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 나희덕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볼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줌
손톱 몇 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 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 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 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 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 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이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파일명 서정시
nefing.com
제19회 고산문학대상 수상자가 선정됐다. 현대시 부문에선 나희덕, 시조 부문에선 오승철 시인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고산문학축전이 열리는 10월11일 해남읍 연동 백련재에서 거행된다.
고산문학대상운영위측은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현대시와 시조 부문에서 각 100여 명의 시인을 고르고, 평론가들의 추천을 받아 심사에 들어갔다.
현대시 심사를 맡은 정현종 시인, 최승호 시인, 권희철 평론가는 최종심에 오른 5권의 시집들 가운데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를 올 고산문학대상으로 고르는 데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이 시집은 세월호 사건에 즈음해 “죽음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계에 강렬한 외침으로, 모두를 침몰케 한 슬픔을 부력처럼 끌어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주목됐다.
현대시조 부문은 비교적 젊은 세대의 심사위원들이 맡았다. 이승인 시인, 박현덕 시인, 황치복 평론가는 본심에 오른 5권의 시조집들이 각각 고유한 개성과 질적 수준이 뛰어나 수상자 선정에 고심했다고 한다. 긴 토론 끝에 오승철의『오키나와의 화살표』(황금알, 2019)가 시조부분 고산문학대상으로 선택됐다.
이 시조집은 제주 4·3사건이 남긴 상흔의 무늬들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현재적 삶에 예리하게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주목됐다.
고산문학대상운영위측은 제17회 이후, 크라운-해태의 후원으로 젊고 참신한 작품을 쓰는 등단 10년 미만의 시인들에게 신인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올해의 신인상에는 유순덕 시인의 시조집『구름 위의 구두』(고요아침, 2018)와 권민경 시인의 시집『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문학동네, 2018)가 선정됐다.
고산문학축전운영위원회는 최근 귀향한 황지우 시인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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