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문학제추진위원회(회장 윤덕점)는 예심을 통과한 15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오랜 시간 논의한 끝에 이병률 시인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와 이홍섭 시인의 『검은 돌을 삼키다』로 압축하였고, 삶의 내면이 잘 녹아있는 이홍섭 시인의 『검은 돌을 삼키다』를 최종 선정했다고 4일 밝혔다. 제6회 박재삼문학상 심사는 길상호, 안현미 시인이 예심에 참여하고, 남진우, 전동균 시인이 본심을 맡았다.
이홍섭 시인은 1965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90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각각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등과 산문집 『곱게 싼 인연』을 출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시인시각 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강원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박재삼문학제 추진위 측은 등단 10년 이상 된 시인을 대상으로 박재삼 시인의 서정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전년도(2017년 1월~12월)에 발간된 모든 시집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다른 문학상을 이미 수상한 작가는 배제하는 원칙으로 심사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이시영, 이상국, 이문재, 고영민, 이정록 시인이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올해 박재삼문학제는 22일과 23일 이틀동안 박재삼문학관 일원에서 박재삼 청소년문학상, 학생 및 일반인 백일장, 박재삼 시세계 조명 문학특강, 박재삼시 암송대회, 박재삼문학상 시상식 등으로 진행된다. 박재삼문학상 시상식은 23일 열린다.
한편, 박재삼 시인은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자랐으며,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았고,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 ‘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현대문학신인상, 문교부 문예상, 인촌상, 한국시협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평화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조연현문학상, 제6회 올해의 애서가상 등을 수상하였고, 은관문화훈장(1997) 등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춘향이 마음’, ‘천년의 바람’, ‘뜨거운 달’ 등 15권의 시집이 있다. ‘아름다운 삶의 무늬’ 등 9권의 수필집을 비롯해 다수의 시선집을 펴냈다.
문단에서는 박재삼 시에 대해 “가난과 설움에서 우러나온 정서를 아름답게 다듬은 언어 속에 담고,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인은 1997년 지병으로 64세 나이로 타계했다. 박 시인의 묘소는 지난해 유족의 뜻에 따라 서울 근교 한 가족묘원에 이장됐다.
아버님, 요즘 몸은 좀 어떠신지요? 고질이 된 허리병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지훈 조동탁 시인의 이름을 기려 만든 지훈상의 문학 부문 수상자로 제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가장 먼저 아버님을 떠올렸습니다. 아, 김천에 계신 아버님이 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도 물론 기뻐하시겠지만 제가 대학에 취직자리를 얻었을 때도 아버님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이번에도 반신반의하며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만큼 아버님 속을 썩이고 애를 태운 자식이었습니다.
저는 머리가 마구 세어 가는 요즘 들어 더욱 자주, 나한테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시인이 될 꿈을 가졌으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은 저한테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일일이 챙기는 능력을 키워주셨고,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를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을 길러주셨고, 사물의 본질을 뚫어져라 투시하려고 노력하게끔 이끌었습니다. 고통의 뜻을 알고 싶어서 시를 쓴다는 제 나름의 시론도 아버님이 안 계셨더라면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소월의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니셨다는 아버님, 아버님이 누런 원고지에 쓰신 습작소설의 줄거리를 저는 지금껏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직업 경관이 되면서 문학의 꿈을 접으셨지만 시인 조지훈의 이름은 아버님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조지훈 선생은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승무〉〈고풍의상〉〈완화삼〉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시인입니다. 그러나 지훈 선생은 탁월한 문학론을 전개하여 저를 일깨워준 분이었습니다. 지훈 선생의 문학론은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순수문학론, 문학정신의 지향점이 된 민족문학론, 민족문학의 실천적 방법으로 삼은 고전주의적 문학론, 이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지훈 선생이 쓰신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시는 경향시에 대한 정통시요, 순수시의 영역은 정치, 종교, 사회, 어디에도 갈 수 있는 무제한이나 다만 시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제한이다.” 이 말씀을 저는 시라는 것이 공리적인 가치나 정치·종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 혹은 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훈 선생의 문학론은 제가 평생을 다해 퍼내야 할 우물 같은 금언이라 생각합니다. 우물 같은 말… 저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당선소감을 다음과 같이 썼었지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문자행위의 출발점은 이것이다.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할 때,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원고지를 대하는 일은 구원이 아니라 구속이었다. 줄기차게 꾸짖는 200개의 네모난 입들. ―너는 결코 떳떳하지 않아. 너는 벌써 물들어 있어.
