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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 오경은
 


우울할 땐 은박지를 긁어요, 저마다 은박지와 동전이란 게 있잖아
스스로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꽝의 확률은 잊어라, 잊어라
 
맨발로 떠도는 광신도의 얼굴로
복권을 사는 사람들처럼
 
뭐라고 쓰여 있나요
당신도 내가 보고 있는 걸 보고 있나요, 아니겠죠
 
의심이 필요 없는 순간에 서로를 못 믿을 만큼 성실해본 적도 없으면서
 
새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긁은 자리가 다시 차올라요 
아무리 긁어도 찢어지지 않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외로움이 필요할 때마다 은박지가 벗겨진 자리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잊었다
 
가난을 동경하라
죽은 사람을 추종하라
지리멸렬한 영원을 꿈꾸라
 
수북이 쌓여가는 은박지 재, 빛나는 개미떼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있어서 자꾸만 아름다워져 가, 초조해
 
저마다의 은박지와 동전이란 게 있어서
우리는 신이 되어 가고 있다
가난한 계시에 중독된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인생에서 받은 것을 다시 시에게로 …

 

시가 알려준 것을 인생에게로, 인생에게 받은 것을 다시 시에게로. 너에게로, 당신들에게로, 삶에게로, 죽음에게로. 그렇게 가까스로 나에게 도착할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은 선택은 무엇도 하지 말라고 말해준 아빠 오영재, 나를 가장 사랑하는 엄마 이선숙, 이해보다 사랑이 큼을 알게 해준 언니 오민아. 당신들 앞에서 언제나 마음보다 작은 사람이었기에 미안함과 사랑을 전한다. 김명인 선생님과의 사당동 거리, 이혜원 선생님의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이영광 선생님께 받은 못 갚을 마음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홍창수, 박유희, 박형서 선생님께 감사를. 신용목, 하재연 선생님의 애틋한 기약에도 보답하고 싶다. 라라·원·나눔·지연·별·지호·지민·경민·정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뜬금없이 뭉클해지는 현호·정균·용준·병덕·우석·승원·태선·송아·현경·셉·승훈·주영·명준. 스스로가 좋아지던 순간엔 언제나 당신들이 있었다.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 감사합니다. 내 몫의 작고 깊은 행복이 남아 있다면 그 모두를 나의 사랑, 나의 꿈. 고(故) 김태혁 여사께 바치고 싶다.




 

[심사평]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환멸과 위트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분의 작품들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지만, 확연하게 눈에 띄는 작품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유은님의 ‘국경에 서서’는 같으면서도 다른, 나인 동시에 타자인 존재에 대한 사유를 “숫돌에 벼린 문장들”처럼 간결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관념적인 소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고, 나머지 작품들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남수우의 ‘가장 바깥에 사는 손’은 가난한 산동네에서 병을 앓으며 죽어가는 삼촌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부재성을 손에 만질 듯 그려낸다. 신춘문예에 잘 맞는 세련되고 안정적인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경은의 시들은 다소 거칠지만 세계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패기와 진지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디스토피아적인 현실 속에서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우울과 분노를 그의 시들은 품고 있다. 당선작 ‘계시’는 복권을 긁는 사소한 행동에서 깊은 슬픔을 읽어내며 “저마다의 은박지와 동전”에 주목한다.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환멸과 위트가 자연스럽게 뒤섞이면서 개인적 고통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걸 볼 수 있다. 

 

본심 심사위원=김기택·나희덕(대표집필 나희덕) 예심 문태준·조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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