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새로운 생활 / 조용우

 

 

문병을 다녀오는 길에 새 옷을 사기로 한다

 

벽장 속 셔츠들은 옷깃이 바랬고

오늘은 사야한다 새로운 흰 것을

 

여름의 아우렛 비어있는 리넨들은

간소하고 청결한 라이프 스타일을 권하고

 

너는 이제 그런 생활을 한다

얇은 옷 한 벌과 주머니 두 개로

 

마당 없는 병원 벤치에 간간이 내리는

미적지근한 볕을 받으며 너는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좋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운이 좋았다, 좋다

라는 말을 번갈아 고르고

 

오늘도 너를 찾아오지 않는

우리를 여전히 좋아하는 척하면서

 

어떤 얼굴을 하얗고

어떤 사람은 점점

창백해져 가는가

 

하얀 것이 하얀 것을 더하지 못하

뻣뻣하게 구겨져갔다 나는

 

새로 산 셔츠를 벽장에 건다

버릴 옷들이 다시 버릴 옷으로 남겨진다

 

뿌옇게 젖어가는 깃과 깃

땀방울은 매일 차가운 목덜미를

투명히 흘러내리는데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쓰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은 시를 쓰고 싶다"

 

싫어하는 것, 사람에 대해 욕을 하는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읽고 썼던 적이 있다. 조롱과 분노는 조롱과 분노로 끝났다. 이러려고 시를 쓰나. 그렇지만 그것도 시였고 나는 나였다. 그렇게 시는 시, 나는 단지 나였을 뿐이었다.

 

시는 단지 시로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만으로 머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에게 가 있다면, 문학에게 문학이 있다면 충분한가. 혹은 진정성, 진실이라면, 문학은 충분히 문학이 될 수 있나. 시를 쓰는 것은 어떻게 진실한 일이 되는지. 그럼 진실한 문학을 했던 그 사람들은 대체 어째서.

 

문학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문학에 관한 유용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학을 읽고 쓰는 일,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일이 가볍고 쓸모없다면, 가볍고 쓸모없는 것이다. 그 무용함 뒤에 한 문장으로 덧붙여지는 유용한 역설을 나는 쓸 수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계속 하자고, 함께 시를 쓰고 살자고 얘기해주신 임솔아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선생님이 계셔서 시를 쓰고 함께 사는 일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긍정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믿음으로 걱정하고 보살펴준 부모님, 동생에게도 오랜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내가 지닌 모든 이야기의 독자가 되어 주는 지원에게 온 기쁨을 보낸다.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어서 연습 없이 쓰고, 살 수 있었다.

 

문학으로 던지는 물음 뒤에 숨지 않겠다. 문학에게만 진실을, 폭력을, 무지를, 아름다움을 내맡기지 않겠다. 쓰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은 시를 쓰고 싶다.

 

 

 

 

[심사평]

 

올해 중앙신인문학상 본심 대상작들은 수준이 고르고 높았다. 본심 작품을 여러 차례 고심하며 읽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이영원, 남수우, 조용우 등 세 분이다. 세 분의 응모작들은 개성적인 경험의 포착, 발상의 창의성, 이미지의 조형력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 분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차이로 당락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영원의 '어제의 최선, 오늘의 바이킹'은 어제와 오늘, 노인과 청년 세대가 공존하는 공구 상가의 오후 풍경과 최선을 다하지 않는 세계의 우연한 일들을 묘사한다.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시적 전언은 명료하고, 시의 화법은 자연스럽다. 수미쌍관(首尾雙關)하는 유기적 관련성이 느슨하지만 손에서 내려놓기 아쉬울 만큼 매력이 있었다. 남수우의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자신의 뒷모습이었네라는 첫 구절이 인상적이다. 누군가 떠나고 홀로 남은 거실을 배경으로 펼쳐진 거울과 자아의 백일몽, 그 심리 드라마는 공감이 되었다. 또렷하게 도드라지는 한 줄의 통찰력 부재와 사소한 것을 전체에 그러 매는 고리가 약한 점이 지적되었다.

 

두 심사자가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문병(問病)과 새 옷에의 욕구가 교차하는 일상을 그린 조용우의 '새로운 생활'이다. 바랜 옷깃을 두고 생활의 느낌과 사유를 교직하는 시의 세계는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겠다. 때 타고 구겨지는 생활에서 청결한 라이프 스타일을 향해 뻗치는 청신한 감각이 그 작은 세계의 평면성을 뚫고 나온다. “하얀 것이 하얀 것을 더하지 못하고”, 버려지거나 남는 것이 옷만의 일은 아닐 테다. 사소함 너머를 붙잡는 촉()의 풋풋함, 사유의 명료함, 들뜸이나 과장이 없이 자기의 세계를 거머쥐고 들여다보는 시선의 깊이가 놀라웠다.

