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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프로 / 황병승

 

 

찬비를 맞으며 삼 일 만에 귀가했을 때 집안은 어두웠고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했지요.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우리는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석고가 부서져 날리는 새벽.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지... 당신은 살구를 한 번도 사 온 적이 없어...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 마음속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까... 당신은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오곤 했지, 나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데... 언제나 당신뿐이라고, 언제나 당신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어째서, 나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했을까..."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지요.

 

여자는 도시 사람답지 않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요. 내가 좁은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끄적이고 있을 때면 여자는 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건네며 덜떨어진 미소를 짓고는 했었지요. 나는 그때마다 다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두더지처럼 생긴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들을 만들자. 죽는 순간까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연연하고 고려하자.

 

그러나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녀의 두더지 같은 얼굴을 볼 수 없겠지요. 그녀가 건네주던 따뜻한 차와 간식도 더 이상 받아먹을 수 없을 것이고 그녀의 순박한 말투와 웃음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겠지요.

 

나는 계속해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술집의 나무 계단을 올라섰습니다. 내일은 프로, 내일은 프로. 중얼거리며, 말이지요.

 

 

 

 

제13회 미당 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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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황병승의 '실패'는 완벽한 도달의 이면 우리 시의 미래다

 

심사위원들은 장시간 논의 끝에 황병승 시인의 내일은 프로2013년도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하면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황병승은 시적 모험에 온몸을 내던진 젊은 시인들의 대표주자며, 이와 관련해 문단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고통스럽고도 힘찬 시어가 우리말의 표현 역량을 크게 높였으며, 우리 시 발전에 한 획을 긋는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 사람 시인 가운데 수상자를 포함한 네 시인에게 논의가 집중됐다. 김행숙 시인은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한 언어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들은 팍팍한 일상에서 늘 촉촉한물기를 얻어내곤 한다. 농담처럼 또는 방심한 독백처럼 시작하는 말은 아슬아슬하게 전개되던 논리가 갑자기 선회하는 지점에서 때로는 분노가, 때로는 경이가, 때로는 관능이 어른거렸다.

 

이수명 시인의 시는, 늘 그래 왔듯이. 현실과 상상의 접경을 기민하게 넘나들었다. 견고한 인식의 틀과 간명한 문장으로도 현실을 낯선 세계로 옮겨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인의 특이한 재능이다. 그의 일관된 탐구적 자세도 심사위원들이 짚고 가야 할 덕목이었다. 최정례 시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현실의 조각들을 이어 맞추어 또 하나의 현실로 끌어올리는 시법으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끌었다. 삶의 깊은 고통이 다듬지 않은 산문의 음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점도 그의 시가 다른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했다.

 

황병승은 말로 가능한 온갖 표현력을 동원하여 인식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주제에 천착하는 노력이 감명을 주었다. 그의 주제인 실패는 어떤 완벽한 도달의 이면이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그는 완전한 성공에도 실패하지만, 완전한 실패에도 실패한다. 인간조건으로서의 이 실패의 기록은 어떤 종류의 성스러운 자비심에 이른다. 미당문학상이 한국시의 주력을 이끌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면서, 그의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사인·김혜순·송찬호·이시영·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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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키스 / 황병승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

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말굽에 짓밟히듯이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불타는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덮쳤고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포켓 속의 움켜쥔 두 손에서 쿵쾅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서른 살의 가슴이

뿌리째 흔들렸나보다

 

창밖에는 때아닌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몰려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이

창가에 서서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혀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채찍에 휘감기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움켜쥔 두 개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른 두 볼에서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어느새 창밖의 눈발은 그쳤으며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마치 남자의 급작스런 퇴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포켓 속에서 간신히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라이터…… 라이터…… 라이터……

 

 

 

 

육체쇼와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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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39·사진) 시인이 도둑키스로 제11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한다.

 

시 전문 계간지 시현실’(발행인 원탁희)목마와 숙녀등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한 인제가 낳은 모더니즘 대표시인인 박인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올 문학상에 황 시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장 김언희 시인은 심사평에서 수상작 도둑키스는 구체적인 육체성을 띈 채 생생한 시의 현장에 입회하는 즐거움과 초재미를 주는 빼어난 시라며 이 무법지경의 즐거움과 초재미는 고만고만한 비탄과 개탄, 대오와 각성으로 짓무를 대로 짓무른 우리 시의 한 숨구멍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황 시인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 문예창작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3파라21’로 등단 후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등을 펴냈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6시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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