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 김소현
- 못생긴 너에게
오늘은 티브이에 나오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나는 잠깐 무표정하다가
웃는 얼굴을 연습해보았다
그럴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건전하게 너를 사랑할게
오늘의 운세에선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천천히
목표한 곳만큼 전진하라 한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한 쪽 눈을 감고 보는 풍경과
두 눈으로 보는 풍경은 조금 다르고
왼쪽 눈의 풍경과 오른쪽 눈의 풍경은 아주
많이 다르지 그래서 나는
깜빡이면서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아름다웠어 혹은 슬프지 않았어
조건 따지지 않고 무담보 대출 삼백
오래도록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내 몸은 자꾸만 헐렁해졌다
옆집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신문 배달원이 툭, 하고 던져 놓고 가는 신문 소리에
덜컹거리는 몸의 내장들
당신은 나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이해한다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손을 잡고 외출을 하자
어쩌면 새로운 세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체위를 바꾸는 구름만큼 무방비한 우리의 주소록
아무렇게나 번호를 눌러 불쑥
나야, 하고 말을 한다면
나는 나를 더 미워하고 싶어진다
나는 지구의 회전을 지나치게 의식하였다
그리고 걷는다
[당선소감] 적합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뿐
자주 어지럼증을 느낀다. 이건 현기증이나 빈혈이라기보다는 지구의 회전을 느끼는 순간. 혹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기분. 적합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엊그저께 쓴 일기를 본다. 나는 약간 죽어 있는 것 같다, 고 썼다. 생일이 있는 여름만 되면 몸이 많이 아팠다. 어쩌면 잘못 태어난 것일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여름은 늘 끔찍하게 더웠다. 불행의 무게를 재고 싶을 땐 글을 썼다. 가끔은 심장이 너무 무거웠다.
네 번의 학사 경고를 받았고 의사는 내게 알코올 중독이라 했다. 틀리게 살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랐다. 단지 조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전화를 받고 한참 서 있었다. 가을 냄새가 났다. 바람이 찼다. 나는 조금 웃었다.
제 손을 잡아주신 박주택 교수님.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용제 선생님 고맙습니다. 경희문예창작단과 박성준 선배님, 김학중 선배님, 이재원 선배님 감사합니다.
나보다 기뻐한 내 사람들 고마워요. 쌍둥이 여동생 소영아, 사랑해. 행복하자.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과 조용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외눈 아닌 겹눈으로 세상 보는 성숙함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은 높으나 서로 유사한 시적 문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적 필연성과 절실함이 부족해 보였다. 신인다운 가능성과 패기라는 잣대만으로 보자면 아쉬웠다. 새로움이란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세계가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는 현상을 감지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인식이나 사유를 언어화 할 수 있는 시적 감각이 필요하다. 시적 감각이란 사유의 깊이만으로도, 언어를 부리는 능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13명 중 배진우·조송이·김소현씨의 작품이 논의되었다. 배진우씨의 ‘사물의 월식’은 시적 발상이 뛰어난 수작이다. ‘눈동자를 한 바퀴 돌아온 렌즈는 월식을 끝낸 달처럼 나와 가까워졌다’는 인식은 시력의 뒤편을 탐사하는 렌즈에 대한 상상이 만만치 않은 사유로 나아갔다. 그러나 다른 시들은 느슨한 전개로 긴장을 잃었다. 조송이씨의 ‘옷과 함께’ 역시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나 작품의 편차가 심해 믿음을 주기에 부족했다.
김소현씨의 ‘투명인간’은,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에서 ‘그럴 수 있다’로 가기까지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세상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타인과 사회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외눈이 아닌 겹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만의 방식을 추구하는 성숙한 태도로 보인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
본심 심사위원 이문재·조용미(대표집필 조용미) / 예심 강동호·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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