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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은행이 익어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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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매몰 직전 당선 감사"


부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캐롤이 울려 퍼지는 오늘, 향기로운 전령이 도착했다.

 

뜨겁게 숨쉬다가 젖은 채 식어버렸던 나의 클론들아 지하에서나마 귀를 열고 들어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부활은 고스란히 너희의 몫이구나.

늦었지만 이 소중한 소식이 어두웠던 너네의 전생을 위로하겠니?

 

얼음 구유에서 식어가며 토해냈을 원망의 자모들을 분리해서 백지 위에 촘촘히 세운다면, 물고기 알 같은 나의 생리를 용서하겠니?

 

아테나의 분노 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져간 나의 아라크네여,

환한 등불이었던 너의 작품이 그 긴 세월 내게 보낸 응원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

 

내 안의 나야, 눈 속의 눈으로만 보이는 건강하게 솟구치는 귀두를 영접할 수 있겠니? 이제부터 태어나는 분신들의 진화를 고스란히 감당하겠니?

 

또 수 개의 물음표를 안았다. 치열하게 궁금해 하며 살아가야 할 나의 의무가 행복하다. 문학의 궤도를 벗어나 산 세월, 안드로메다처럼 여기실 존경하는 선생님들 제가 이렇게 살아있었습니다.

 

어버이 같으신 전원범 선생님, 광주대 대학원 문창과 선생님들, 이름도 아득하실 허형만 선생님, 부지런하고 씩씩한 서연정시인, 금초문학 동인님들, 우리시 동인님들. 희곡에 머리 부딪히고 몽롱하던 지문과 대사 여러분 그동안의 잠적을 용서하시겠습니까?  매몰당한, 압사 직전의 저를 발굴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큰절 올립니다. 따뜻한 자리 마련해주신 전남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폭서에도 얼어붙는 나의 냉기를 함께 참아준 진, 영, 용, 우야 사랑한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평범한 삶의 풍경 따스한 표현"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이른 서른 분의 작품을 차례로 읽는 동안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 편수가 장르 불문하고 두 배로 늘었다는 담당 기자의 전언이 있었거니와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이 상당한 것이었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숙독하는 과정에서 선자의 초점은 새로움이었다. 삶과 언어를 대하는 관점이 새로우면서도 이미지의 전개 속에 시인이 꿈꾸는 따뜻한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김재준, 최인숙, 정영희, 이명순, 일곱 분의 작품들이 최종심에 남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씨의 응모작품들은 자유롭고 열린 시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대상을 거칠게 몰아가는 힘이 느껴졌고 상상력의 분출 또한 보기 좋은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시편들이 인간의 삶을 보다 따뜻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세계를 끌어안기에 이 진술들은 개인적인 사유 쪽에 더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재준, 최인숙 씨의 작품들은 전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적인 소재와 언어 속에서 오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창작의 주요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아함이 새로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신의 깊이를 지녀야 할 것이다.

 

최종까지 선자에게 남은 작품은 정영희 씨의 '봄, 감전되다' 와 이명순 씨의 '기와 이야기'였다. 정영희 씨의 작품들은 언어가 지닌 풋풋한 상상력의 꿈이 최대의 아름다움이었다. 한 무리의 냉이꽃이 하얗게 잔물결 진다/ 마당 가득 돋아난 저릿한 음표를 밟고/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와 같은 서정의 전개는 요즘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이명순의 '기와 이야기'는 우리 일상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따스한 힘이 핏줄로 스며드는 우직한 느낌이 있다. 두 분의 작품 중 어느 분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지 선자에게 몹시 난해한 일이었다. 숙고 끝에 '기와 이야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면서도 자꾸만 정영희 씨의 작품들을 돌아보게 된다. 우직하게 다가오는 따뜻한 삶의 꿈을 선자가 새로움으로 해석한 결과이지만 정영희 씨의 미래에도 함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곽재구 시인ㆍ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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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요실금을 앓다 /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냉장고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 하는가
그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때
연하디 연한 그녀 분홍빛 수밀도의 때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의 아랫도리에
화려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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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새로운 시작…더욱 매진할 터"

감기약을 먹고 누워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약 기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당선되었다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시와 함께 했던 그 긴 세월의 무게가 한꺼번에 휘발되는 듯 했다.