 

심사위원 본심 고형렬·장석주(대표집필 장석주) / 예심 김수이·문태준

 

728x90

 

 

계시 / 오경은
 


우울할 땐 은박지를 긁어요, 저마다 은박지와 동전이란 게 있잖아
스스로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꽝의 확률은 잊어라, 잊어라
 
맨발로 떠도는 광신도의 얼굴로
복권을 사는 사람들처럼
 
뭐라고 쓰여 있나요
당신도 내가 보고 있는 걸 보고 있나요, 아니겠죠
 
의심이 필요 없는 순간에 서로를 못 믿을 만큼 성실해본 적도 없으면서
 
새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긁은 자리가 다시 차올라요 
아무리 긁어도 찢어지지 않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외로움이 필요할 때마다 은박지가 벗겨진 자리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잊었다
 
가난을 동경하라
죽은 사람을 추종하라
지리멸렬한 영원을 꿈꾸라
 
수북이 쌓여가는 은박지 재, 빛나는 개미떼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있어서 자꾸만 아름다워져 가, 초조해
 
저마다의 은박지와 동전이란 게 있어서
우리는 신이 되어 가고 있다
가난한 계시에 중독된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인생에서 받은 것을 다시 시에게로 …

 

시가 알려준 것을 인생에게로, 인생에게 받은 것을 다시 시에게로. 너에게로, 당신들에게로, 삶에게로, 죽음에게로. 그렇게 가까스로 나에게 도착할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은 선택은 무엇도 하지 말라고 말해준 아빠 오영재, 나를 가장 사랑하는 엄마 이선숙, 이해보다 사랑이 큼을 알게 해준 언니 오민아. 당신들 앞에서 언제나 마음보다 작은 사람이었기에 미안함과 사랑을 전한다. 김명인 선생님과의 사당동 거리, 이혜원 선생님의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이영광 선생님께 받은 못 갚을 마음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홍창수, 박유희, 박형서 선생님께 감사를. 신용목, 하재연 선생님의 애틋한 기약에도 보답하고 싶다. 라라·원·나눔·지연·별·지호·지민·경민·정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뜬금없이 뭉클해지는 현호·정균·용준·병덕·우석·승원·태선·송아·현경·셉·승훈·주영·명준. 스스로가 좋아지던 순간엔 언제나 당신들이 있었다.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 감사합니다. 내 몫의 작고 깊은 행복이 남아 있다면 그 모두를 나의 사랑, 나의 꿈. 고(故) 김태혁 여사께 바치고 싶다.




 

[심사평]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환멸과 위트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분의 작품들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지만, 확연하게 눈에 띄는 작품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유은님의 ‘국경에 서서’는 같으면서도 다른, 나인 동시에 타자인 존재에 대한 사유를 “숫돌에 벼린 문장들”처럼 간결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관념적인 소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고, 나머지 작품들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남수우의 ‘가장 바깥에 사는 손’은 가난한 산동네에서 병을 앓으며 죽어가는 삼촌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부재성을 손에 만질 듯 그려낸다. 신춘문예에 잘 맞는 세련되고 안정적인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경은의 시들은 다소 거칠지만 세계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패기와 진지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디스토피아적인 현실 속에서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우울과 분노를 그의 시들은 품고 있다. 당선작 ‘계시’는 복권을 긁는 사소한 행동에서 깊은 슬픔을 읽어내며 “저마다의 은박지와 동전”에 주목한다.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환멸과 위트가 자연스럽게 뒤섞이면서 개인적 고통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걸 볼 수 있다. 

 

본심 심사위원=김기택·나희덕(대표집필 나희덕) 예심 문태준·조재룡

 

728x90

 

 

수술 / 강지이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매우 조용한 공간이 나타난다 먼지가 쌓여있는 침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복도 어떤 단어든 소리 내어 말해도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저 침대에 누워 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누워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누군가를 기다리는 과정

 

옷깃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안구엔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는다

아무도 이곳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알코올 냄새와 같이

누워 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밝혀주는 일 계속할 것

 

삶을 뒤흔든 책이 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책의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의 존엄을 지켜준 건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말과 눈처럼 새하얀 손수건이었다고. 나는 시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리고 이름이 지워졌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것, 그것들을 부르고 싶었고 그게 시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시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큰 영향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시가 가지고 있는 찬란함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전부 소멸하더라도 그 쓸모없는 찬란함은 오히려 고유의 빛을 내며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밝혀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형태의 부당한 폭력이나 차별에 반대한다.

