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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 / 박청환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팅기며 목놓아 울어대는 통에

십 리 오솔길 급기야 어미가 동행했다

 

장날 마실 가듯

어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 냄새 맡다가

나비 좇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라 겅중겅중 뛰어와

마른 젖통 툭툭 치받던 길

 

아가, 주인 인상 좋아 뵈더라

외양간 북데기도 푸짐하더구나

말 잘 듣고잘 살거라

 

낯선 외양간에 울음 떼어 놓고

돌아선 울음

달빛 앞세워 새끼 발자국

되밟아 오는 길

 

큰 눈에 별 방울 뚝뚝

 

 

 

 

[당선소감] 뜨거운 용광로 보다 따뜻한 화롯불 같은 시 쓰고파

 

좋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늘 생각했습니다. 기술적으로 화려하거나 심오하게 어렵거나. 이 둘은 일단 내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내게 남은 건 작고 쉽고 가난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좋았습니다. 작은 것일수록 진심을 꽉 채워 담을 수 있었고 가난할수록 따듯했습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거대한 용광로보다 고구마를 묻어 놓고 둘러 앉아 부젓가락 헤집으며 가래떡을 구워먹는 화롯불 같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등단이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옥천문화원, 동양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물에도 입이 있다는 것과 그 입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시인의 몫이라는 걸 알게 해 준 마경덕 시인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동료이자 선배이자 영원한 글쓰기 멘토인 이한주 시인, 아니 한주형! 고마워요. 오진엽 시인이 그랬던가요. 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내게도 그래요.

 

마지막으로 책 본다고, 글 쓴다고 툭하면 방문 닫고 처박히는 아빠와 남편을 그런대로 방치(?)해 준 두 아들과 마눌님, 고맙고 사랑합니다. 감사할 사람이 많은 나에게 또한 감사합니다.

 

 

 

 

 

 

[심사평] 비백과 약졸의 솜씨가 빼어난 작품

 

27회 지용신인문학상은 316명의 응모자가 총 2120편의 작품을 보내와서 어느 해보다도 양적으로 풍성하였다. 이렇게 시인지망자가 폭발적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현상은 현대사회가 아무리 물질만능의 시대이고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정보만능의 시대이지만 인간이 지닌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는 오히려 더욱 소중한 정신적인 가치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현대시사의 드높은 봉우리인 정지용 시인의 시적 성취는 이미 우리 민족이 지닌 원형적 상징으로 만고불변의 역사적 사실이 된 지 오래다. ‘지용신인문학상은 지용이 도달한 문학적 가치를 되새기면서 그가 이룬 모국어의 시적 성취 앞에 겸허히 경배 드리는 시인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메밀묵밥’(윤영규), ‘구름 수선소’(최영희), ‘버슨분홍빛 소풍을 마치며’(문예진), ‘저 오름으로 가’(김미경)배웅’(박청환)이 최종까지 논의된 작품이다.

 

메밀묵밥구름 수선소는 시창작의 전형적인 답안처럼 단정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개성적인 파격이 안 보여서 아쉬웠다. ‘버슨분홍빛 소풍을 마치며저 오름으로 가는 개성적인 기교가 돋보였지만 그것이 시의 핵심과 만나 조응하는 시적 의미가 모호하고 평범하였다.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배웅은 너무 쉽고 무덤덤한 작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잠깐 호흡을 멈추고 찬찬히 읽으면서, 어미 소와 송아지의 울음과 눈물이 행간에 숨어서 시의 영혼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알아채면 깜짝 놀라게 된다.

 

손끝의 기교만을 뽐내면서도 실상 시적인 알맹이가 부족한 작품들에 비하면,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 노래한 지용의 시세계를 지그시 눈을 감고 연필로 그려낸 원근법(遠近法)이 예사롭지 않다. 비백(飛白)과 약졸(若拙)의 솜씨가 긴 여운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오탁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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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인드라망 / 이선

 

 

