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전영관 / 이수인
그늘 제조법 외 4편 전영관
불 꺼진 시장통로는 삼우제 끝난 상가 같다
어둠이 발목을 휘감으며 질겨진다
고양이가 떡집 좌판 밑에 웅크리고 이쪽을 응시한다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
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
손님이 놓고 간 생선가게 비린내가
통나무 도마 틈새에 남아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풍선은 척추를 접은 채 잠들어 있다
내복가게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침 햇살 분주한 건널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어둠에 익숙한 나는 습관대로 머뭇거리다가
낙타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늘이란 비겁한 경계나 완충지대가 아닌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괜찮은 침대 같은 곳이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번번 실패한 그늘 제조법을 아쉬워한다
어둠과 빛을 배합하는 연금술로 구전되었으나
자신만의 비방이 첨가되어야 휴식처가 완성될 것이다
제조법을 답습만 했을 뿐
나만의 방식은 한 행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늘은 몇 방울 빛으로 희석해서 제조할 수 없다는 증명이라며
형광등은 단번에 방을 밝혀버린다
어둠과 빛의 황금비에 추가할 비방은 아버지와 나란히 이마를 식히던
살구나무 둥치에나 남아 있을 것 같다
오늘도, 표정 없는 천장과 눈을 맞춘다
바람의 전입신고
가구들은 나보다 판단이 빠르다
체념을 발판삼아 한 걸음 먼저 적재함에 오른 표정을
악천후라고 기록해 둔다
나의 부탁대로 마지막까지 견뎠을 책상 나사못이
참을성을 뚫고 튀어나왔다 새벽의 관절이
나와 함께 삐걱거릴 때에도 자신의 자세를 지탱했을 것이다
기타는 끊어진 줄을 기다리느라 목이 더 길어졌지만
처음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비가 오면 함께 노래를 불렀었다
음표들은 방을 맴돌다 가라앉을 뿐 간벽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옆방과 등을 맞대고 사는 TV에게 배운 처세술이다
어깨를 좁혀 선반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었던 책들을
마구잡이로 라면 박스에 포개 넣어버린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르로 퀴퀴한 이론을 섞을 것이다
함지 몇 개와 냄비는 공복의 습성까지 가져가려는 듯 덜걱거린다
그 위로 노숙자 안색의 재떨이도 던져 넣는다
옷가지 몇을 챙기다가 습관적으로 무릎 구부리던
바지를 가방에 구겨버린다 구두는
오랜 눈치로 발을 감싸며 떨어지지 않는다
기사가 복부비만형 가방을 들어 준다
시동을 거는 순간 두 번을 함께 보낸 겨울이 부르릉,
진저리로 인사를 대신한다
구름은 나보다 사태파악에 둔하다
희멀건 얼굴로 하늘만 긁는다 전입신고서에 이번 주소지를
봄의 변방이라고 기록하겠다 전출지를 묻는다면
악천후의 중심이었다고 추가하겠다
침묵 - 未/12
기흉(氣胸) 든 것처럼
돌확만 한 몸통을 출렁거리며 사내가 운다
거미가 천장을 귀퉁이부터 염하고 있는 영안실
회칠한 벽의 균열들도 조문객처럼 머뭇거린다
울음소리에 익숙한 형광등은 시들어 가는 국화를
이곳의 예의라는 듯 파리한 안색으로 바꿔 놓는다
발인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새벽인데
두 장 넘겨지고 그만인 방명록을 본다
조문이란 마지막이란 뜻을 가슴에 음각하는 일
어른들 몰래 서리태 한 되를 참외와 바꿔 먹은 비밀결사였다고
네 어미와 손톱 밑 까맣던 소꿉동무였다고
동네 할머니들이 밭고랑 필체로 줄지어 섰다
마지막 줄에 너무 늦은 내 이름을 세운다
굳은살 두툼한 손이 된 친구와 다르게 사무원 필체의 내 이름이
서먹하게 읽히고 마음 한 자락도 접혀진다
향은 음습했던 생의 냄새들을 지워 보내는 방법
출렁거리는 친구의 등과 공명하듯 연기도 절룩거린다
어머니 영정은 양보다 순하게 웃고 계신다
양은 가죽이 벗겨지는 순간에도 침묵하지만
새끼를 부를 때는 소리를 낸다던데
젖먹이도 어미를 찾을 때에만 울음소리를 낸다 하던데
묵중했던 내 친구
가을밤에 푹 젖은 산이 되어서 운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듣고 달려왔다 한다