 

고마운 사람들이 아주 많다. 권희철 선생님, 김경욱 선생님, 장석남 선생님, 허윤진 선생님에겐 쓰는 기쁨과 그 이상의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강화길 조교님과 서창과 친구들. 할아버지, 할머니, 성미, 정숙, 미숙이모, 나의 엄마 허원정 배우님과 고양이들. 이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회를 주신 중앙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심사평] 상황과 조율된 언어의 넓은 정적 돋보여

 

788명의 투고작 가운데 14인의 작품을 넘겨받아 본심을 진행했다.

 

최종적으로 조주안·권명규·강지이씨의 작품이 논의되었다. 조주안씨의 작품에 나타나는 죽음과 시원, 탄생과 실종의 긴 시간과 먼 공간에 이르는, 드물게 확장된 시선에 대한 논의가 먼저 있었다. 가령 자라나는 꽃병에서 움직일 기미가 없는 꽃병이 먼 곳을 응시하는 장면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기원과 중심에의 서사적 상상이 현상에 더 밀착, 개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권명규씨의 우울의 유행은 일상에 깃들어 있는 무차별적이고 불가해한 상실이 우울의 방식으로 전염되는 과정을 시적 압축과 더불어 산문적 디테일로 그려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우울의 세부 묘사가 흡인력을 갖는 화면들로 과감하게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논의는 강지이씨의 구체성과 몽환성, 선명한 이미지와 신비한 여백 쪽으로 기울었다. 상황에 잘 조율된 언어의 넓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당선작 수술은 수술을 기다리면서, 의식이 꺼지기 직전의 짧은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어떤 단어든 소리 내어 말해도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그 순간에 시가 들어서는 정밀함이 돋보였다.

 

심사위원 본심 고형렬·이수명(대표 집필 이수명) / 문태준·조재룡 시인

 

728x90

 

 

막판이 된다는 것 / 문보영

 

 

후박나무 가지의 이파리는 막판까지 매달린다. 그늘을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갔다. 막판 직전까지. 그 직전의 직전까지. 밑천이 다 드러난 그늘을 보고서야 기어이

 

후박나무는 그늘을 털어놓는다. 막판의 세계에는 짬만 나면 밤이 나타나고 짬만 나면 낭떠러지가 다가와서. 막판까지 추억하다 잎사귀를 떨어뜨렸다. 추억하느라 파산한 모든 것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해 손이 생겼다. 손아귀의 힘을 기르다가 이파리가 되었다. 가지 끝에서 종일 손아귀의 힘을 기르고 있다. 그러나 양손이 모두 익숙지 않은 것들은 양손잡이일까 무손잡이일까. 그늘을 탈탈 털어도 가벼워지지 않는

 

애면글면 매달려 있는. 한 잎의 막판이 떨어지면 한 잎의 막판이 자라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어서 손이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손을 꽉 쥐면 막판까지 끌고 갔던 것들이 떠오른다. 막판들이 닥지닥지 매달려 있다. 막판 뒤에 막판을 숨긴다.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후배와 밥을 먹었다. 그는 내게 시가 좋으냐고 물었다. 시를 좋아하는지 증오하는지는 분간이 잘 안 선다고 대답했다. 상처난 부위에 거즈를 붙일 때, 거즈를 사랑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는 기호랄 것이 없지 않으냐, 하지만 피를 멈추려면 거즈를 대야 한다고.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묻길래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인 것 같다고 했다. 꼭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문학을 하는 거냐고 물어서,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고 풀어 설명하고 좀 후회했다. 누나는 애인이 있느냐고 물어서 애인은 있어도 없는 것이고 없어도 없는 거라서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시집을 낼 수 있다면 제목을 모태솔로라고 할 것이며 첫 시는 각자애인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버지 문경식의 갈색 일기장에 평온이 깃들길 빈다. 오형엽 선생님께 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오태환 시인께는 별이 잔뜩 박힌 모자를 선물할 것이다. 소식을 들은 그는 말했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네가 나를 웃게 만드는 날도 있구나!”

 

 

 

 

책기둥

 

nefing.com

 

 

[심사평] 능숙한 언어구사, 단단한 사유의 힘 갖춰

 

본심에 올라온 15명의 응모 작품을 읽고 난 뒤 우리 두 사람은 기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기쁜 건 응모작의 수준이 비슷하게 높아서였고 난감한 건 그 동일한 높음이 언어 기교 면에서만 그렇다는 점, 그 높은 기교를 감당할 만한 깊은 시적 내면이 잘 안 보여 시들이 대체로 공허하다는 점,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응모한 것 같을 정도로 응모 시들이 거의 다 비슷했다는 점 등이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그런 난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지윤의 과 문보영의 막판이 된다는 것두 편이었다. ‘은 거울의 이미지를 현란하거나 난삽한 언어 구사 없이 신선하고 능숙하게 구멍 이미지로 환치해낸 뛰어난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에서는 주석까지도 시여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설명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주석이 결국 치명적이었다. 그에 비해 문보영의 막판이 된다는 것은 산문시가 갖기 쉬운 상투적 서술의 위험을 아슬아슬한 정도에서 조절해내는 자유롭고도 능숙한 언어 구사와 그에 걸맞은 단단한 사유의 힘을 함께 갖춘 데다 나머지 작품 수준도 고르게 높아서 최종 당선작으로 합의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선까지의 정진이 시의 막판에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축하와 기대를 함께 보낸다.