차 한 잔 들고 창가로 가면

맞은편 101동이 성큼 다가온다

먼 나라에서 내려오신 함석지붕들

푸른 하늘 모래알 이야기를 받아 적느라

자글자글 삼매에 빠졌다

꼼꼼하게 써 내려간 경문들

구절구절 기왓장마다

흐르는 법문이 팔만이겠다

이렇게 우리 마주 보는 거울이듯

모든 동과 세대들

주고받는 선문답이 무량이겠다

구구절절 날아드는 비둘기들

벽에 갇힌 창문들도 틈틈이 귀를 열고

질서정연하게 밖으로 향해 있다

한 치 흔들림 없는 수평의 감각으로

층층이 견뎌내고 있을 천장들

모두 하나같이 바닥으로 존재할 터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

아래층에서 받쳐주듯

위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

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

누겁의 업장을 녹이듯

하루하루 달게 받들어 모시는 일

삼키고 삼켜도 끓어오르는 솥단지 삼독을

식어 버린 한 모금의 찻물로 달래는 지금은

녹음이 독물처럼 퍼져나가는 상심의 계절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들

수미산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 인드라망: 인드라(인도 신화의 천신)가 사는 궁전에 쳐져 있는 그물. 부처가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

 

 

 

 

[당선소감] “하루하루 견뎌내야 하는 일에 대한 시 쓰고파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고군분투하는 삶의 진실 앞에 누구나 절대적인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동네 작은 공원을 찾아 걸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동무들과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먼저 생기 가득한 화원 한 귀퉁이에 매어 체념한 듯 짖지 않는 개의 하루에 대해. 길머리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철부지처럼 피어 있는 꽃. 대책 없이 퍼져 나가는 신록의 잎사귀들. 개천가에 이르면 켜켜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처박힌 채 생을 건너고 있는 크고 작은 돌부리들. 뿌연 하수 물도 푸른 은하수를 찾아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존재의 진면모란 티끌 하나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별들도 반질반질 자기 궤도를 닦으며 돌고 도는 일. 어둠 속을 떠도는 외톨이별에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잊지 않는 일. 그의 등 뒤에서 잠시 불 밝혀 주는 일. 우주라는 망막한 거소에서 밥을 나누며 그렇게 우리 함께하는 사이. 거기 진땀을 흘리고 좌절하는 일.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앉아 고배를 마시는 일. 밤하늘 금송화처럼 피어나는 별을 바라보며 일어서는 일. 하루하루 다만 견뎌내야 하는 일에 대해 더듬더듬 쓰고 싶다.

 

무엇보다 졸작을 뽑아주신 유종호 선생님과 오탁번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용신인문학상에 성원을 아끼지 않는 동양일보와 옥천문화원, 옥천군에도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또 외롭게 글을 쓰며 좋은 시를 출품했을 많은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평] 따뜻한 삶의 모습 형상화놀랍도록 참신해

 

지용신인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해마다 더해가는 것 같다. 올해 응모자는 300명을 훌쩍 넘었고 응모작품은 한 사람이 열편 스무 편도 응모한 경우를 포함해서 2000편에 육박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요즘 날로 더해 가는 시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당선의 영예를 놓고 겨룬 작품은 염종호의 금강초롱’, 윤계순의 그늘들은 가볍다’, 이선의 아파트 인드라망이었다.

 

염종호의 작품은 아주 정밀한 시적 장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내딛는 시창작 주체의 치열성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관습적인 창작 방법을 탈피하여 과감하게 만의 시세계를 발견해 나갔으면 좋겠다. 윤계순의 작품은 느티나무그림자의 대조를 개성적으로 형상화한 시적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느티나무 그늘이 일렁거리는 모습을 온갖 사건 사고를 보도하고 비평하는 일간지의 페이지와 비교하는 재치 있는 수사가 너무 작위적인 비유라는 점이 아쉬웠다.

 

당선의 영광을 안은 이선의 아파트 인드라망은 신인이 지녀야할 독창성과 새로운 시창작 방법을 고루 갖춘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햇볕 밝게 비치는 아파트의 지붕과 창문들의 풍경을, 엉뚱하게도 제석천의 궁전 위에 펼쳐진 보배구슬 그물인 인드라망으로 순간적으로 기막히게 변용시키고 있다. 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가는 따뜻한 삶의 모습이 곡진하게 형상화되고 있는 놀랍도록 참신한 작품이다.

 

우리 삶이 아무리 고되고 험난할지라도 시인은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를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이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아래층에서 받쳐주듯/윗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지녀야할 시 의식의 첫째 자리가 되는 것이다.