손만 잡고, 끝내 한 말씀 못하셨다 한다
쇠말뚝 하나가 출렁거리는 저 등을 관통하고 솟아올라
내 폐부까지 찔러버리는 것 같다
자원봉사
햇살도 동해(凍害) 입어 푸석하게 흩어져 버리는
4월엔 슬픔이 잘 만져지지 않는다
황사는 타클라마칸을 떠나온 유민처럼 부유하다가
잘못 찾아온 줄도 모르고 창틀에 모여 있다
그들의 입국신청서는 바람에 희석된 필체
방 안 얼굴들과 비슷한 풍화를 겪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
봄비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이들의 언어를 투명한 가루로 건조시켜 버렸는지
실내에 퇴적된 정적은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퇴락했지만, 한때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고
사막의 내지(內地)에서도 물을 길어 올렸던 부족의 대표인 양
안간힘으로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의란 늦은 봄 내복 같은 것
낯선 손님들이 진행하는 수순을 예견하고 있는지
각기 다른 문양으로 침식된 얼굴들이 한가지 시선으로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납작한 방석들은 폐허를 지키는 주춧돌
습곡처럼 변형된 담요를 들어 올리자
명예도 내력도 흔적으로 뒤섞이면 구분할 가치가 없다는 듯
오후 햇살에 살비듬만 반짝거렸다
4월엔 슬픔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목욕탕엔 알몸으로 웅크린 몇몇이 익숙해지지 않는 표정으로
풍화암 절리 같은 척추를 드러낸 채
앞설 것 없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을에 대한 강박(强迫)
돌이켜 보면, 내가 키운 짐승이다
시뻘건 아가리로 들어갈 것은 나의 회의(懷疑)뿐
나무들은 잎을 접고 어둠 속 하나로 뭉쳐지는 데
가로등은 거부 못할 일이라는 듯 환히, 머리를 조아린다
공포는 피하고만 싶던 방향에서 시작되는 법
서쪽만 바라보는 내 습성을 알아챈 저 짐승이
하구언 근처로 서식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제 종족을 맞이하겠다고 도주하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에 족적을 들킬 때마다 흔들린다
이미 몇몇을 집어삼켰다는 증거가 강물에 번들거리는 지금
가능한 도피 방법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
역광으로 찬연했던 억새들이 허리 숙이고
홀로 선 버즘나무도 몸 떨며 제 잎을 떨어트리고 마는 것이
두려움 아니라 철 이른 바람인 까닭을
나는 밀려들 어둠이 황망해 알아채지 못했다
경계병처럼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이
저 짐승의 아가리를 짙은 윤곽으로 강조해 주지만
낭자한 출혈 끝에 먹히고 말 일
자신은 캄캄한 포만감으로 세상을 덮은 채 숙면하는 동안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은
나처럼 웅크린 불면을 공물(供物)로 바쳐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저녁마다
나를 먹어 치우는 짐승을 사육하고 있다
<신인의 말> 폐허를 돌아보며
바슐라르의 불길보다 뜨겁고 푸코를 죽음으로 몰았던 패혈증보다 더 치명적인 텍스트는 무엇인가?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심사평이라고 대답하겠다. 내 필명이 최종 2인이나 3인으로 거론되는 심사평 말이다. 포도나무 아래의 여우처럼, 이해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다. 황색 봉투에 담아 우체국 창구에 넘긴 후 나는 잊어버렸다. 아니, 잊으려 애쓰고 다른 일에 몰두하곤 했었다. 몇몇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니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체국 창구 여직원과 사연이 생겼을 거라며 농담을 했을 만큼 나는 숱한 공모전을 겪었다. 기쁜 소식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내게 남은 건 전화 울렁증이었다. 낯선 번호가 뜨는 순간 가슴은 유조선이라도 뒤집을 듯 요동쳤다. 연중 반복되는 증상이었고 연말엔 끔찍한 강박증에 시달리다가 허탈과 무력감으로 새해 첫날을 맞이하곤 했다.
