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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 권기만

 

 

얼굴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에는

다섯 마리 토끼가 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깡충깡깡충 뛰어다닌다

내가 우울하면 쫄쫄쫄 굶는다

 

다섯 마리 토끼가 뛰어다니는 얼굴을 보는 건

즐겁다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다면 틀림없이

맛있는 대화중이거나 사랑하고 있을 때다

소곤소곤은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다

 

한겨울에는 토끼도 어쩔 수 없이

말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잔다 봄이 오고

사방에서 꽃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 소풍을 간다

꽃 한 송이마다 한아름의 미소가 사는 걸 알아보는 건

토끼다 입 다물고 있어도 봄이 지나고 나면

살금살금 미소가 살쪄있다

 

소곤소곤 조곤조곤을 뜯다가 어른 토끼들은

구름 속으로 이사를 간다 큰소리는 토끼가

제일 싫어하는 풀이다 아이들 말은 토끼의 발

버짐 핀 듯 얼굴 왼쪽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새끼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발 달린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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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는 가끔 우주에서 날아온 별에 입술을 데이곤 한다. 꽃의 화기에 한동안 눈이 멀기도 하지만 그보다 바람의 꼬드김에 환장하는 날이 더 많다. 살갗에 별이 뜨는 날이면 달에서 파도가 친다. 산짐승 같은 어둠을 베고 잠들던 어린 시절에 내 영혼은 아직 멈추어 있다.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일은 언제나 상처다. 발전할수록 기억에 대한 훼손과 무례는 늘어난다. 돌아갈 곳을 만드는 일과 시 쓰기는 무관하지 않다. 문풍지의 떨림이 시의 긴장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기억이 저장된, 훼손되지 않은 영혼의 고향을 찾아 방황하는 현대인의 아픈 처지를 시가 담아낼 수 있다면 분명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복무하고 싶다는 바램을 오래전부터 품어 왔다. 그러나 떠밀려 억지로라도 건너야 하는 시대에서 개인의 저항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동시대의 아픔을 나누겠다고? 그러나 그러한 고뇌가 시를 관통하지 않으면 그 시는 공허하다. 그것을 앓아야 건강해지는 영혼이 있단 걸 시를 쓰면서 깨달았다. 시를 향한 고뇌가 훼손되지않은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비록 아직 그 길을 온전하게 찾아내진 못했지만 그 희망을 발견했다는 것으로 이젠 용기를 가지려고 한다.

 

투고해놓고 제 의 허약함에 놀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일에 용기를 내어서 걸어가보라고 손을 들어주신 강은교, 이경림, 권혁웅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문학 부흥에 앞장 서 주신 지리산문학회와 시산맥 관계자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동리목월 김성춘, 구광렬, 손진은 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시작나무, 시와사람들 그리고 언제나 한몸처럼 응원해준 영남시 동인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신인상 심사평에서는 흔히 '신인다운 패기'를 심사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사실 이 기준에 따라 신인을 고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신인상은 입사(入社)의 관문이고,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비슷해야지 달라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패기란 신인의 숫기 없음을 격려하거나 거친 솜시를 에둘러 말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사정이 달랐고, 심사위원들로서는 그 점이 기뻤다. 10명의 본심자(강두원, 강태승, 권기만, 남상진, 박광석, 박선희, 박은석, 이기호, 임원혁, 전영) 중에서 세 명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박광석의 시들은 오랜 수련의 흔적을 품고 있다. 호흡도 안정되어 있고,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도 탄탄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안정과 탄탄함이 약점이다. 생각이 제재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표현이 흔한 투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좋은 시와 비슷하다는 것만큼 시에 해로운 것도 없다. 근사(近似)하다는 건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박선희의 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때 시적인 정념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간주되었던 구절들이 있다. "바람의 행진" "지문 위 실핏줄" "몸에서 자라는 산" 같은 구절이 그런데, 모두 이 응모자의 시에서 뽐은 구절이다. 이런 구절은 정념을 담는 게 아니라 흩어버리는 역활밖에 하지 못한다. 잘 표현된 상념일수록 타협의 산물임을 명심해주셨으면 한다.

 

서두에서 말한 패기를 권기만의 작품에서 발견했다. 능청스레 풀어가는 입담 너머에서, 삶에 관한 통찰이 오롯이 빛난다. 무엇보다도 '그럴듯함'의 흉내를 내지 않은, 생활세계에서 길어 올린 정서가 작품마다 배여 있다. 동거처럼 미소 짓게 하는 작품에서 설국처럼 둔중한 슬픔을 안은 작품까지, 그 정서의 폭도 넓다. 수상을 축하드리고, 패기 있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강은교(시인), 이경림(시인),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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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 명의 투고작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으나, 안타깝게도 당선작을 고르지 못했다. 시인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일정한 수준과, 신인을 맞을 때마다 찾게 되는 참신함을 만족하는 작품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작품은 장선희, 최재영, 이일학, 김영경 씨의 작품이었다.