 

심사위원 오탁번 시인, 유종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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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 / 김혜강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사철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얀 마을에는

기억으로 가던 길들도

눈으로 덮이어

옛날마저

하얀색이다

눈이 소복

쌓이는 마을에서

온 몸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어머니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림을 지우고

지우고 그리신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

바구니에 담을 추억도

색연필 같은 미래도 없어

하얗게 어머니는

수시로

태어난다

 

 

 

 

어머니의 마을에는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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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낯선 전화번호가 뜨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광고 전화일 것 같아 받지 말까 하다 받았더니 당선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오래전부터 공정하게 실력을 가리는 공모전에 당선한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노력하며 도전했지만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좌절과 실망의 해와 달이 수없이 뜨고 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들이 시작(詩作)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는 내면에 있는 수많은 자아를 찾아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과 신비로 가득 찬 우주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을 조금씩 넓혀주는 마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은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시작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 그리고 고독하고 아름다운 시의 길을 함께 가는 문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준 동양일보와 옥천문화원, 그리고 옥천군과 심사위원 선생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지용신인문학상이라는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쓰겠습니다.

 

 

 

[심사평] 절제된 언어시적 변용 솜씨 알차

 

25회째를 맞는 지용신인문학상에는 올해도 경향 각지에서 300명이 넘는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작품을 응모했다. 응모작이 해마다 증가하는 일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어느새 이토록 역동적인 시인공화국이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를 너무 안이한 태도로 쓰는 습관이 왜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 하는 우려도 숨길 수 없었다.

 

시는 썼다가 다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다시 말짱 지우고, 종단에는 백지만 남는, 지우기(delate)만 남아있는, 하얀 공백 위에 피어나는 핏빛 꽃봉오리여야 하거늘, 어쩌자고 이렇게 산만하고 지루하게 무작정 길게만 쓰는 것인가.

 

당선작 알츠하이머’(김혜강)는 아주 단순한 소묘 같지만 그 안에 숨기고 있는 시적 변용의 솜씨는 얄밉도록 알차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안쓰러운 마음을 직설적인 토로와 절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 못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절제된 언어로 표출해낸 빼어난 작품이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 뿌리경전을 읽는 저녁’ (문순희), ‘김딸막 할머니의 국어시간’ (장현숙), ‘담쟁이’ (김은유)도 알맞은 시적 상상력을 잘 형상화해 흥미로운 시적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너무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이는 게 흠이었다. 어느 정도 시창작의 방법을 터득한 후에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개성화하여 독창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지용은 한국 현대시사의 서문이요 본문이다. 이토록 장엄한 현대시사의 현장 속으로 달려오는 지용신인문학상응모자들의 시적 성취가 날로 향상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오탁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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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골목 / 박한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 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 되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난폭하진 않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말고 숨어버릴지도 몰라요

쫑긋 세운 옥상들이 바람을 듣고 있습니다

 

 

 

당선소감

 

흘러가는 강 위로 눈이 다 내렸습니다. 두 손을 빼지 못했던 날들이 많이 허물어 진 것 같습니다. 서성인 옥상에서 다 자라지 못한 시들로 새집을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서기엔 둥지가 조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골목을 걸었습니다. 문 앞 눈을 치우는 순한 사람들과 혼자서 비어있는 의자들, 오래도록 누추한 우편물까지 부축해준 모든 것들에 고마웠습니다. 이제 골목을 빠져 나와 더운 무릎을 펴 볼까 합니다.

 

먼저 많이 부족한 제 시를 선택해 주신 유종호 선생님과 오탁번 시인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명의 시인은 하나의 정부라고 자긍심을 심어 주신 이영진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제나 시로 깊은 감동과 부족함을 일깨워 주는 김일영 시인, 허은실 시인, 정노윤 시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그녀, 그리고 함께 수학해온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참신한 시적 상상력

 

올해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지용신인문학상의 등용문을 두드렸다. 이처럼 등단을 꿈꾸는 예비 시인들의 열의는 해가 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 시대가 주는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원형적인 시창작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시사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지용도 시인이 살았던 시대가 주는 불안과 절망에서 일탈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으로 시 창작을 했을 것이다.

 

순한 골목’(박한)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순한 골목은 사물을 보는 따듯한 시선이 동심의 눈을 통하여 알맞게 시화되어 있다. 마치 골목대장 노릇하는 아이처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솜씨가 놀랍다. 사물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를 참신한 상상력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풍차의 집’(박선희), ‘모래시계’(김동연), ‘먼 산’(김정식), ‘다비’(박소미)등 이었다. ‘풍차의 집모래시계’, ‘먼 산은 시적 구성과 심상의 전개가 믿을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냥 무난할 뿐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다비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시적 구성이 주제와 이완되는 부분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오탁번 시인·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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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부는 아침 / 강성원

 

 