누가 나를 미련하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문학을 해보겠다는 어느 누구인들 이 심정에 공명하지 않겠는가. 속물 같지만 칭찬받고 싶었다. 싸구려 욕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름깨나 올리는 시인이 부러웠다. 상투적이지만 깊은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란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기제만으로 시를 쓴 건 아니었다. 가난한 막노동꾼 1남 4녀의 외아들이 문학을 선택할 용기는 없었고 나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문학의 길을 택한 시인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가늠할 필요도 없었다. 건축을 전공했고 취직과 결혼 후 아들 둘을 얻었다. 아들로만 살다가 남편이라는 의무가 추가되었고 어쩌다 보니 허리 뻐근한 아비가 되어 있었다.
시는 미라처럼 자신의 존재를 함구하며 기다려 주었다. 삭아 내리기 직전의 마포를 한 겹씩 풀어내자 거짓말같이 심장이 다시 뛰며 혈색이 돌았다. 필사한 노트가 쌓여 가는 재미에 빠져 살던 사춘기로부터 몇 명의 대통령이 바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접어 두었던 꿈을 펼친 셈이다. 10년 전의 시작이었다.
이쯤에서 술 한 잔씩 권해야 도리겠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잔 먼저 올리고 나와 같은 심정으로 심사평을 읽을 분들께도 국수 한 그릇씩 돌리고 싶다. 이렇게 되고 보니 새삼 고마운 분들이 많고 인사도 빠짐없이 해야겠지만 지면보다는 둘러앉아 나누는 대화가 정겹지 싶다. 마지막 당선소감이라는 생각에 후련하다.
돌아보니 황색 봉투 들고 우체국 계단을 오르는 사내가 보인다. 잠시 뒤 사내는 건널목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우람했던 플라타너스가 줄줄이 몰락한 거리를 휘적휘적 걸어간다. 주머니 속 발송료 잔돈을 만지작거리며 어느새 또 다른 시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사내는 필명으로 쓰던 아들 이름을 돌려주고 전영관이라는 본명으로 해방되었다.
전영관
충남 청양 출생. 2007년 하동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2008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시 당선.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ykkjeon@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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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은유가 죽었다* 이수인
당신의 은유가 죽었다.
한 줌 쥐어 화장(火葬)하듯 놓아주었다.
당신을 게워 내기 위해 밤새 여몄던 말의 실밥이 풀린다.
혀를 대보니 짜다.
내가 닿을 때마다 울던 네 몸,
살로 태어난 당신을 정의하는 언명의 태반들과
무책임한 과립형 언술들의 찌꺼기로 썩어 가는 당신,
다음 생엔 부디 비늘이 되어 태어나 주면 좋겠다.
하려다 삼킨 말들이 네 안에 너무 많아 입으론 할 수 없어
차라리 들어가게 해줘. 너 말고, 네가 감춘 돌기들의 말과
뒹굴며 상처에 상처를 더하고 덧나고 터트릴 수 있도록.
네가, 꽃이 되도록.
재주를 버리기 참으로
아까우니, 이리와요
내가
먹어 줄게요.
먹이사슬의 맨 상위에 앉아 도도하게 앞발을 구부리고 턱을 당겨 누운 당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맹수의 혓바닥 같은 촉감. 1회당 39그램,(구체적이고 잠정적이지 않은) 때의 즐거움. 원소 기호로 표기되지 않은 시간의 질량감만큼 가늘고 촉박한 관계의(불명확한) 실선.
비스듬하게 서로의 어깨에 서로의 머리를 걸치고 앉아
반쯤 타버린 몸으로 느린 번져오름을 견디면서 아직 죽지 않았다니,
감사합니다.
내 방의 무수한 단자들과 교접하는 꿈을 꾸고 일어나
플러스와 마이너스 코드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소파에 앉아 등 뒤로 미끄러지는
시간의 느리고 잔인한 교성을 듣는데
선이 없어도 딸깍,
누구인지 비끄러맨 지난밤을 클릭 한 번으로
수거해 가는 소리.