 

장선희 씨는 하나의 풍경을 다른 풍경과 접붙여 읽어내는 데 장기를 갖고 있다. 다만 그렇게 치환된 풍경마저 처음 풍경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게 약점이다. 시에서의 변환은 새로운 존재로의 비약이어야지, 단순한 고쳐 쓰기여서는 안 된다.

 

최재영 씨에게는 그런 비약이 있다. 그런데 그 비약을 설명하고 부연하고 또 설명하고 만다. 그건 비약이 시 내부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글쓴이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났다는 얘기다.

 

이일학 씨의 작품에는 품격이 있다. 진지하고 성실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진지함과 성실함이 시를 아주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 전생, 모정, , 순결같은 어휘가 진지한 고민의 결과였는지를 숙고해주시기 바란다.

 

김영경 씨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이런 단점에서 많이 비켜나 있다. 특히 '달동네로 가요'에는 경쾌한 페이소스와 다정한 음악이 공존하고 있어서, 눈길을 붙잡는다. 그런데 응모한 시들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시적인 상투어에 너무 자주 기대는 점도 불만이다. 상투어들의 잦은 출몰은 고민의 부족을 증거하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했으나, 성급하게 당선자의 이름을 드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성숙을 기다리는 것이 김영경 씨 본인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전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니, 다들 빼어난 시인들이다. 오늘의 아픈 결정이 이 상의 전통을 더 빛나게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응모해주신 분들께도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올린다.

 

심사위원: 유성호 문학평론가. 정끝별 시인. 권혁웅 시인, 문학평론가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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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나루* / 박정수

 

 

노을은 흐르는 강의 내력까지 잡아 삼켰다

백년 전

이곳의 흥정물은 소금이었다

굽이굽이 싱거워진 삶의 내력을 돋구는 데엔 소금이 제격이었다

때로 가뭄에 콩 나듯 오지 않는 기다림을 움켜쥔 채

몇몇은 쉽사리 불어나지 않는 강심을 애태우기도 하며

새벽 가까이 포구의 안쪽을 헤매었으리라

梨浦나루

東西간의 교류가 남한강을 묶어놓았던 곳,

상인들의 흥정은 멀리 장호원까지 들릴 듯 끊어지지 않았고

내 가계의 내력도 그곳에서 시작되었음을 저 강은 알리라

 

강은 거울이다

무수히 변화된 일상들을 비추며 희부연 기억 하나도 놓치지 않는,

오랜 세월

침묵의 깊이만 어루만지고 있는 강은 금이 가지 않는 거울이다

할머니의 손맛은 川西理를 낳았고

그 기억의 맛은 강을 따라 서해 어느 비린 항구까지 닿았음을

소금들의 내력은 거슬러 거슬러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젖은 강에 손을 디밀면 그때의 흥정소리 지금도 만질 수 있다

 

* 소금이 교역되던 곳

 

 

 

 

봄의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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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폭염은 나의 흔들림을 무채색으로 돌렸다.

 

팔월에 받은 한 통의 전화에 땡볕처럼 숨이 막혀왔습니다. 시 쓰기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받은 전화, 자꾸만 소리가 멀어지듯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이젠 더 이상 불 꺼진 방에서 울지 않아도 되겠지요. 메아리 없는 응모에 쓰인 지난날의 나의 이름들, 지금까지는 시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시의 힘이 되는 올곧은 선비의 정신으로 시심을 키우겠습니다. “안으로 숨 가쁘게 넘어가는 진공의 채널을 가져라하셨던 박경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금광저수지에서 쉽게 식어버리는 자판기 커피를 오래도록 비워내며 펼쳐 가던 시심을 언제나 한 발 늦게야 담아내던 모자란 저를 믿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의 길이 멀었던 것처럼 스치는 얼굴 또한 많습니다. 부족한 문학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시는 정제한 교수님, 슬픈 일, 기쁜 일, 늘 함께 하는 안성문학회 사랑하는 문우 여러분, 말 없이 뒤에서 지켜준 남편,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 아들 딸, 칠순이 넘은 부모님……. 모두 눈물입니다. 호흡이 늘어지고 있을 때 파장을 주신 심사위원님께 초심의 자세로 가겠다는 다짐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삼년 전 세상을 떠나신 사랑하는 어머님, ()한일심 여사께 이 기쁨을 올립니다.

 

 

 

 

[심사평]

 

우리 시단의 새로운 등용문인 최치원 신인문학상에는 65분의 455편의 시가 응모됐다. 이는 양적으로 보아 시 전문문예지 투고 작품의 수준이다. 이들 작품 역시 지리산 문학회에서 예심을 보고 10분의 시가 모두 이름을 가린 채 본심에 회부됐다.