붉은 바닷가의 집

녹색 커튼을 살며시 열어보는 아침 해

내려다보는 백사장엔 모시조개가 제 살을 비우고

날아오를 듯 흰나비로 앉아 있다

먼 길 가려는 바람은 물너울을 타고 온다

모래톱 위를 종종종 걷는 물떼새

안개는 빨판을 달고 배 한 척 붙들어 놓지를 않는다

 

길을 내려가 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손바닥

잠든 바위를 깨우다 시퍼렇게 멍이 다 들었다

파도는 모래사장에 음표를 새겨두고

도레시 라솔미 오르내린다

바다가 들려주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악

사랑이란 단어를 적어 넣으면

오선지 위에서 저토록 따뜻하게

꽃으로 피는 말이 있을까

 

바다를 향해 걸어가다

, 그만큼의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해안선

메꽃이 피어 호른을 분다

맨 처음 입술을 열 때 첫사랑이 저랬을 것이다

한 잎 수줍은 입술이 파르르 떨다

천천히 입을 오므린다

 

 

 

 

[당선소감 낮은 곳에 눈길 두고 희망 노래하는 시인 되고파

 

오월의 하늘 아래 빛들의 산란이 꽃처럼 눈부신 이 봄날 무뎌진 시상과 각이 흘러내리는 어깨 위에 기꺼이 죽비를 내려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 지용신인문학상 운영위원회 관계자님들 그리고 동양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써오는 동안 이곳저곳 등단이라는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되뇌면서 견뎌왔기에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연이 맺어진 찬·민 두 아들과 아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다시 일어서서 이 길이 내 운명임을 알고 생이 끝나는 날까지 깊어지고 멀리 가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무작정 문학공부를 시작했지만 내 시의 첫 발원지이자 큰 바다라 할 수 있는 젊은 날의 해맥문학동인들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시는 지금의 문우님들께도 시로써 아침 인사를 드립니다.

 

제 시가 이제 막 피어나는 들꽃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의 무게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눈가에 슬픔도 없이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알맞은 시적 변용·언어 묘미 잘 살려

 

해조음 들려오는 한적한 바닷가 정경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솜씨 놀라워

독창적 시적 구성·참신한 이미지 전개

신인작품 범주 뛰어넘는 대단한 성취

 

올해 지용 신인문학상 응모작품을 심사하면서 새삼 정지용 시인이 우리 현대시사에 끼친 상당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시의 위의와 품격을 누구보다 강조한 지용은 갑남을녀가 쓰는 생활어를 빼어난 시적 언어로 재구성하여 당대에는 물론 그후 오늘날까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는 드높은 높이까지 밀어올린 현대시사의 상징적 시인이 되었다. 지용은 청록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모든 시인 지망생에게 하나의 교과서 같은 문법을 제시해주었고 우리 현대시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해 온 것이었다.

 

해마다 방방곡곡에서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하는 수백명의 신인들도 지용시가 지닌 이러한 문학사적 가치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용신인문학상이 흔히 있는 하나의 문화행사를 뛰어넘어서 오늘 이 시점의 문학적 역량을 살피고 우리 현대시의 수준과 안목을 표출해주는 중요한 문학적 이벤트가 된다는 점은 여타의 신인 문학작품 현상모집과는 뚜렷하게 변별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최종적으로 논의 된 작품은 호른 부는 아침’(강성원/여수), ‘나이테’(박성수/광주), ‘소나무 방정식’(오정숙/서울), ‘말수’(신용대/대전) 네 편이었다. 다 나름대로의 개성과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으로 습작의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이 가운데서 강성원의 호른 부는 아침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이 작품은 아주 알맞은 시적 변용과 언어의 묘미를 잘 살린 탁월한 수준이어서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다. 해조음이 들려오는 한적한 바닷가의 한 정경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 떼면서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놀라운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제 살을 비운 모시조개-물너울을 지나 부는 바람-모래톱 위의 물떼새-찰싹찰싹 대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가 그리는 모래사장 위의 오선지와 음표들- 호른을 부는 메꽃’. 이와 같은 독창적인 시적 구성과 참신한 이미지의 전개는 신인작품의 범주를 뛰어넘는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쉽게 당선권에서 밀려났지만 나머지 세 분의 작품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나이테소나무 방정식은 반듯하고 정직하게 시적 진실을 토로해주고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했지만 시적 여운 같은 게 없이 너무 곧이곧대로 시의 주제를 표면에 내세워서 아쉬웠다. ‘말수(唜樹)’는 아주 독특한 상상력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이채로웠다. 제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나무라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시의 주제가 잠언적인 관념 속으로 함몰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들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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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 한진수