아, 기능적인 청소부들과 리드미컬한 스크래치의 세기.
몸의 열을 당겨 나를 재배치할 수 있다면 좋겠어.
누구와도 눈 마주치지 않고 흙을 핥으며 오로지 내 안의 악취만 맡을 수 있도록.
십자열 풀이가 되고 싶어.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왼손에서 오른손까지,
10포인트로 꽉 들어차는 한 단어 문장을 10자 이내로 해명하겠어.
엿 같은 당신 삶에 닻처럼 매달려서 미안하다.
당신에게 쓰는 편지의 절반을 마침표 하나로 채운다.
어둠이 기척만 훑고 지나간 거리의 얼굴이 속속 귀가 중이다.
나는 매일 피폐했고 언제나 건강했으며 절반은 명랑하고 간절히 변명하였다.
당신 계절의 독버섯을 걸러 내 음용한 감정의 대가는 차고 거칠었으니,
당신에게 쓰는 편지의 나머지는 비운다.
그들의 식기는 어떤 소리도 잉태하지 않는다.
몸을 풀고 일어난 여자의 그물에 걸린 달이 좌로 흔들리며
모래가 되었다. 당신은 느리고 젖은 계절을 가로지른다.
껍질이 단단한 사내의 몬순이 제 바깥의 습기를 머금고
시작되었다.
오후 내내 삶아 말리려는 데 잠을 뒤척이지 못한다.
여름이 갈 지로 흔들리자 술 취한 계집애의 여린 치맛단 속에
바람이 제 씨를 옮기고 불어 나간다.
피다 만 날갯죽지 아래 손을 파묻고 누우니
당신 등 곁, 얼굴을 뒤덮는 모래에 숨을 참고 뱉으며
사내 뱃속의 여자가 태동하였다.
도시는 자리 잡지 못한 자들로 북적이며
상처의 복강에 기억을 밀어 넣고 그들처럼 입덧하였다.
사흘에 한번 꼴로 당신의 출입은
철새의 기척처럼 다정하고 영악해.
달의 둔덕 이편엔
사람들의 가마를 가르는 매미가
365일 하고도 2백 일 동안
쌕쌕 이를 갈며 잠들어
덜 자란 몸의 기척에 일어나 연인을 찾으며
운단다.
엮인 조사들의 바늘구멍 사이로 우주를 담을 것도 아니면서
제 주변에 선을 긋고 빼며 오므리고 벌리다 탈진해 버릴 작정으로
사랑이 생의 전부가 아닌데 그게
뭐라고,
몸을 털고 일어난 여자의 그물에 걸린 달이 우로 흔들리며 바다가 되었다.
이후의 바람은 어깨 너머로 불었다.
문장이 도막 나서 어쩌나 생선처럼 아직
아가미는 쉬는데 숨
물 바깥이 물속인가 눈을
굴려도 도마 위엔 몸 그러니까
머리는
나인데 가령
자르는 내가 잘리는 나의 잘려진 나를
수습하려고 몸의 몸
의 몸
의
몸과 머리
아가미도 없이 나는
몸인 나를
나누고 자르고 분리하는
작용의 작용에 반
작용
현재완료
실평 7평에 팔십오 3천에 육십오 17층
세 대까지 무료주차 높은 천장에 한강 조망권
신혼부부 집 같은데
들어가면서 결혼할까?
바닥을 구르며
웃다
흘린 아침 부스러기
점심 산책 나와 임대 백 평 2층
누군가 연필로 그어 놓은 가로줄 위로 64평 75평
펑퍼짐한 엉덩이의 여자가 브런치 가게 앞에 서서
풀색 A라인 스커트를 펄럭펄럭 태극기처럼
씹는 사람들이 혐오스럽다 이를테면 식욕
도장 찍힌 7층 옥탑
될 일은 되는 거고, (아무리 애써 봐야) 안 될 일은 안 돼
우리는 11년 전에 만나
10년 후에 210km의 속도로 바다에 갈 거야
실평 35 2천에 2백은 관리비 포함
막힌 방이 필요해 삼십에 삼십이점오 삼십오
둥근 벽과 낮은 천장, 유리는 소리를 오해하게 해
연애가 하고 싶어
지금 하는 건 뭔데?