필요한 것은 의지였으며 부족한 것은 신념이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더 겪어야 나도 하나의 성채를 가질 수 있을지. 보다 깊은 우물의 의미와 열려진 세계의 끝을 찾으려는 노력. 명암에 대한 성찰에의 길을 이제 떠나야 한다. 언어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내 정신은 늘 부활을 꿈꿀 것이다. 고통마저 사랑하기 위하여. 이 땅 이 시대의 당신들을 벗삼기 위하여.
“보다 깊은 우물의 의미”는〈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내를 이뤄 바다로 가나니” 하는 대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는 등단 무렵이나 지금이나 보다 깊은 우물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고, 저의 방황은 아마 평생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비가 좀 안 온다고 금방 고갈되는 시내가 아니오, 며칠 퍼붓는다고 금방 콸콸 흐르는 계곡도 아니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물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중국에 가서 우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용정의 윤동주 생가 터에 있는 우물은 너무 깊어서 시 〈자화상〉에 나오는 그 우물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윤동주는 그 인근 어디서 우물을 길어 올리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우물이 지하의 세계라면 별은 천상의 세계입니다. 우물은 당연히 차가운 물의 세계이고 별(항성)은 타오르는 불의 세계입니다. 우물은 한계가 있는 깊이의 세계이고 별은 무한정한 넓이의 세계입니다. 어느 한쪽도 놓쳐서는 안 될 세계이지요, 그리고 둘은 모두 유동의 세계이며 밤에 눈뜨고 있습니다. 깊은 우물은 인간을 살리고, 밤하늘의 별은 길 잃은 자를 인도합니다. 우물물을 퍼올려 마시며 윤동주 시인은 별을 보았을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과〈서시〉에도, 지훈 선생의 시〈승무〉와〈絶頂〉과〈山上의 노래〉에도 나오는 별은 순수함과 영원함을 상징하지요.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너머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별들이 빛나고 있을까요. 만유인력에 의해 수축을 거듭하다 폭발하는, 질량이 큰 별을 초신성이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별이 수축하면 거대한 압력이 중심으로 몰리다 마침내 고온의 압축 가스가 터져 나오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 그 별은 숨지고 만다고 합니다. 수많은 별들은 놀랍게도 숨거두는 그 순간까지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팽창하고 있고,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계가 팽창하고 있고, 은하계를 포함한 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허블의 우주 팽창설은 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증명된 것입니다. 제가 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버님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앞에서 요즘 들어 자주,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시인이 될 꿈을 꾸었으랴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상시집이 된《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아버님께 헌정한다고 자서에서 말씀드렸었지요. 제목에 ‘아버지’가 들어가는 시도 다섯 편이나 됩니다. 지난 설에 갖다드린 그 시집,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시편 속에서 아버님은 알코올 중독자였다가 식물인간이 되셨다가 식솔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둡니다. 아버님은 술을 간혹 드시긴 했지만 장이 안 좋으셔서 과음을 하면 꼭 배탈이 났었으니 알코올 중독자가 될 턱이 없었습니다. 취하신 모습도 1년에 고작 서너 번,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아버님은 5~6년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아지시긴 했지만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더더구나 지금 생존해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시를 쓰면서 아버님을 부엌칼을 들고 자기 식솔들을 협박하는 인물로 그렸고, 자발적으로 배설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렸고, 뇌사 상태에 빠뜨렸다가 결국 임종을 순간을 맞이하게 합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심을 아는 사람들은 저의 사기술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섯 편의 시는 그 어느 독자보다 아버님께 읽어드리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님은 이 녀석이 제 애비가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되기를 바라서, 또는 어서 빨리 죽기를 바라서 이런 시를 썼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그런 시를 쓴 이유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아버님은 그 시집을 분명 읽으셨을 테지만 제가 1991년에 냈던《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를 읽으셨을 때처럼 격노하지 않고 지금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 시집을 읽으시고는 당장 김천에 내려와 첫 글자부터 끝 글자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다 읽으라고 불호령을 하셨는데 10년 세월이 아버님의 몸에서 기운을 다 뺏어갔나 봅니다. 아버님은 제가 이번에 낸 시집을 읽으시고 ‘이놈이 그때 그렇게 집을 뛰쳐나가곤 하더니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버님, 저는 제가 생각해도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식입니다. 이번에 드린 시집을 읽고 많이 괴로워하셨을 테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을 테지만 그 시들은 제가 아버님을 이해하려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아버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 선영이의 영혼이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린 뒤, 저는 의지처가 없어 1년 넘게 성당에 가서 죽어라 하고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제 기도의 내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선영이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저는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청을 들어주실 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런 시를 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60억의 인간이 살고 있지만 아버님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 걸린 시간이 17년, 선영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된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제가 등단한 것이 1984년이니 시인이 된 지는 올해로 19년째로 접어듭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20년 가까이 시를 써오면서 시집을 일곱 권 냈습니다. 첫 시집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세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시 세계의 변모 양상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즐겨 쓴 시어는 분명히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별’입니다. 제가 별이란 낱말을 화두로 삼고 살아왔고, 이번 시집의 제목도 이런 식으로 정한 이유가 있지요.