 

 

상처입은 찌르레기 지저귀고

별들은 울고 또 서럽게 울고

 

봄이 오면 불어오는 산들내음을 나는 사랑했네

비둘기와 따스한 햇살을, 꽃다발을

그러면 나는 해가 빛나는 호수처럼 너를 사랑해

너는 말없는 포플러 나무처럼 편안하지

 

밤이와 그 자리에 찌르레기 지저귀고

별들은 다시 아프고 서럽게 울고

 

순진했던 나는 믿었네

언젠가 아름다운 별빛은 삶을 구원하리라고

그래서 고요한 봄의 포플러와 같은 너를 사랑했네

 

싱그런 봄바람처럼

싱그런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너를 사랑했네

 

순진하게도 나는 믿었네

별빛이 삶을 구원하리라

내 가슴 속의 노래하던 새가 죽고

악기의 현이 끊어질 때까지

 

 

 

 

사슴 브로치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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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사랑과 예술의 아름다움 적은 시독자들에 미스터리로 남았으면

 

소식을 듣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라일락향이 번집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바람은 모든 나무가 봄 속에 나부끼게 하였고 나는 나의 별빛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축하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친한 친구 하나가 죽었습니다. 시 쓰는 건 그만두고 취미로 한다니까 계속 써보라고 독려해주던 친구였습니다.

 

전화기 너머 기침은 환풍구에 곰팡이가 슬어서 그렇다면서 지병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학문적 길잡이가 되어주신 강원대 인류학과 김세건 교수님과 임봉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심사평] “주제 쉽고 담채화처럼 그려신선·풋풋한 느낌

 

응모작품수가 지난해에 비해 배나 되어 우선 기뻤다. 수가 늘어 반드시 좋은 작품이 뽑히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용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사실만도 기쁜 일이다. 실제로 좋은 작품도 예년보다는 많았다. 그러나 응모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올해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쉽게 읽히지 않는 답답한 시들이 많다는 점이 그 첫째로, 우선 주제가 너무 무거워 시가 주제 밑에 깔려 숨을 못 쉬는 느낌의 시가 많았다. 또 시란 이렇게만 써야한다 라는 고정관념도 심해 보인다. 억지스러운 비유가 많고, 마치 그것을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이거나 재담으로 생각하는 듯한 경우도 많았다.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활달한 발상이 시를 가장 시답게 만든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 학도들이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시 공부는 비단 시 쓰는 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일이 더 큰 공부가 될 수도 있으니, 좋은 시를 볼 줄 모르고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응모작 중 먼저 눈에 띈 작품은 포플러’(한진수)로서, 우선 신선하고 풋풋해서 시가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요즘 신인들이 즐겨 택하는 심각한 포즈에서 멀리 벗어나 가볍고 얼핏 보면 쉬워 보이는 주제의 선택도 시를 크게 살리고 있다. 또 이 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이미지의 어둡고 밝음의 조화로서, 이것이 시에 리듬감을 더하고 있음은 크게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른 봄날의 담채화 같은 쌈박하고 시원한 시다. 우윤미의 계절의 너8편은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단시들로, 굳이 분류하자면 벌과 같이 작지만 꿀과 침을 다 가지고 있는에피그램 시라 하겠다. 비유도 놀라운 데가 있고 위트도 대단했지만, 한두 편만을 뽑을 수도 없고 모두를 당선작으로 할 수도 없어. 역시 당선작으로는 부적절하게 생각되었다. 한아민의 그게 사랑인 줄 몰랐던 거야는 첫사랑을 노래한 담백한 서정시로 억지도 없고 속도감도 있는 시였지만 무언가 조금 모자란다는 느낌이었다. 좀 더 정리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이상의 시 가운데서 한진수의 포플러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그 시가 오늘의 우리 시가 가지고 있는 답답함을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도 가졌기 때문임을 말해 둔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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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 / 배정훈

 

 

세죽細竹이 늘어선 마을 어귀

어린 백구가 강동거리며 뛰놀고

주인 모를 고깃배들

붉고 푸른 깃발이 비늘처럼 결을 타고 운다.

수족관마다 산호珊瑚 마냥 쌓인 게들

울긋한 소주 향내와 같이 타는 겨울 바다

더불어 붉어지는 한 세상을 지켜보며

술 취한 어부들

때로는 수줍었고 번잡했던

삶의 그물을 거둔다.