노역
바닥을 구를 듯 웃다
커피가 쏟아진 얼룩
잔망스러운
스커트들의 병치레
당신 없는 당신들의 주거지
당신을 속기하는 일로 바쁘다. 계절은 원형의 띠로 동작한다. 어떤 힘도 감정의 질량에 간섭하기 어렵다. 호흡은 제 차례를 기다리며 멈추고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규칙의 세계가 관계의 실축을 부순다.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건물이 무너진다. 모든 것을 제 중심으로만 돌리는 자전축들의 중력이 서로를 당겼다 버리며 무책임하다. 개인은 자의로 남겨진다. 진공 포장된 텍스트들이 진열되어 팔린다. 과대 포장의 세기는 알맹이가 작아질수록 아름답다.
텅 빈
눈으로 기계 같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 때마다 계산된 말
계획된 동작
사람의 손으로 빚어진
사람들의 우상
묶음 판매되는 전략적 상품들이
진짜를 먹어 치우며 가짜들의 배를 불린다
사실 너희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진짜를 흉내 내며 진짜인 척하는
그림자일 뿐인데
목이 쉰 계집애들아
그 리듬의 리프는 처참하다
기껏해야 1.5mm
허우적거리며
제 몸에 단자를 꽂아 넣은 집열판마냥
아무 때나 긁혀도 좋아
언제든 열려도 상관없어
너는 나를 황홀하게 해
그뿐
너는 나를 소비하게 해
사랑처럼
예, (달콤하고 알량맞은) 설계의 신이시여.
저는 오늘도 나를 죽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비장을 연기하는 얼굴에 배꼽 잡았을 당신에게 존경을 보냅니다.
햄버거라도 미리 시켜 놓을 걸 그랬습니다.
깊이가 폄하되는 세기를 삽니다.
밤이 와 주길 낮 동안 빌었습니다.
불부터 켜고 시작하겠습니다.
어둠과 볼을 마주 대고 앉아
당신의 부재를 묻는다
사랑한다고 말하자
어둠이 눈길을 돌리며 펑, 터진다
그의 등허리는 차갑다
누구의 발길에도 채지 않는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 멈춘 채로 잊어버리자. 시간은 회초리 같았다. 당신의 없음은 정당하다. 내 상처에 약을 바를 필요는 없다. 나를 치워 둔 채 돌아가라. 자물쇠가 낡아 간다. 새는 날개를 퍼덕이지 않는다. 검붉은 멍으로 아프다. 어떤 소리도 잠겨 있어라. 물속에서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 없는 것은 없다. 나를 잃어라 당신. 담배는 타다 꺼진다. 꿈은 거울처럼 잊혀진다. 기억의 방이 닫힌다. 누구도 통곡하지 않는다. 잘린 문장들의 단락을 비운다. 할퀸 자국들이 여문다. 어떤 씨도 발화하지 못한다.
나는 결국 편안하다.