 

본심 심사위원=김기택·김경미(대표집필) 예심 정끝별·문태준

 

728x90

 

 

투명인간 / 김소현

- 못생긴 너에게

 

 

오늘은 티브이에 나오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나는 잠깐 무표정하다가

웃는 얼굴을 연습해보았다

그럴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건전하게 너를 사랑할게

오늘의 운세에선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천천히

목표한 곳만큼 전진하라 한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한 쪽 눈을 감고 보는 풍경과

두 눈으로 보는 풍경은 조금 다르고

왼쪽 눈의 풍경과 오른쪽 눈의 풍경은 아주

많이 다르지 그래서 나는

깜빡이면서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아름다웠어 혹은 슬프지 않았어

 

조건 따지지 않고 무담보 대출 삼백

오래도록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내 몸은 자꾸만 헐렁해졌다

옆집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신문 배달원이 툭, 하고 던져 놓고 가는 신문 소리에

덜컹거리는 몸의 내장들

 

당신은 나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이해한다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손을 잡고 외출을 하자

 

어쩌면 새로운 세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체위를 바꾸는 구름만큼 무방비한 우리의 주소록

아무렇게나 번호를 눌러 불쑥

나야, 하고 말을 한다면

 

나는 나를 더 미워하고 싶어진다

나는 지구의 회전을 지나치게 의식하였다

그리고 걷는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적합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뿐

 

자주 어지럼증을 느낀다. 이건 현기증이나 빈혈이라기보다는 지구의 회전을 느끼는 순간. 혹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기분. 적합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엊그저께 쓴 일기를 본다. 나는 약간 죽어 있는 것 같다, 고 썼다. 생일이 있는 여름만 되면 몸이 많이 아팠다. 어쩌면 잘못 태어난 것일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여름은 늘 끔찍하게 더웠다. 불행의 무게를 재고 싶을 땐 글을 썼다. 가끔은 심장이 너무 무거웠다.

 

네 번의 학사 경고를 받았고 의사는 내게 알코올 중독이라 했다. 틀리게 살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랐다. 단지 조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전화를 받고 한참 서 있었다. 가을 냄새가 났다. 바람이 찼다. 나는 조금 웃었다.

 

제 손을 잡아주신 박주택 교수님.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용제 선생님 고맙습니다. 경희문예창작단과 박성준 선배님, 김학중 선배님, 이재원 선배님 감사합니다.

 

나보다 기뻐한 내 사람들 고마워요. 쌍둥이 여동생 소영아, 사랑해. 행복하자.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과 조용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외눈 아닌 겹눈으로 세상 보는 성숙함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은 높으나 서로 유사한 시적 문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적 필연성과 절실함이 부족해 보였다. 신인다운 가능성과 패기라는 잣대만으로 보자면 아쉬웠다. 새로움이란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세계가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는 현상을 감지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인식이나 사유를 언어화 할 수 있는 시적 감각이 필요하다. 시적 감각이란 사유의 깊이만으로도, 언어를 부리는 능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13명 중 배진우·조송이·김소현씨의 작품이 논의되었다. 배진우씨의 사물의 월식은 시적 발상이 뛰어난 수작이다. ‘눈동자를 한 바퀴 돌아온 렌즈는 월식을 끝낸 달처럼 나와 가까워졌다는 인식은 시력의 뒤편을 탐사하는 렌즈에 대한 상상이 만만치 않은 사유로 나아갔다. 그러나 다른 시들은 느슨한 전개로 긴장을 잃었다. 조송이씨의 옷과 함께역시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나 작품의 편차가 심해 믿음을 주기에 부족했다.