저는 고교 3년간의 과정을 혼자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무렵의 예비고사라는 것은 인문계도 과학의 네 과목(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이 다 출제되어 저는 각종 화학 방정식과 물리 공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푸느라 골방에서 전전긍긍해야만 했습니다. 혼자서 깨쳐나가는 공부인지라 진도도 안 나가고 싫증도 자주 났지만 지구과학 과목 중 지구의 역사와 천체 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학자들은 1936년에 큰곰자리에 있는 성운이 집단을 이루어 매초 4만㎞의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속도는 광속의 7분의 1에 가까운 끔찍한 속도입니다. 이러한 우주팽창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G.E. 르메트르의 빅 뱅(big bang) 이론의 바탕은 우주가 태초에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어리였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거대한 불덩어리였던 물질이 대폭발을 하였고, 그 파편들이 성운을 이루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이 우주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저는 전율을 느끼곤 했습니다.
지구과학 교과서에 설명되어 있는 케플러의 법칙, 허블의 상수(常數), 지구의 역사, 혜성의 존재, 별의 생성과 소멸… 아아, 광대무변한 우주는 이승하란 이름을 갖고 있는 내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고생대 중 가장 오랜 시대라는 캄브리아기는 5~6억 년 전에 해당되니 태양계의 지극히 작은 혹성, 이 지구의 역사만 하여도 얼마나 유구한 것입니까. 하물며 이 우주의 역사는 앞으로 얼마나 유구할까요. 우주의 시간과 넓이가 이 정도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 인간의 삶의 양태란 하루살이처럼 불을 보며 달려드는 꼴이지요. 반드시 죽을 목숨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서슴없이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은, 지구 생성 이전부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별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은하계만 하여도 300억 개 이상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은하계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인데 1광년은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의 6만 3080배라 하지요. 이 넓은 우주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우리 인간은 100년도 못 되는 생을 살면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쾌락을 맛보기 위해, 온갖 죄악을 다 범합니다. 인류가 저질러온 죄악의 수야말로 이 우주의 별보다도 많을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울적할 때면 별을 보았습니다. 별을 한참 보고 있으면 슬픔이며 설움같은 것은 점차 사라져 마음이 평안해지고, 계속 보고 있으면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린 시절, 아니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저는 별을 통 볼 수 없었습니다. 집이 지하실이다 보니 마음먹고 골목길로 나서지 않는 한 별을 볼 수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별에 대해 더욱 애착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생의 이력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어 왔다고 생각하시곤 자포자기한 모습을 자주 보이셨습니다. 말단 경찰관으로 산골 지서를 전전한 십수 년 세월에 남은 것은 여전히 적수공권이었지요. 아버님이 곧잘 내뱉으신, “이렇게 사느니 이놈의 집구석 불지르고 우리 다 죽어뿌리자”라는 말을 나이 마흔 셋이 된 지금 저는 감히 이해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영이가 스물 네 살 때 저렇게 되자 아버님의 불같은 성격도 조금씩 잦아들어 갔습니다. 거식증과 실어증의 딸을 바라보는 아버님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실려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향한 제 증오심에도 조금씩 측은지심이 실리지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고함소리보다 더 듣기 괴로웠던 어머님의 오랜 통곡과 선영이의 숨죽인 울음을 피해 저는 지하실 우리 집을 빠져나와 밤의 골목길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곤 했습니다. 밤하늘에 흩뿌려져 있는 별은 제게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처럼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곤 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별은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별을 보면서 저는 어른이 되면 밀항을 해서라도 이 지옥 같은 집을 떠나리라 생각했었지만 저는 고등학교를 딱 두 달만 다니고 집을 뛰쳐나가 그 뒤 몇 년 동안 사고뭉치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무척 어려워졌고 저의 대인공포증도 심해져 학원에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도 3년 반을 이 도시 저 도시 떠돌며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악동이었습니다. 다행히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합격했지만 바로 1년을 휴학했습니다. 불면증과 신경성 위궤양에 관절염까지 겹쳐 대학시절도 투병의 나날이었습니다. 약 없이는 하룻밤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몇 달이 이어져 몇 년이 되었고, 구토증세 때문에 밥을 먹다가 호흡을 가누는 날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몇 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관절염 때문에 약을 5년이나 먹고 물리치료를 수차례 받았던 것도 기억하시지요?