준비는 끝났는데
누구도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커피는 차고
시간은 뜨겁다
어떤 명사는 날카롭고
어떤 숫자는 둥글다
밖은 간략하고
안은 거칠다
생각은 아프고
기억은 생소하다
0.7cm
15초
인사도 나눌 수 없다
생각의 계곡에 돌풍이 불어 잠을 깬 아이들이 수군거린다
그 여자는 미쳤어
어둠이 담긴 눈으로 검은 눈물을 흘린데
지난밤 꿈처럼 붉고 광채 나는 살 냄새
풍기는 보들보들한 슬픔
광목 같은 머리카락엔 소리의 열매가 맺힌데
걸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돌아보면 잠잠한 저 별 같은 눈
마주치면 슬픔이 옮는다더라
전염병처럼
낮이면 몸을 웅크리고 누워 꿈을 낳는데
색도 소리도 없이 매끈하게 흙과 교미하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더러운 것
눈부시게 하얀
발바닥
속까지 비춰 보이는
투명한 소리들
찰랑거리는 은 귀걸이
허공을 당겨 덮은 숨소리
마침표를 찍어 줘
새벽 4시 6분 겨울바람처럼
아픈 것은 무엇도 잠들지 못하는 시간
제 생각의 책장을 뒤척거리며 상처를 핥고 벌리며 피를 마시는 때
달팽이 같은
여자의 목소리
어느새 아이들의 잠 바깥
■
숨겨진 여자는 오늘도, 나풀나풀 남색 차양을 들어 올리며 하늘을 향해 얼굴을 찡그린 채 하품을 하고 무료한 표정으로 사내를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으며 늙는다. 아무 때나 찾아주세요. 당신의 방문은 내 시간의 철창. 안에서 밖을 가두고 밖이 안으로 휘는 펜로즈의 계단. 굴려 올리고 미끄러져 넘어지는 시시포스의 바위. 여자는 턱을 괴고 앉아 시간의 터울을 접는다. 사내는 돈도 지불하지 않는다. 합리적으로, 여자는 냉장고를 채우고 사내의 담배를 산다. 사내의 시간값은 비싸다. 여자는 사내가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
탁자가 너무 높아 허리가 아프다
문장 사이의 교묘한 실밥이 끊어진다
양수는 터지지 않았다
미끌거리는 혀의 촉감이 낯설다
무당 같았던 쓰기의 촉감이 돌이켜지지 않는다
멈추고 길을 더듬다 길을 지운다
아무것도 밟히지 않는 때가 계속된다
연주자가 손을 다쳤다
악기의 활이 끊긴다
말의 도막이 냄비 안에서 끓는다
불 바깥에서 식는다
하루의 틈에 걸려 썩는다
비누칠을 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형평의 텍스트 아래 (이불 덮고) 열린
괄호의 의기양양한 제스처 (포즈 잡고)
누구의 입에서 입으로,
죽어 가는 것은 너도 나도 아닌데
마우스 투 마우스.
때때로 구전되는 입맞춤의 연인들
(내부에) 썩지도 (지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낡은 이야기들의 예제.
(함축적인) 도열의 상수.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의 가치는 그것이 가진 감동(의 잠재력)인 것 같아.
01.
너는 막 집안 가득한 의구심의 공기를 휘저으며 나를 떠난다. 천 원짜리 커피가 새는 재활용 쓰레기 봉지를 든 나를 위해 닫힌 문을 열고 닫으며, 가방 안의 3단 접이 우산을 꺼내 들고 쓰진 않은 채, 내일 봐.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네 뒷모습이 기억나지 않아. 누군가 멈췄다 떠난 후의 공기는 왜 이렇게 무섭게 건조한 걸까. 문장이 길어질수록 내 수명을 따먹히는 것 같아. 어둠을 더듬다 만난 사람의 실루엣을 오려 걸어 두었어. 아무것도 드러내기 싫은데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너를 쓰겠다고 좋아하던 나는 어느새 함박 시들어 이만큼 구겨진다. 철없이 말을 쓰고 휘둘렀기 때문이야. 흐름이 느껴져? 아니, 잊어버렸어. 그걸로 충분해? 버스를 탄 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넘어지는 이유는, 이야기를 걸고 있는 나 때문인지도 몰라. 그러니, '진짜 마녀들은 누구도 죽지 않았어.'
02.
사람이 다 그래? 뭐든 허용될 것 같으면 사람은 다 그래. 그래서 서로에게 지옥일 수밖에 없는 거야. 빵을 굽다 태웠는데 크림치즈를 바르고 먹었어. 잠들었는데, 들어갈 방법이 없다며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어.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다 주저앉는다. 무게 중심을 맞추지 못해 쾅쾅 제 안과 부딪치며 돌아가는 세탁기가 보였어.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발을 접질린 줄도 모르고 한걸음에 뛰어 내려와 기어이 현관문을 열고 말았단 이야길 했던가 하지 못했던가. 층계참에 주저앉아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시간이 꽤 흘렀길 바랐지만 잠이 든 지 겨우 10분 지났더라. 조롱당하는 기분이었어. 시간의 미세한 단위를 피부로 느끼는 강박증 환자가 된 것 같기도 했어.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내 자신에게 말했어. K가 기억난다. 스물두어 대쯤 뺨을 때리던 얼굴이 일그러질 때까지 나는 울지 않았고,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었는데.