 

김소현씨의 투명인간,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에서 그럴 수 있다로 가기까지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세상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타인과 사회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외눈이 아닌 겹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만의 방식을 추구하는 성숙한 태도로 보인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

 

본심 심사위원 이문재·조용미(대표집필 조용미) / 예심 강동호·손택수

 

728x90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 유이우

 

 

자유에게 자세를 가르쳐주자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도 자유가 첨벙거린다

발라드의 속도로

가짜처럼

맑게

 

넘어지는 자유

 

바람이 자유를 밀어내고

곧게 서려고 하지만

 

느낌표를 그리기 전에 느껴지는 것들과

 

내가 가기 전에

새가 먼저 와주었던 일들

 

수 많은 순간 순간

 

자유가 몸을 일으켜

바다 쪽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저기 먼 돛단배에게 주었다

 

돛단배는 가로를 알고 있다는 듯이

언제나 수평선 쪽으로 더 가버리는 것

마음과 몸이 멀어서 하늘이 높다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마음껏 비행할 것이다, 시를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행운을

 

꿈꾸던 미래에 와 보니, 돌아갈 곳이 없어진 기분이다. 이상하다. 이상함 속에서 기쁘고, 기쁨 속에서 이상하다. 시간이 흐르면, 계속해서 미래가 들이닥칠 테니까. 나는 미래에서 밀려나는 동시에 자꾸만 미래로 간다. 앞으로의 날들이 벌써 그립다. 무얼 더 잊어야 하나 보다.

 

시는 어디로부터 올까. 내가 본 풍경들은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다. 내 감정들조차 어쩌면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들을 다짜고짜 마음에 집어넣는다. 내 것이 되어줘.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나만의 풍경이 되어줘.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 나의 새들, 나의 바람, 나의 가로등 등불과 전봇대 그리고 11시 막차들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그러니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나는 가볍게 날아보고 싶다. 인간이라는 신발은 날마다 무겁고 날개는 늘 구름만큼 멀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새라고 가끔 말하고 다니는데, 사람들은 웃는다. 웃음은 좋다. 가벼움은 늘 무거움 뒤에 오니까. 이제 나는 마음껏 비행할 것이다.

 

대단하다는 말이나 축하한다는 말. 그런 말들이 시간과 함께 외로워진다. 대단은 대단끼리 가서 놀고 축하는 축하끼리 가서 놀고 나만 다른 방에 남겨진 기분이다. 그러니 그 방에 남아, 나는 홀로 계속 써야지. 시를. 영원한 시를.

 

나는 이제 많은 것들이 괜찮아졌다. 염려 많았던,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내가 정말이라면

 

nefing.com

 

 

 

[심사평] 상상과 풍경의 드넓은 교호작용 거기에 가볍고 탄성 있는 언어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신예은·김창훈·유이우씨의 작품이었다. ‘밖씨 아저씨를 비롯한 신예은씨의 작품은 과감하고 감각적인 언어의 굴곡이 돋보였다. ‘방금, 의사의 손가락 타는 냄새가 뒤돌아보았다’, ‘살해당한 애인을 위해서는 누가 더 오래 썩었는지를 놓고 미추를 따지는 전위적인 사랑을 유행시켜야 한다 등의 구절은 마치 성대를 통하지 않고 흘러나온 발화처럼 탈지형적이고 자극적이다. 다양하고 흥미롭게 언어를 설계하는 것 못지않게, 흥미를 조망하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더 풍요롭고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창훈씨의 작품들은 잘 다듬어진 묘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계동 104번지에서 도시의 살 사이를 핥고 지나가는 시간/새가 급히 방향을 바꾸는 것은/흘러내리는 육즙을 받아내기 위해서다와 같은 구절에서 보이는 안정된 언어의 활강이 오랜 숙련을 짐작케 한다. 이 미적으로 정련된 세계 안에 다양한 주행과 역주행이 교차해서, 익숙한 미학 밖으로 길을 내는 좀 더 생기 있고 활성화된 통로들이 전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유이우씨의 가벼운 행장은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다. 수식과 수사의 그늘이 사라진 피부 언어는 단연 돋보였다. ‘우기에서의 구름이 내 위로 걸었다/나는 잠깐 멈추면 되었다와 같이 서슴없는 표현들이 시를 열고 닫는다. 6편 중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를 당선작으로 한다. ‘첨벙거리 넘어지는 자유라는 것, 그것이 몸을 일으켜/바다 쪽으로 간다는 인식의 곡면이, 돛단배는 언제나 수평선 쪽으로 더 가버리는 것이라는 시선의 평면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상상과 풍경의 드넓은 교호작용, 여기에 가볍고 탄성 있는 언어들이 가담하고 있다.

 

본심 심사위원=김기택·이수명(대표 집필 이수명) / 예심 김수이·황병승

 

728x90

 

 

옆구리를 긁다 / 임솔아

 

 

빈대가 옮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쥐 한 마리를 사이좋게 찢어먹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스러운 강물에 두 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

 

빈대가 옮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 들리고 빈대는 안 병들고 빈대는 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몰래 옆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어간다

 

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가는 것도 멈출 것도 무서워지고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처럼 제자리인 것 같은 풍경이 실은 온 힘을 다해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래들이 있다

 

빈대는 나 대신 나를 물어 살고 빈대는 나를 물어 나 대신 내 몸을 발견한다 빈대가 옳았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시는, 아침마다 버려지는 일 나를 격려해준 사람들에게 감사

 

   앞집 아이가 리코더를 분다. 절름발이처럼 그 소리는 뒤뚱거린다. 가끔은 삑삑 파열음을 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주뼛주뼛 웃는다. 아이는 앞집에 있고, 나는 내 방에 있지만, 소리는 앞집과 나의 방을 건너다닌다. 창밖과 창 안을 건너다닌다. 조용히 해, 개새끼야,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고, 리코더 소리는 싹둑 잘려나간다.