꿀벌은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라고 한다.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도 꿀벌은, 수없이 반복된 연습으로 결국 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꿀벌의 쉼 없는 날갯짓, 삶에 대한 그 역동성이 꿀벌을 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의 시 쓰기도 그러했던 것 같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더욱 삶에 촉수를 세워 시를 끄집어내어 다듬어 나갔다. 고통 속에서 지혜를 만들어나가는 세상의 이치처럼 끊임없이 주어지는 좌절을 내 삶의 거름으로 삼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시의 길은 끝이 없다. 끝이 없다는 것은 항상 시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며 시를 쓸 것이다.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고재종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늘 위로와 격려를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다 호명 할 수 없는 선배님과 후배들 그리고 함께하는 동인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늘 마음을 다독여준 친구와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해준 미승 언니와 영서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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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07 全日 신춘문예 시

 

시 지망생들은 왜 고향의 가난한 부모님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을까. 그것도 왜 유년과 연관된 이야기에만 집중할까. 그렇게도 쓸 것이 없어서야 무얼 더 일러 말하겠는가. 아니 최소한 자본의 세계화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슬프고 노여운 세계를 사는 자기 삶, 자기 실존, 자기 존재조차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이번 심사를 하면서 일국(一國)의 시인을 꿈꾸는 시 지망생들의 소재와 주제의식과 사유의 협소함에 대해 심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랫도리에 물 흘리는 냉장고의 내력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냉장고를 운영하는 우리네 보통 여성들의 고단한 삶과 시간에 의한 생의 마모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안오일, 그리고 새벽 별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상징하는 바가 아무 것도 없어서야'라며 지금까지 별에 대한 상상력을 완전히 전복해버리는 이형경 등이 200여명의 응모자 중의 그럴 듯한 수확이었다.

 

그런데 이형경은 활달한 상상력과 전복을 통해 생의 이면을 들추려는 젊은 패기는 좋지만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허점이 많았다.

 

그래서 나머지 응모작에서도 고른 수준과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 안오일을 당선작으로 민다.

 

안오일은 시에서 많은 수련이 엿보이지만 상상력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형경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드리며,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고재종 시인ㆍ문학들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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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위에 뜬 집 / 정동철


얼어 죽은 새들을 주우러 강변에 나갔다
일찍이 우리가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들
한 무리 되새떼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에 휩쓸리고 있었다
쩡쩡 얼어붙은 강은 속내 깊숙이
낡은 달력들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빠르게,
추운 햇살 한 묶음 지나가던 동화 속의 집
왜 아버지는 거칠고 마른 삭정이만 골라
허공 위에 집을 지으셨을까
마루 밑에 놓인 신발들이 안쓰럽다며
어머니는 자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밥알 같은 눈발들이 지붕 낮은 집들을 지워버리는 동안

잠들 때마다 등을 쿡쿡 찔러대던
낡고 불편한 나뭇가지의 집
우리들의 하루는 종일 공중에 떠 있었다
귀 시린 겨울밤을 지우개로 지우며
연탄난로 위에 마른 건빵을 굽다가
갈라진 손등으로 벌건 연탄집게를 들어 글씨를 썼다

어디로 공처럼 튀어나갈 수도
굴러갈 수도 없었던 날들
사방연속무늬 벽면에서 철지난 통신표들이 노랗게 바래갔다
청색의 동치미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져 갔지만
허공 위에 뜬 집에서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꽁 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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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꿈 속 시 잊지 않으려 머리맡에 메모장


어느덧 십여년이 흘렀습니다. 문학이 좋아서 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하루종일 시를 생각하고 잠들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꿈속에서도 시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꿈속에 쓴 시들은 왜 꿈을 깨면 기억이 나질 않던지. 아예 메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날도 많았습니다. 꿈결에 써둔 시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여러 날의 아침을 쓸쓸하게 하곤 했습니다.


밥을 벌러 세상에 나왔어도 신춘문예철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를 빙자해서 문학을 빙자해서 문학 이외의 것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지는 않았나 싶은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무기만 믿고 문학을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든 것도 시쓰기를 그만두고 나서의 일입니다. 내가 울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전북청년문학회 벗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들과 같이 가고자 했던 길,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길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각자의 밥을 팔러 세상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입니다.


늘 따르고 싶었던 최하림 선생님이 제 시를 뽑아주신 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시업이지만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원고지를 잡고 끙끙대는 저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아내와도 기쁨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아내는 늘 제 시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인간의 둥근 삶 표현


신춘문예 시들을 심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시들이 기다림의 시학에 서툴다는 면이 보인다. 시는, 그 시가 지닌 내용만큼의 기다림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간은 한 달이 될 수 있고 일 년이 될 수 있고, 십 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투고자들은 그만큼 기다려주지 못하고 마무리하려고 든다.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가 그 예에 속한다. 길거리에서 설탕을 끓여 별 모양을 찍어 파는 여자를 보고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을 끌어안고/온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라고, 햇살과 별을 하나의 이미지로 뽑아내는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면서도, 그 햇살이 어떻게 세계를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시란 쓰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때문에 회임기간이 있어야 한다.