03.
그는 자신이 삶의 부록이라고 말했지.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떤 시간의 부스러기인 걸까. 기껏 지나 버린 현재를 되풀이하는 것뿐이라면, 다시 돌아온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여기 앉아 곰곰 한 시간 전을, 하루 전을, 한 달 전을, 1년 전을 화라락 넘겨 후루룩 삼키지. 면을 불고 국물이 식었어도 데이지 않게 조심해. 끓는 점을 넘긴 것들의 차가움이 속을 태우는 법이니까.
04.
나는 지금 한 발씩 전진하고 있는 걸까, 후퇴 중인 걸까. 횡단보도 건너편 편의점에 다녀왔어. 파란불 하나를 일부러 놓치고 라이트를 켠 차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다. 안전선을 지켰어야 했던 걸까? 어느 도로의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렸기 때문이지도 몰라. 속도를 너무 높였거나 길을 잘못 들었을 수도 있어. 기름이 떨어져야 할 텐데, 어디가 고장 나야 긁히고 깨진 채 폭주하는 이 미친 달리기를 끝낼 수 있는 걸까. 낡은 구식 수동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의자에 삼켜질 것처럼 앉아 있던 노란 여자 아이가 생각나. 그런 녀석이었어 당신은. 고저의 차가 어찌나 컸던지 놀라고 다독이며 때로 잊고 잊혀지기도 했었구나. 그 시절의 우리는 제 너비를 꽉 채우고도 넘칠 것처럼 찰랑거렸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마 어느 시절의 타는 듯한 건기를 내 잔을 비워 견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길고 깊은 여름은 다시 길고 깊은 우기를 부르고, 그렇게 (어쩌면) 내 스스로 꼬리를 물며 도는 우로보로스가 되는 일인 거야. 정확한 뜻도 모른 채 사용하던 말들의 살갗이 느껴져. 차갑고, 뜨거워 소스라친다. 소리의 중심에 누워 웅크리면 착하게 잠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대체 그곳은 어디인 걸까.
05.
내 존재감의 불투명한 강선이 흔들리며 만드는 자국들은 그대로 얼룩이 된다. 일찍 잠들었다 깼어. 꿈속의 내가 넘어지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숨겨진 별들이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건 어쩌면 나의 안이었을지도 몰라. 따뜻하고 안정적인 무언가를 불씨처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선 어떤 냄새가 나는 걸까.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엔 꽃이 자랄까 숲이 일어설까. 복선이 아닌 교차로를 지나 횡단보도 세 개를 지그재그로 넘어야 집이 보인다. 문턱에 걸린 남자는 전화기를 두고 내릴 줄 몰라 정체되었어. 마음의 관절마다 비가 내린다. 어떤 기억은 잠기고 또 어떤 기억은 유실되는 중이야. 알면서 잃는 일이 영화 같다. 문장은 예언처럼 쓰이고 말의 기후는 건조하다.
이 남자 가슴은 동굴 같아요.
바람이 불어요.
물소리도 들려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길이 좁아 오도 가도 못해요.
머리를 얹고 누워 있으면,
무르고 서늘해서 아늑해요.
함정 같아요.
무덤 같아요.
* 편집자 주 : 본디 제목이 없는 장시(長詩)이나 편의상 첫 행을 제목으로 삼았다.
<신인의 말> 어둠 속의 손
홍대에서 강남까지 지하철을 타고 막 도착해 앉았습니다. 오후 6시의 지하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자리다툼으로 치열해집니다. 약탈할 것이 없는 약탈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삶의 자리다툼은 언제나 이런 모양입니다.