 리코더 소리는 매일 잘려나간다. 그래도 아이는 매일 꿋꿋하게 리코더를 분다. 나는 리코더 소리에 맞춰 엇박자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톱을 깎는다. 내 몸에서 자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똑딱똑딱 자를 수 있다는 게 이상하다.

 손톱은 왜 그렇게 꿋꿋하게 자라나는 걸까. 하지만 죽은 사람의 손톱은 자라지 않을 테지. 이런 것들이 시라고 여겨 왔다. 그것을 나는 가능성의 절룩거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침은 번번이 나를 세상에 내팽개치고, 아침마다 나는 그 사실에 어쩔 줄을 몰라 해 하고, 어째서 꿈은 나만 이 세상으로 내쫓는 것일까, 그 비밀을 아침마다 매일매일 알고 싶어 한다.

 이렇게 아침마다 버려지는 일을 시라고 여겨 왔다. 나의 파열음이 보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신 나의 선생님 김소연 시인에게 감사드린다. 그 말씀은 실은 불가능한 약속 같았지만, 나는 매일매일 간절하게 그 불가능을 믿었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nefing.com

 

 

 

[심사평] 차고 세심한 상상의 기류 이미지의 변주 시도한 수작

 

 신인의 순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제 막 시인의 자리로 들어서는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순간이랄 수 있는데, 우리는 신인의 순간을 통해서 호흡을 환기하고 새로운 조짐을 투찰(透察)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인을 맞이하여 우리 시는 그 처음이 되는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순간을 위해 올해 중앙신인문학상에는 총 743명이 투고했다. 이 대부대에서 예심을 거쳐 14인이 본심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작품 중 최종적으로 박세미·김희정·임솔아씨의 작품이 논의됐다. 박세미씨의 작품은 ‘미미’나 ‘검은 콩 하나가 있다’ 등에서 잘 조율된 장면의 교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 조율의 촘촘함 때문에 좀 더 무심하게 멀리 진전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다. ‘검은 콩 하나가 거대한 식칼의 날을 마주보고 있다’와 같은 강인함이 어조와 형식의 유인을 뚫고 날카롭게 살아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이 뒤따랐다.

김희정씨의 ‘동생을 지켜라’ 등은 다양한 착상과 활달하고 서슴없는 포착이 매력적이었다. ‘저주파의 침묵은 늙은 벽들의 고막을 시원하게 긁어준다’와 같은 구절에서 보이는 거의 반사적 감각이 돋보였다. 그런데 이 감각이 ‘카톡카톡, 나비를 부름’이나 ‘아프리카 1호점’에서 감각의 전면전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감각의 재능으로 일정하게 회귀하고 마는 점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임솔아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하는 데에 이론(異論)이 없었다. 보내준 11편의 작품 각각이 완성도가 높은 풍광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옆구리를 긁다’ ‘두꺼비’ ‘꽃들은 오월에 완벽했다’는 서늘하도록 선명하고 넓으며, 위태로우면서도 태연하다. ‘옆구리를 긁다’는 ‘빈대가 옮았다’에서 시작해 ‘빈대가 옳았다’로 나아가기까지의 이미지의 변주를 시도한 수작이다. 주체를 존재와 비존재의 전위(轉位)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장소가 되게 하는 ‘빈대’는 역동적이고 다면적으로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힘차고도 세심한 상상의 기류라 할 수 있다.

 

본심 심사위원=김기택·이수명(대표집필 이수명)/ 예심 김행숙·신형철

 

728x90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 황은주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 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 그늘이 고맙다, 축복이었다

 

사과 속에서 한 철을 살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던 계절이 있었다. 문득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고, 그때 단단히 잠겼던 동쪽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동쪽을 편애한다. 동쪽 바람 길에 핀 꽃을 흠모하고, 동쪽으로 가는 새떼들을 경외하고, 무작정 동쪽 바다를 그리워하며 떠나고는 했던 내 시의 여정을 사랑한다.