바다야 온전하겠지만

바람 많은 동네에 터 잡고 낚는 세월은 고래처럼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

부네 손등에는 손금이 놓이고

짓지 않아도 될 쓴 근심이 수의壽衣처럼 짜였더라.

창자처럼 이어진 골목들

일렁이는 불빛들

애 끓는 단장斷腸도 한 시절인데

창을 두드리는 주먹 쥔 해풍海風

부대끼는 댓닙 그 새로

 

바다의 눈시울이 붉다.

 

* 경북 울진군의 한 지방

 

 

 

 

 

[심사평]

 

올해에는 응모작품수도 예년보다 많고 뛰어난 작품도 많이 눈에 띄어 심사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심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과연 배정훈의 죽변’, ‘’, 이가은의 이명(耳鳴)’ 등의 작품이 발견됨으로써 심사자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죽변은 자칫 평범한 서경시로 떨어질 소재다. 물론 이 시는 한 아름다운 바닷말을 그린 서경시로 읽어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맛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아름다운 바닷마을 모습을 통하여, 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기쁨과 슬픔을 보여 준다. 과장된 표현이나 작위적인 비유가 없는 것도 시의 품격을 높인다. 시가 막힘없이 읽히는 것은 그에 걸맞는 리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은 소품이지만 어느 한 구석 빈 곳이 없는 말끔한 시다. 어쩌면 시는 이처럼 아무 것도 얘기하는 것이 없으면서 많은 얘기를 할 때 더 좋은 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시는 종종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려다가 시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이 시가 당선작이 될 때는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모자라는 작품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다.

 

이명(耳鳴)’은 아주 유니크한 시다. 시형식도 시어들도 신선하다. 요즘 투고시 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일정한 전제를 앞에 놓고 연역적으로 그것을 풀어가는 것 같은 형식이거나 그 변형인 것들인데 투고시편중 한 편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이 투고자가 이른바 시창작강좌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증좌 같아 반갑기도 하다.

내용도 진부한 도덕주의나 속보이는 시민공동체주의 같은 것은 멀리 벗어던지고 있어 신선하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고 할말을 다 하는 활달함과 당당함도 마음에 둔다. 당연히 당선작이 될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선자들은 죽변이명(耳鳴)’ 두 작품을 놓고 토의 끝에, ‘이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죽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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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미술관 / 이상은

 

 

로트렉의 말이 웃고 있다

샤갈의 닭이 울고 있다

칸딘스키는 알 수 없는 음악을 연주한다

마티스는 수줍음을 숨기고 강렬하다

 

바에서 만난 남자가 전시회 티켓을 주었다

 

친구에게 자랑하며 찾아간 덕수궁은 겨울 날씨에 치여 쓸쓸했다

 

내가 걸려있는 벽이 보이는가

사람들은 날 보지 않고 지나간다

봐주세요, 봐주세요, 나의 향기를 맡으세요!

 

단정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한다

 

겨울,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엄마를 찾는다

엄마, 엄마가 늙는 게 싫어

더 이상 늙지 마세요

난 엄마에게 젊어 보이는 선글라스를 끼운다

 

엄마와 내가 손잡고 미술관에 걸어 들어간다

 

 

 

 

[심사평]

 

응모작품이 질이나 양에 있어 예년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다. 요즈음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여러 문제점이 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남의 시를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알지 못한다. 시를 읽는 가운데 좋은 시를 읽고 감동하고 이어 시를 쓰게 되는 것이 흔히 있는 시수업의 순서인데, 이것이 다 생략된 채 창작교실 같은 데서 기계적으로 시 쓰는 법을 익혀 억지로 시를 만들다 보니까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가 싶다. 한편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시를 쓰겠다는 사람보다 말의 맛에 빠져 시를 쓰겠다는 사람에 더 신뢰를 둔다는 한 외국 시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같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으로 뽑을 만한 시는 여러 편이 되었다. '메리제인'(정수지)은 궁상과 청승이 없이 경쾌하고 밝아 좋았다. 더듬거리고 우물거리는 대목도 없이 발빠르고 날렵하다. 휘파람이라도 불며 환한 대낮에 꽃길을 가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다른 시의 성적인 이미지들도 칙칙하고 찐득어리는 대신 수채화처럼 곱다. 한데 작품의 편차가 심하다. '그 겨울날엔'(고봉국)은 특이한 분위기와 정서를 잘 그려낸 아름다운 시다. "쓸쓸함과 낭만이 너무나도 서글퍼", 또는 "쓸쓸함과 낭만이 떨어져 내린 자리" 같은 치기어린 거슬리는 표현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거울'(라한희)은 삶의 의미 따위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상당한 수준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데 이상하게 머리로 쓴 시라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너무 큰 얘기를 하려는 중압감을 벗어버리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겨울, 미술관'(이상은)은 감각이 모던하고 신선하여, 시를 읽는 재미를 한껏 맛보게 해준다. 어려운 내용이 아니면서도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발상이 상식적이거나 평이하지 않은 것도 이 시의 좋은 점이다. 같은 작자의 '너에게'는 뛰어난 사랑 시로, 말을 다룸에 있어 상당한 수준임을 짐작케 한다. 토의 끝에 심사자들은 이 네 응모자의 시 중에서 이상은의 '겨울 미술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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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 / 김관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 정말 미안해요

