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키스 / 황병승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
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말굽에 짓밟히듯이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불타는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덮쳤고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포켓 속의 움켜쥔 두 손에서 쿵쾅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서른 살의 가슴이
뿌리째 흔들렸나보다
창밖에는 때아닌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몰려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이
창가에 서서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혀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채찍에 휘감기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움켜쥔 두 개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른 두 볼에서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어느새 창밖의 눈발은 그쳤으며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마치 남자의 급작스런 퇴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는 포켓 속에서 간신히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라이터…… 라이터…… 라이터……
황병승(39·사진) 시인이 ‘도둑키스’로 제11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한다.
시 전문 계간지 ‘시현실’(발행인 원탁희)은 ‘목마와 숙녀’ 등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한 인제가 낳은 모더니즘 대표시인인 박인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올 문학상에 황 시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장 김언희 시인은 심사평에서 “수상작 ‘도둑키스’는 구체적인 육체성을 띈 채 생생한 시의 현장에 입회하는 즐거움과 초재미를 주는 빼어난 시”라며 “이 무법지경의 ‘즐거움과 초재미’는 고만고만한 비탄과 개탄, 대오와 각성으로 짓무를 대로 짓무른 우리 시의 한 숨구멍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황 시인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 문예창작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3년 ‘파라21’로 등단 후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등을 펴냈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6시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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