 사는 길> 연작과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연작은 그가 계속 시에 따스함과 깊이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삿일이 아니다. 그전까지의 그의 시는 편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고, 그 방향은 대체로 ‘돌아오지 않는 江’이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살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病들도 친숙해지면 우리의 외로움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같은 통찰력도 동반한 살이다. 아마도 나까지 포함해서 주로 이미지 중심의 시론을 갖고 있는 사람 다수의 심사위원 구성이 아니었다면 이 상이 그에게 갔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이에 이하석도 변모를 했다. 철저히 군살빼기 운동을 한 것이다. 말이 쉽지 느낌과 생각의 군살이 그리 쉽게 빠지는가. 가슴을 선뜩하게 하는 곳도 있었다. <가야산> 끝부분이 특히 그랬다. 다만 대부분 시의 제목이 되고 있는 地名들이 그냥 <山 1>, <山 2>, <山 3> 등으로 바꾸어도 좋을 만큼 개별적인 필연성을 덜 갖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번의 변모가 앞으로 그의 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에, 일과성이 아닐 것 같기 때문에, 더욱 유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유모어, 혹은 마음의 여유 같은 데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그와 나 사이엔 이번 상이 두번 째 인연이다. 두 배로 축하한다.(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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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김명인 「가을에」 외 7편

 


2. 수상작품

「가을에」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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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김종길(시인, 고려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김선학(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4.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인들은 이건청, 이하석, 김명인, 최승호, 송재학 등 5명이었다. 데뷔 10년을 전후로 한, 그리고 작품상의 성격을 띤 것이 월하문학상의 선정조건이라면 위의 5명의 시인들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 아닐까. 김명인, 최승호 두 분을 먼저 골라 보았는데, 이는 심사에서 행하는 ‘먼저 두 사람 추천하기’라는 관례를 따른 것이자 그 이상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이 이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데, 곧 시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 그것.

(A) 떠도는 길이 길로만 분주하듯/마음은 늘 솟구치는 바람에 스쳐 자즈라져/나는…(<물 속의 빈 집 Ⅰ>)
(B) 저문 강물 갇히면 어디에 묻어두려고/나는…(<물 속의 빈집 Ⅱ>)
(C)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가을에>)

이러한 시구의 매력이란 무엇일까. ‘나’와 ‘너’만으로 구성된 사유형식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나’만을 세계의 중심에다 두고 세계를 인식할 때 세계란 특이한 모습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으리라. 거기에는 타자가 없는 만큼 자기 황홀증으로 치닫게 마련이 아닐까. 이 경우 언어는 자기 회전을 되풀이 할 것이며, 또 그것은 마침내 빈곤에로 향하지 않겠는가. 정신이라니, 당초 정신의 관여를 배제했던 것이 아닐까. 그 순간 비로소, ‘무성한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미의 표정이 감지된다. 이 미의 표정이란 정신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진 열매가 아니었을까.
만일 이 열매를 정신의 운동, 헤겔투로 말해 부정의 운동 앞에 세우면 어떠할까.

(가) 그리마 한 마리가 수 많은 다리를 끌고/벽을 달린다/수많은 그림자 다리들이 벽을 달린다/벽을 타고 달리는 저 놈의/눈알이 누워 있는 나를…(<무일물의 밤 4>)
(나) 외할머니의 꿀을 지켜야 한다/핏줄은 끈적거리고/지긋지긋한 나라에서도 애국심은 발동하여/나는…(<벌통 옆에서>)
(다) 나는 날개 없는 사람/긴 터널을, 거리를, 회전문을/지나가지만…(<골리앗개구리>)

정신이 관여하는 세계란 그리마의 그 파충류 같은 눈알의 감시하에 놓이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부정의 정신이란 자기자신까지 그 해를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란 타자인 까닭이다. 그 때 ‘나’는 자기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이 부조리한 세계의 적대관계에서 ‘나’의 생존방식을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전략개념의 도입이 그것. 환각(자기황홀증)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가 그것. 그 전략은 그러니까 ‘나’에게 기운나게 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

추억들이 쓸쓸하게 지나간다./붙잡아 두려하지 말아야 한다./망령들을 따라가 귀신굴에 살림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관능도 텅 빈 껍질이다.(<공터에 풀벌레 울 때>)

이는 일체를 부정하는 저 空의 세계의 흉내일까. 다시 말해, 정신이 부정의 운동을 본질로 한다면 그 한계란 무엇일까.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잎새’쪽이냐, ‘망령들을 따라가 귀신굴에 살림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쪽이냐. 이런 물음은 또 감각쪽이냐 정신쪽이냐로 바꾸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환각(에로스)의 형태로 넘어서고자 하는 일과 이 환각조차 부정해 버리고자 하는 일 사이에 벌어지는 인간존재의 딜레머 자체가 아닐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당황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지금 너는 무슨 철학을 하고 있느냐라는 목소리가 그 하나.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겠는가. 철학에로 이끌고 간 것은 정작 김명인, 최승호 두 사람의 작품이 아니었던가라고, 이 목소리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회를 맡은 김선학 씨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지 않겠는가. 어두운 시절 우리의 어느 민족시인 모양 ‘표할 하늘도 없다’라는 시늉을 하지 말라는 눈초리로, 그 순간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좀더 공부를 한 뒤엔 철학쪽에 표를 하겠지만 지금은 시쪽에다 표하기가 그것.(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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