또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당선소감]

 

고맙습니다.

감사한 분들이 정말 많네요.

일일이 언급하면 진부하고 지루할 것 같아 줄입니다.

그래도 스승님이신 최승호 시인을 빼놓을 순 없겠죠.

정말, 감사합니다.

! 그리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심사해주시고 뽑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즐겁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쓸데없는 장식 뺀 돌직구표현

 

시를 읽는 가장 큰 재미는 다른 데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을 그 시에서 처음 듣는 데 있지 않나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세상을 보는 남들과는 다른 눈과 귀와 손이 있어야 할 것이고, 거기서 남들과는 다른 어법이 나오게 되는 것이리라.

 

이번 응모작품은 그 양에 있어 전년보다 훨씬 많았고 수준도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비슷비슷한 소리들이 많아 시를 읽는 재미가 반감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음 작품들은 여러 면에서 심사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안개, 당신의 행방’(이주)은 우선 아름답다. 그윽한 수묵화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걷는 느낌도 주면서, 특히 뒷련에 이르러서는 사람 사는 일의 아득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빼어난 서정시로 읽어 틀림이 없겠지만, 자기만의 목소리나 어법이 모자란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미안하다’(김동연)는 말하자면 환경시라 할 수 있겠는데, 호소력도 있고 표현에 무리는 없지만 너무 뻔한 소리다. 옳은 소리, 지당한 말씀이 다 좋은 시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잘 지내니?’(조영훈)는 발랄한 발상과 표현이 장점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걸린다. 시 하면 일단 폼을 잡고 인상을 쓰고 보는 것도 가관으로 그런 점을 극복하고 있는 면은 살만하지만, 이 작자의 다른 시들은 어쩐지 좀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김관민)는 우선 어법이 특이하다. 이 점은 같은 작자의 악성종양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어법은 우리 시에서 보기 어려웠던 터여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쓸데없는 장식 없이 핵심으로 돌진하는 시법도 시에 힘을 더해준다. 당선작의 수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이상의 네 작품을 놓고 토의한 끝에 심사자들은 김관민의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의 앞으로의 활약에 크게 기대를 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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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입자들 / 민슬기

 

 

남의 집에 구멍을 빌려 지으면서 시작된 식탐이다

무엇이든 훔쳐야 직성이 풀리는 업보다

어둠을 갉아먹으며 사람들의 은밀한 말소리를 귀담아듣는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으므로 속절없이 칸칸이 들어찬 어둠을 헤맨다

침묵이 답이라 믿으며 썩은 음식물 냄새로 묵묵히 이동할 뿐이다

이따금씩 고양이 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맛본다

눈알은 갖고 있으나 몽유하는 혼령처럼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끊임없이 헤매도 변하지 않는 역마살

어디서 시작되고 끝은 어디쯤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풀벌레가 뱉어내는 소리는 비명 같다

가느다란 수염은 한껏 거추장스러운 자존심이다

진술실의 조명처럼 가로등은 꺼질 줄 모르고

쥐가 가는 길을 탐색한다

달이 한 겹씩 탈피를 해도 여전히 같은 곳을 뒹굴듯

보이지 않는 틀 속에서 질주한다

치부를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진 쓰레기봉투 위에

까닭 없이 올라서 보기도 하며 허무를 베어먹는다

어쩌면 도사리고 있는 덫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도는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

막다른 길로 질주한다, 막다른 길이 집이다

 

 

 

 

 

 

[당선소감] “시인의 붓으로 시를 쓰며 내 삶을 증명해 보이겠다

 

나는 침묵부터 배웠다. 문장을 꼭꼭 씹으면 해체된 자음과 모음이 입안에서 굴러다녀서 애를 먹었다.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거울 속엔 아직 덜 자란 저편의 내가 불쑥 울어버릴 것처럼 앉아 있었고 계절을 지나온 지문 투성이 과거들은 쉽게 금이 갔다.