세상이 만화라면 늘 주인공 주변을 흘깃 쳐다보며 정지해 있는 존재 없는 행인이었다. 그러나 펼쳐지는 몇 칸에 행인은 존재하고, 넘어가는 낱장들에도 행인은 존재해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행인의 눈으로 시를 써 왔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사실이라는 말 주머니 밖에서 들리는 진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때로 주인공이 아닌, 부딪치는 또 다른 행인의 이야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통증으로 인해 가슴 너울지는 날들을 견뎌야만 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다. 두려웠던 방향의 기후들과 담담히 마주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늘이 고맙다. 축복이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요란하게 수다를 떨어야겠다. 동부학원 선생님들과 함께 웃어야겠다. 백운사 법륜 스님께 감사드린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두 명의 언니가 있어서 행복하다. 가족을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지. 신재야, 얼른 집으로 내려오렴.

 

손바닥이 가장 못생긴 햇볕이 내어 준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는 중이다. 따뜻하다. 여전히 물고기자리의 얼룩을 지우며 밤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나의 엄마께 이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그 애가 울까봐

 

nefing.com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풋풋한 사유 오랜 시적 내공을 느꼈다

 

새롭게 찾은 사물의 성질, 감각의 명증성,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약동(躍動), ‘진탕만탕 생명력의 잔치’(보들레르) 들이 잘 어우러져야 야무진 시다. 거꾸로 관성과 타성에 기대는 것, 중속(衆俗)의 수다와 너스레, 조악한 모국어 사용 습관, 남의 것 흉내내기 따위는 무른 시의 속성이다.

 

최종적으로 방소씨의 다운의 계절’, 조상호씨의 ()’, 황은주씨의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등이 남았다.

 

방소씨의 시들은 화법과 시각의 유니크함이 눈에 띄었지만, 대상에서 취해야 할 것과 버릴 것들에 대한 분별에서 느슨했다. 그런 결과로 시가 둔탁해졌다. 당선을 겨뤘던 조상호씨의 시들은 이미지 교직(交織)의 촘촘함에서 발군이었다. 이미지의 세공(細工)에서 남다른 시적 조탁의 능력을 엿보게 하지만, 의미의 쇄말주의에 갇힌 아쉬움과 응모한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하고 제쳐졌다.

 

황은주씨의 시들은 시적 수련의 내공을 감지하기에 충분했다. ‘에서 동지를 돌아온 달의 북쪽을 끝점으로 정했다라는 힘찬 첫 구절은 이어지는 느른한 감상주의의 물타기로 인해 그 매혹이 반감되고 만다. 내심 당선작으로 꼽았던 을 제치고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같은 구절에서 그 수일함은 도드라진다. 미숙함이 없지 않고 오장육부를 뒤흔들 만한 놀라운 개성은 아니지만, 사유의 풋풋함과 상상력의 발랄함은 황씨의 미래 가능성에 신뢰를 갖게 한다.

 

끝으로 오병량·권수찬·김은석·양안다씨의 응모작도 인상 깊게 읽었다. 두 심사위원은 그들에게서도 상큼한 도약을 보여줄 수 있는 시적 재능과 개성의 촉을 확인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본심 심사위원 장석남·장석주(대표 집필 장석주) / 예심 권혁웅·김민정

 

728x90

 

 

당선취소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중앙일보는 2011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인 김미나(47)씨의 포란의 계절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본지는 당선작 발표 후 일부에서 제기된 포란의 계절의 표절 의혹에 대해 면밀하고 신중하게 조사했습니다. 당사자 김씨와 표절 의혹을 제기한 측의 얘기를 들었고, 심사에 참여했던 시인(예심:문태준·권혁웅, 본심:이문재·나희덕)은 물론 중립적 입장의 시인·평론가들에게도 폭넓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포란의 계절이 다른 시(강정애의 새장’, 김후인의 나무의 문’, 박해람의 독설)를 명백하게 표절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어휘와 소재, 발상 등 여러 층위에서 포란의 계절과 관련 작품들 사이에 표절에 근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이에 따라 포란의 계절이 등단작으로서 갖춰야 할 독창성이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에 당선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번 결정은 가능성 있는 문학 신인의 앞날을 가로막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사자가 당선 취소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을 쓰는 것만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미나씨의 건투를 빕니다.

 

이번 일로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끼쳐드린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앞으로 중앙일보는 신인문학상 응모작에 대해 보다 엄정한 검증 과정을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728x90

 

 

사막 / 박현웅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반짝거리는 털을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몇 마리 신기루가 보였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는 중이다
평생 모래를 건너도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

오래전 모래 속에서 귀를 빌려온 죄로
사막에 소리를 맡기고 다녀야하는 은빛여우
넓은귀로 입맛을 다신다.
사구의 그림자가 모래 속에서 걸어 나와 주름으로 눕는 밤
은빛여우의 눈은 빛의 껍질을 벗겨낸 말랑한 과육
소리에 민감한 어둠덩어리다
허기진 소리들이 더욱 환해지며 서로의 먹잇감이 되듯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
찾아야할 작은 먹잇감이다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식사를 끝내고
약간의 풀이 있는 곳, 여우가 제 발자국을 오래 천천히 핥는다.