 

설정환의 '아버지는 둥글다' 외 9편도 기다릴 줄 모르는 면에서는 같다. 시 제목과 같이 인간의 삶은 둥근 것이다. 아버지의 삶도 암탉 수캐 염소 박새 등과 둥글게 굴러간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와 암탉 수캐 염소 등이 어떻게 서로 상관하며 굴러가는 가를 형상화했어야 했다. 구체적인 묘사 없이 인간의 삶이 둥글다는 것을 독자들은 수용하지 못한다.

 

정동철의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도 인간의 삶이 둥글고 뜨겁다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눈오는 날 외양간에서 쇠죽을 쑤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아버지를 조금은 쓸쓸하고 따스운 시선으로 보는 아들이나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허신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함께 둥근 원을 그린다. 사랑이 있는 풍경은 뜨거운 것이고 둥근 것이다. 거기에 시의 진정성이 자리한다. '허공 위에 뜬 집'도 언어들이 절도있고, 시의 보폭도 비유도 적절하다. '허공 위에 뜬 집'과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두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하고 정진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최하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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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 박성민

 

1
변두리 허름한 헌책방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시집 한권 툭툭 털며 읽는다
여성지와 중학교 문제집 사이에 꽂혀있는
시인 박정만
〈그대에게 가는 길〉 유고시집
기필코 한 주먹만 더 살아야겠다던
시인의 시집
靈肉을 짜내 쓴 시인의 피울음이
곰팡이로 앉아 있는 시집 속
시인의 눈은 눈물겹게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헌책방 나와 낮술 마시며
시인이 응시하던 하늘을 보았다
타다 남은 연탄 같은 여름 해 아래
질식할 것 같은
어떤 삶의 원형을

2
죽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밀려 떨어지는 톱밥처럼 우울하게
이 땅에서 시인의 죽음은
이래도 되는 것일까
정육점 쇠꼬챙이에 걸린
고기 덩어리 같은
아아, 시의 살과 피

3
짙은, 먹빛으로, 빠르게, 번지는, 구름떼
불현듯, 쏟아지는
장대비 (아아, 저 쇠창살, 쇠창살)

 

 

 

 

어쩌자고 그대는 먼 곳에 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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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20대의 시기에 시는 저의 전부였고 삶의 버팀목이었습니다. 한 줄의 시구로 고민하고 날을 지새우며 쓰고 또 쓰고,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그 때마다 쓰라린 잔을 마셨습니다. 납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근처까지 간 이카루스가 녹아버린 납덩이 때문에 추락하듯이, 항상 부풀었던 꿈은 이내 녹아 내렸고 추락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시와 전혀 관련 없는 일에 6년여를 매달리기도 했고 시 쓰는 일을 잊고자 노력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 문득 눈 떠보니 거울 속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얼굴 하나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20대 때의 열정과 패기가 다 사라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져 가고 있는, 거울 속 사내가 저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다시 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돼지가 아니어서 불행하다는 李箱의 말처럼…. 먼 길을 돌아 왔지만 다시 돌아온 이 길을 이젠 곁눈질하지 않고 똑바로 갈렵니다. 저로 인하여 상처 받았을 분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창 밖을 보니 불 밝힌 가로등 주변으로 모여드는 눈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눈들은 쓸쓸히 어둠 속에서 흩날리고 있음을 잘 압니다. 가로등 바깥, 어둠 속에서 쓸쓸히 내리는 눈 같은 저의 부끄러운 시를 읽어주신 전남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이제부터라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저의 정신적 지주이신 아버님과 대학시절 제 시의 토양을 내려 주신 허형만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광기에 가까운 열정으로 시를 썼던 풀잎문학 식구들과 작가회의의 고마운 분들 이름이 떠오릅니다. 제 몸 태우지 않고는 익지 못하는 군고구마처럼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뜨겁게 익어가렵니다.

 

 

 

숲을 금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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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14편 중 최종까지 관심을 끌었던 작품은 `황야에서 정거' `어느 시인의 죽음', `햇살, 종합병원 62병동' 등 3편이었다. 심사 관점은 시는 첫째 무엇보다 정서 반응의 언어고, 지극히 사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란 점, 둘째는 이에 따른 언어 미학의 성취도, 셋째는 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시인의 정체성(정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 넷째는 따뜻한 구원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관점이었다.


`황야에서 정거'는 시적 상황과 응축, 묘사 기법에 개성이 돋보였으며, `햇살, 종합병원 62병동'은 비록 서툴고 산만한 언어의 조탁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구원의식이 충만한 따뜻한 작품이었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황야에서 정거'가 놓치고 있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 그리고 `햇살, 종합병원 62병동'이 놓치고 있는 언어의 조탁 능력 등이 동시에 극복되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밀었다.


`죽음이란 결국 무엇인가'라는 유통 언어의 상투적 시행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긴장미가 시종일관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어 감동적 체험이 뒷받침 되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욱 정진하기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송수권 시인, 순천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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