 

타자로서 스스로를 되비추는 과정은 결말뿐이라고 생각한다. 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어제의 나를 능가할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야 하는 일은 아직도 나의 숙제이다. 간절함에 대해 믿지 않았으나 일기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시는 금세 다가와 주었다가도 뭔가 끄적이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다시 어둠 속에 꼬리를 감춰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를 견뎌내는 방식은 배웅과 마중이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다시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시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어쩌면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본 것도 같다. 그 뿐이었다. 나는 아직 시의 손을 잡지 못했다. 입 맞추지 못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던 중 소식이 당도했다. 이른 초여름 햇살이 세상의 녹음을 짙게 하듯, 그렇게 불현듯 가슴 벅찬 순간이 내게 올 줄이야.

 

본인 외에는,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작품에 대해 폄하하지 않게 하시고 시의 광활한 세계를 열어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앞으로는 쉴 틈 없이 달려갈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늘 사랑으로 다독여주시고 이끌어주셨던 문지원 선생님, 그리고 작품을 발표할 때면 기성 작가처럼 대우해주시며 과감하게 시를 앓을 수 있게 해주신 박찬일 교수님 외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예술대학교에 다니는 예비작가로서 자긍심을 갖게 해주신 교수님들의 지지에 꺾이지 않을 시인의 붓으로 시를 써 보답해드리고 싶다. 사랑으로 나를 빚고 초라한 빈손으로 키워주신 부모님, 나를 아픈 손가락으로 감싸 쥐고 또 다른 부모님처럼 키워주신 이모와 이모부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내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동생 현기와도 기쁨을 나누고 싶다. 최초의 독자가 되어준 모든 친구들과 추계예술대 11학번 문창과 동기들에게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나지막히 중얼거리던 내 어린 시들을 눈여겨 봐주시고 뽑아주신 신경림 시인과 유종호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보다 나은 시로 내 삶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심사평]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대변

 

응모작품들을 읽으면서 먼저 느낀 것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은 시를 찾아 읽는 데 게으르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시를 가르치는 대학이나 이른바 강좌의 책임이 클 것이다. 좋은 시를 쓰는 데는 당연히 좋은 시를 읽는 과정이 있어야 할 터인데 응모작들을 보면 그런 점이 모자란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쓴 것 같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또 응모작들이 발상과 형식에 있어 비슷비슷한 것이 많았는데 이 역시 대학의 시교육과 창작강좌 등의 영향일 터이다.

 

재담이나 비유 같은 것이 너무 뻔하고 낡은 것들, 예컨대 이미 남들이 써먹었거나 가당치도 않은 것들이 많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이 중앙지의 신춘문예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집 시기가 중복되지 않은 데 따른 집중 효과 탓인지 오히려 좋은 작품이 더 많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응모작 가운데서 심사자들은 우선 김나영, 조대식, 민슬기 세 사람의 작품에 주목했다.

 

김나영의 시는 발상이 나이브하면서 순박하다. 다른 응모작들과 선명하게 구별되어 확 눈에 띈 점도 없지 않다. 특히 왕따’, ‘어른 대 어른으로’, ‘사랑받을 자격같은 시들은 그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 대목을 관찰하여 시의 재미를 맛보게 해 준다. 한데 상이 너무 어리다. 훈련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조대식의 시는 안정되어 있는 것이 장점이다.

 

궁상스럽고 공연히 웅크리고 하는 대목이 전혀 없이 활짝 펴져 있다. 그 중에서도 벚꽃 지는 날같은 시는 독자를 푸근하게 안아 주는,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수작이다. 하지만 너무 평범하고 안이해서 시의 깊이를 떨어트린다. 작품들이 편차가 심한 것도 문제다. 민슬기의 작품은 좀 답답하고 갑갑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오늘을 살고 그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질주한다는 , 세입자들은 그의 자화상이자 오늘을 사는 많은 젊은이들의 초상일 터이다. 언니의 낙태가 소재가 된 백목련의 그림자가 없다도 우울하고 답답한 내용이지만 현실을 드러낸 한 단면도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변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시의 형식까지 답답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좀더 활기있고 시원스레 시를 쓰는 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 민슬기의 , 세입자들을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위의 심사평으로 충분히 설명이 됐을 것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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