얼마 전 <어둠 속의 만남>이란 전시를 보러 가려고 결심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접촉과 침범을 싫어하는 저로선 꽤 큰마음을 먹었던 거예요. 결론을 말하자면, 결국 갈 수 없었습니다. 잡아야 할 손이 아니라고 으레 겁을 먹어버렸던 겁니다. 그때 제 곁의 사람이 제게 그랬습니다. 어둠 속에서조차 잡거나 의지해선 안 되는 손을 가진 사람.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오후 6시의 지하철과 자리다툼에 대한 이야기로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과 있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여자와 생전 처음 지하철을 타는 남자가 퇴근길 지하철 2호선을 탑니다. 여자는 그곳에서 자신이 포기해 버렸던 그의 손과 만나죠. 생각하지도 않았던 배려에 대해 여자는, 그가 생각보다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인 것뿐으로 자신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 씀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여자는 자신에게 온 특별함들을 받아들일 방법을 그렇게밖엔 모르는 사람인 겁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11월 1일입니다.
이수인
1973년 전남 순천 출생. 대학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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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 심사평 】
응모자의 수는 전년도에 비해 20퍼센트 이상 증가하였으나 응모작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10여 편의 응모작을 제출해야 하는 바, 앞의 한두 편과 나머지 응모작들의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다. 1차로 선별된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중에서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고심하게 만든 세 사람의 응모작들에 대한 소감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장유정은 사물의 움직임을 언어의 감각으로 조련해 내는 솜씨가 참신하다. 가령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뚫는 과정을 "소리는 점점 둥근 모양으로 변한다/(……)/긴 부리를 넣고 다니는 날개의 공구통" 같은 대목이나 "훗날 나무에 귀를 대면 털 없는 허기가 들릴 것이고"와 같은 부분, 그리고 "저 소리 다 그치면 글자들은 조용한 페이지를 얻는다."(「딱딱거리는 비문」)와 같은 시행에서 그러한 증거를 찾아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한 편의 시와 어깨를 겨루거나 그것을 압도하는 다른 응모작을 찾기가 어려운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전영관(응모명: 전형주)은 무엇보다도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다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정서를 절제하고 절제된 정서를 언어로 표현할 때 또 한 번 가다듬는 상상력의 운용 방법이 돋보인다. 그는 사물의 핵심을 거머잡는 관찰력도 구비하고 있다. 고양이의 날선 눈매를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그늘 제조법」)에서 그러한 관찰력을 읽어 낼 수가 있다. 이삿짐의 훼손을 "마지막까지 견뎠을 책상 나사못이/참을성을 뚫고 튀어나왔다 새벽의 관절이/나와 함께 삐걱거릴 때에도 자신의 자세를 지탱했을 것이다"(「바람의 전입신고」)라고 묘사할 때 가구를 의인화하는 '관절'에 대한 표현도 그런 관찰력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최종심에서 가장 주목하면서도 망설였던 응모자는 이수인이다. 그는 단 한 편의 장시(長詩)를 제출하였다. 그 작품은 제목도 불분명하고 시행의 배치도 파격이었으며 전체적인 분량도 A4 용지로 20페이지에 이를 만큼 많았다. 우리를 사로잡은 그의 솜씨는 무엇보다도 "당신의 은유가 죽었다./한줌 쥐어 화장(火葬)하듯 놓아주었다./당신을 게워 내기 위해 밤새 여몄던 말의 실밥이 풀린다./혀를 대보니 짜다./내가 닿을 때마다 울던 네 몸,/살로 태어난 당신을 정의하는 언명의 태반들과/무책임한 과립형 언술들의 찌꺼기로 썩어가는 당신,"이나 "하려다 삼킨 말들이 네 안에 너무 많아 입으론 할 수 없어/차라리 들어가게 해줘. 너 말고, 네가 감춘 돌기들의 말과/뒹굴며 상처에 상처를 더하고 덧나고 터트릴 수 있도록./네가, 꽃이 되도록." 같은 부분에 담겨 있는 언어에 대한 자의식들이다. 그것들은 과감하고 정직하며 진지하고 치열하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신뢰하기로 하였다.
최종 심의 결과 서로 다른 시적 개성을 확립하고 있는 전영관과 이수인을 공동 당선자로 선정하였다. 축하하며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_ 고진하(시인), 이경호(문학평론가)
—《작가세계》2011년 겨울호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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