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0년 12월 23일 / 성윤석
흐린 겨울 저녁인데 죽은 자의 글을 따라가는 앳된 소녀가 롤러스케이트 같은 기계를 타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땅은 좁아졌고 사람들도 줄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문장도 하늘로 떠올랐다 All’s Well That Ends Well*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 공중에서 눈이 내렸다 검은 구름에서 흰 눈은 여전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구름 위를 한 사내가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걷고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신인류였다 속도 중력 감정들이 비틀어졌다 우리가 본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여성과 사내 들은 주로 공중에 떠 있거나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은 오염되었고 신인류는 이제 불행을 매수하지 않았고 내버려둔 채 세상 최후의 고독을 살았다 거기에 나는 없었지만 이에 대한 어떤 증거도 거기엔 없었다 고스란히 새와 식물 들은 보였지만 불법이긴 했지만 수명 단축 기계가 여기저기 도시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 그 도시의 재해대책본부에서 쏘아올린 저녁의 문장이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다 신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돛대 같았다
* 셰익스피어 희곡 제목.
[심사평]
이번 제11회 김만중문학상 심사는 다양한 성취를 보인 한국 시단의 쟁쟁한 중견 및 시인들의 최근 시집이 추천되어 올라와 있었다. 이분들은 모두 우리 시단에서 남다른 위상을 점하고 있는 시인들이기 때문에, 그 성취의 높고 낮음에 차이를 두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매우 깊이 있고 탄탄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는 시인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성윤석 시인의 최근 시적 성취가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합의를 이루었다. 곧 그의 시편들이 강한 실험정신과 함께 보편적 인간 본질에 관한 사유를 두루 결합하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신인 가운데서는 박세미 시인의 개성적 시집이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성윤석 시인은 불안하고 유동적인 영혼의 순간을 통해 최종적인 삶의 차원으로서의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기록을 남겨주었다. 삶의 복합성을 승인하면서 시인은 단선적인 흑백논리나 계몽적 의지를 지우고 어떤 중간자적이고 미완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출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심연을 응시하고 있다. 단단하고 또 꽉 찬 시적 형상과 존재론이 미덥게 다가왔다. 이 시집에 얹힌 이번 수상이 그의 짧지 않은 시력(詩歷)에 상응하는 크나큰 격려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그런가 하면 박세미 시인은 부서지고 작아진 자아를 되비추고 또 일으키면서 자아의 익숙한 틀을 오히려 벗어나는 기막힌 균형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한 시대를 건너가고 있는 이행기의 한 젊은 시인을 만나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에 의해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시인으로서의 이력에 주어지는 첫 수상을 축하드린다.
거듭 두 분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면서, 두 분 수상자의 고유한 시적 연금술이 지속적인 진경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김언희(시인), 유성호(평론가, 한양대 교수, 글)
남해군이 주관하는 '제11회 김만중문학상'에서 조해진 소설가가 <단순한 진심>으로 소설부문 대상을, 성윤석 시인이 시집 <2170년 12월 23일>로 시·시조부문 대상을 받는다.
남해군은 지난 23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제11회 김만중문학상 심사위원회'와 27일 '제11회 김만중문학상 운영위원회'를 열고 당선작을 선정했다고 1일 밝혔다.
소설 및 시·시조부문 대상 외에도 신인상 부문에는 시집 <내가 나일 확률>의 박세미 시인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또한 시집 <심상>을 발간한 강달수 시인이 남해군 홍보와 남해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배문학특별상에 선정됐다.
시·시조 부문 대상을 차지한 성윤석 시인은 창녕 출신으로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아프리카, 아프리카' 외 2편의 시가 당선돼 등단했다.
묘지 관리 일을 하기도 했고, 1999년부터 서울에서 벤처기업 운영을 하다가 실패했다. 2013년 5월부터 한 해 동안 마산어시장에서 명태 상자를 나르기도 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시집으로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 묘지>, <멍게>, <밤의 화학식>이 있으며, 2017년 박영근작품상, 2019년 제4회 사이펀문학상 등을 받았다.
남해군은 서포 김만중 선생의 작품 세계와 문학 정신을 기리고 유배문학을 계승해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지난 2010년부터 매년 김만중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부문별 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2000만 원, 신인상·유배문학특별상 수상자에게는 500만 원의 상금이 각각 수여된다. 군은 7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시상식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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