 

소리 미술관’‘김씨와 함께 늙어가는 것1’‘소설을 쓰다’‘눈이 부시다’‘143버스’‘아버지의 시계’‘딸꾹질놀이’‘에스컬레이터’‘강물형무소’‘이포나루가 그 표제작들이다.

 

본심작품 수준 역시 시 전문 문예지 수준에 못지 않았다. 그러난 단 한 분의 신인을 모시는 자리여서 심사위원이 숙독하여 각각 1편씩의 작품을 정하기로 해서 강물형무소이포나루가 최종심에 남았다.

 

강물형무소를 투고한 시편들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가작(佳作)이 많았다. ‘홍어’‘문상을 다녀오다’‘방파제 은하수등이 그러했다. 특히 홍어의 경우, 만만찮은 입담이 출중했다. 시를 끌고 가는 힘에서 오랫동안 시와 싸워 온 저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포나루는 단정한 시편들이었다. 꼭 필요한 것만 제 자리에 놓여있는 깔끔함은 군더더기가 없는 서정시의 진경을 보여주었다. 이 역시 오래 씨를 다듬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강물형무소는 보내온 시편에는 옥석이 섞여있었고, ‘이포나루는 어느 한 편 나무랄 작품이 없어 완성도에서 앞선 이포나루를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의 자리에 모셨다.

 

이포나루는 좋은 시들이다. 5편의 작품으로도 시인의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문장을 절제할 줄 하는 힘이 시의 힘이 되고 대상을 보는 치밀한 시선이 시의 눈이 되고 있다. 최치원 신인문학상을 문학의 발판으로 삼고 더 높고 더 넓은 시로 나아가길 바란다.

 

당선하신 분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투고하신 많은 분들에게는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는 좋은 인연이 있길 바란다.

 

심사위원 송수권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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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너덜겅이 / 한영숙

 

 

흔한 돌덩이가 비탈에 모여 슬픈 소리를 낸다

 

촌 어미의 딸아이가 묻혀서 애기무당 굿 소리 아득하다

 

는개로 떠돌면서 고깔모자 삼색 옷 걸치고 백무동계곡 오르고 내린다

 

뭇별들 피고 또 슬그머니 진 자리 꼬리치레도롱뇽의 시월이다

 

서어나무 마르고 뒤틀린 잎에도 초하루 아침이 풀린다

 

웅크리며 애 터지던 한 권의 말은 차례대로 입을 다문다

 

누군가 있어 높고 쓸쓸하게 죽어간 길

 

땀 냄새 긴 거름 냄새 싸드락싸드락 밟아 간다

 

 

 

 

얼룩무늬쐐기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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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상] 오븐 / 이혜미

 

여행자 하나 사막을 걷는다

스위치를 켜자 태양이 나른한 오후를 달구고

지친 여행자는 허공을 짊어지고 서서

목적지를 잊은 사람처럼 머뭇거린다

원근법으로 그려진 모래사막 캔버스 위에

물결무늬가 새겨진다

사막은 모래로 그려진 점묘화다

공기조차 모래빛이 스며든 듯한 폭염 속

목마른 발자국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다

메마른 붓터치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든 몸속 한 방울 물기까지

꼭 짜내어 가지고 간다

몇 겹으로 덧칠된 고요 속에서

낙타의 아몬드색 눈과 마주쳤을 때

침묵으로 노래하기 시작하는 사막

문을 열자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의 파편, 채도 높은 한낮의 구도 속으로

휘몰아친다 바삭하고 담백한 죽음

식탁에 올려놓자 사막 속에서

닭 한 마리 천천히 걸어 나온다

 

 

 

보라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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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를 포함하는 문학이 제대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시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쓴 응모작품들을 읽고 아직도 문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시들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시적 소재를 찾아 그것을 삶 속에 올곧게 자리매김하려는 시정신은 높이 평가해도 좋으리라 파악되었다.

 

<무우> 9(한명숙)은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여러 사항을 진솔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다만 그 시적 표현이 다소 거친 것이 흠이고 보다 치열하게 생활에 임하는 시인의 정신이 돋보이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오븐> 4(이혜미)은 잘 짜여진 시편들이다. 무엇보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 특히 <오븐><저문다는 것>에서 읽을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은 높이 살만 하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만으로 좋은 시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시적 기교만이 아닌 온 몸으로 시는 써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당선이 아닌 심사위원 추천 우수작품상으로 <오븐> 4편을 천거한 것은 시를 다루는 솜씨의 아까움이 이후 치열한 시정신을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보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덜겅이> 4(한영숙)은 시적 소재를 전원에서 찾고 있는 독특함을 보인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 십상인 어줍잖고 평범한 사물들을 삶의 예지와 아우르는 날카로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진부한 것을 새롭게 관찰하고 있는 한영숙의 시들은 좀 엉성하기는 하지만 참신하고 새롭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질박하고 순수한 격조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1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천거하는 까닭이다.

 

심사위원 최동호(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김선학(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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