작고 빛나는 사막 한 마리가 죽어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는 칼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느리게 생명을 쓰러뜨린다.
여우의 몸을 떠난 숨결이 오래
은빛 털을 핥는다.
걸음을 내려놓고 날개 없이 은빛 털들이 날아오른다.
채색하는 모래바람은 일렁이는 밀밭풍이다
사막에서 살찌는 것은 바람뿐이다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나의 경전에 무릎 꿇고 기도 치열한 문장으로 갚겠다

펑펑 내린 눈이 무릎까지 찾아온 밤, 잠들어 있는 방을 나선 소년. 무릎까지 쌓인 눈을 걷는 것보다 어둠이 더 무서웠지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산 중턱 성당에 다다른 소년의 발과 무릎에 흰 눈이 가득 묻었고 등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 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듯 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소년은 손을 모아 내용도 형식도 없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 때의 그 소년이 지금 제 시의 모양일 것입니다.

한계점이 제 축이었던 시절. 부풀어 오르기 전 먼저 허물어져 보라고, 소실점에서 기다려 보라고, 변곡점은 거기에 있다고 수없이 스스로 되뇐 나의 경전에 오늘 무릎을 굽힙니다.

내 시의 첫 독자이면서 가끔 무서운 사랑으로 A4용지를 찢어 버리는, 귀한 나의 아내에게 가장 깨끗한 영광을 돌립니다. 처음 나에게 시 쓰기로의 권유와 늘 곁에서 바른길을 들고 지켜봐 주시는 최성훈 선생님, 시를 켜놓고 밤을 새우고 있을 우리시(詩) 회원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따뜻한 냉정으로 지도해 주신 박해람 선생님, 가장 귀한 감사를 마음 숙여 올립니다. 하루하루의 공부가 참 즐거웠습니다. 치열한 문장으로 갚겠습니다.

또한 각각의 이름만으로도 두려운 경운서당 학우님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며 함께 수학할 수 있어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끝으로 심사위원이신 이문재 선생님, 장석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첫 걸음이지만 선생님들의 선택에 누가되지 않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중앙일보사와 앞으로 신세 질 귀한 지면에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곱씹을 만한 잠언투의 시어 적막한 내면 짜임새 있게 표현

오병량씨와 박현웅씨가 최종적으로 남았다. 상상력의 진폭과 언어구사의 활달성에서는 오병량씨가 좋았다. 오래 시를 써온 흔적도 역력하다. 헌데 무언가 자기 정서가 확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물론 신인에게 그 점을 갖추라는 주문은 무리겠으나 이번 응모작의 경우는 자꾸만 이즈음 회자되는 시들을 좌고우면한 흔적이 있어서 믿음이 덜했다.

가령 이런 구절들이 그렇다. ‘계절은 나무가 가진 옷장의 형태’(‘나무의 취향’ 중)나 ‘내 몸을 다녀간 들숨의 필체…’ 운운의 구절 등은 울림 없는 기교에 머물러 안타까웠다. ‘목도리 사용법’같은 좋은 시를 다른 시가 뒷받침하지 못했다.

당선자가 된 박현웅씨의 시는 그에 비해 문장과 감성이 안정되어 있다. 신인에게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장점만은 아니지만 다른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들이 발랄한, 하다못해 발칙한 감각의 소유자들이 대다수여서 외려 귀하게 여겨졌다. 당선작으로 고른 ‘사막’은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적막한 내면을 짜임새 있고 간결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사막’은 실감으로는 우리에게 낯선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미래의 은유로 읽을 때 절실한 풍경으로 다가선다.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찾아야 할 작은 먹잇감이다’같은 잠언투는 어눌하지만 곱씹을 만한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자칫 전통 서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좀 더 활달해지기를 권하고 싶다. 축하를 드리며 꽃밭 이루시길 바란다.

박은지씨와 박유진씨 등의 시도 읽을만 했는데 뭔가 비슷비슷하다. 개별적으로 보면 개성적인 듯한데 나란히 보면 비슷하다. 그게 뭘까 생각해보길 바란다.

신인 문학상에 응모하는 것은 문청들에게 하나의 큰 축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마디가 만들어지고 그 마디들이 쌓여 나중에 좋은 시인의 훈장이 될 터. 낙선의 고통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해질 것이다. 축하와 안타까움을 위하여! 한잔씩 하시길 바란다.

 

본심 심사위원 이문재·장석남(대표집필 장석남) / 예심 심사위원=권혁웅·김민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