아버님,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저는 심한 말더듬이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잘 아는 사람 앞에서는 간단한 의사 표시를 하는데 낯선 사람한테는 말을 마구 더듬으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대학시절, 발표는 늘 제 몫이었습니다. 이놈의 말더듬이를 고쳐보고자 필사를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시와 소설을 쓰는 법을 배웠고, 친구도 사귀었고, 명정의 상태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저에게 시 창작 기법만을 가르쳐준 곳이 아닙니다. 1980년을 겪은 대학생 치고 ‘낭만’이란 말의 뜻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인간은 낱낱이 떨어져 눈을 빛내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동물이며, 공동체의 일원임을 뼈저리게 알게 한 대학 4년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고통은 동시대의 아우성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고민을 침소봉대했던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지훈 선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그렇지요. 지구에서 보아서 별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별 스스로는 자기 몸을 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어느 누구와도 똑같이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별이란 존재를 더욱 가슴 벅차게 받아들이게 되나 봅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래서 영원의 세계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는 종교를 신봉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또한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 시대 현실 사회의 질곡을 끌어나고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는 전세계 폭력과 광기의 양상을 그렸고, 생명이 물건으로 뒤바뀌는 아픈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많이 쓴다고 남들이 욕을 하여도 쓰지 않을 수 없어 썼고, 시가 거칠다고 비난하여도 쓰지 않을 수 없어 썼습니다. 공부가 부족하여 남들이 쓴 시를 지하철을 타고서도 버스 속에서도 읽었습니다.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육유라는 시인은 생애 2만 수의 시를 써 1만 수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몇 해 전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선정한 10대 시인 중에 그가 들어간다고 하지요. 저는 문리가 언제 트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때까지 줄기차게 연구하고, 쓰고, 고치고, 발표하겠습니다. 샘이 깊은 물이라야 가물에 아니 마르지 않습니까. 자신을 불살라야만 밤하늘을 빛내는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앞에서 외람된 말이 되겠지만 저는 제 수명의 10분의 9를 살았는지 100분의 99를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서 읽고 쓰겠습니다. 그럼 그 언젠가 사후에 남을 단 한 편의 시는 완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직 그런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아버님, 저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생에 대한 절망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말입니다. 수상의 영광을 누리게 된 오늘,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연민할 수는 있다고. 오늘 제가 누리는 이 기쁨과 영광은 전적으로 아버님의 몫입니다.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을 얼른 뵙고 싶습니다.
2002년 6월 15일
소자 승하 올림
제2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상의 문학 부문 심사위원들은 지훈의 높은 지조와 선비정신, 동서양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겨레문화의 전통과 현대에 대한 애정이 본 상을 통하여 계승 발전되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문학의 위상이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심사위원들은 2001년 3월 1일부터 2002년 2월 28일까지 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하여 작성한 목록들 가운데 30여 권의 작품집을 선정한 후, 이를 다시 심사위원 각자가 검토한 결과, 최종 수상작 후보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송찬호,《붉은 눈, 동백》
염창권,《그리움이 다시 힘이 된다면》
이승하,《뼈아픈 별을 찾아서》
이상 세 권의 시집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장시간에 걸친 논의를 거쳐 이 가운데 이승하 시집의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두 시인의 시집에 나타난 시세계도 물론 독자적인 개성과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승하 시인의 시집에 나타나는 가족사를 근간으로 하는 내밀한 세계, 한국인의 기상과 정신에 대한 남다른 시각과 애정, 한문학을 중심축으로 하는 동양 정신, 세계사를 이끌었던 중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시적 형상화의 작업 등을 심사위원 전원은 높이 평가하여, 이 이승하 시인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승하 시인의 부단한 창작 활동과 시에 대한 열정 및 문단 활동도 그를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후 지금까지《사랑의 탐구》(1987), 《생명에서 물건으로》(1995), 시선집 《젊은 별에게》(1998)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시론집 《한국현대사와 풍자의 미학》(1997)과《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1999), 《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2001) 등 여러 권의 시론집을 출간하였으며,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2001)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시단을 활성화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은 지속적으로 훌륭한 시작품을 발표해 왔고, 시론과 평론 분야에서 높은 열정과 애정을 지니고 있는 이승하 시인의 시집《뼈아픈 별을 찾아서》가 지훈의 문학정신에 가장 근접한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2회 지훈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결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