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찌개가 끓고 있는 밥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텅텅 비어 있던 배 속이 밥알 대신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차올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가 있구나. 우습지만, 당선 연락을 받고 처음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달려와 볼에다 마구 뽀뽀를 해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금세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무엇을 써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요.

시인이 된다는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것 사이에 이토록 깊은 거리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간밤의 꿈에서 누군가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받아주지 않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가 시였을까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아직 텅 비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시 쓰기에 방점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투고했던 글이었습니다. 그 방점이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놓으면 온다는 이치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길을 숙명이라 믿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 않게 써나가겠습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셨던 박주택 선생님, 김종회 선생님, 서하진 선생님.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시의 길을 알려주셨던 정우영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격려와 확신을 주었던 이체, 강진, 동운. 주모동의 단테. 문예창작단의 선후배들. 당신들이 제게는 써야 하는 이유들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인 용준, 한상, 지홍, 경록, 정훈. 내일도 오늘처럼 끈끈하게 살아갑시다. 지금은 이름을 부르기 힘든, 하지만 언젠가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는 그에게도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절망과 방황을, 성장과 배움을 당신을 통해 겪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나 자신보다 아껴주는 금희와 부모님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갓 태어난 기분입니다. 집에 돌아가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 돋보여

 

어느 해보다 많은 응모작을 보며 새롭고 다양한 개성과 시세계에 대한 기대 또한 더욱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 가운데 이소연의 ‘활과 무사’ 외, 노정균의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 외,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 외로 의견이 좁혀졌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우선 언어 장인으로서의 기량과 그것을 삶의 지렛대로 끌고 가려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최근 한국시에서 자주 지적되는 산문화, 언어 낭비, 소통의 문제도 비교적 잘 극복해 가고 있었다.

이소연은 ‘활과 무사’ ‘늑골이 빛나는 발레 교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감각적 투시, 대담한 언어 구사로 산뜻함을 드러내었고, 노정균은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와 ‘입양’을 통하여 우리말의 어미를 “…다.”로 끝내지 않고 이어지는 각운을 통하여 사유가 리듬을 불러오는 작법의 시도를 보여주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주목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 또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보탰다. 뱀처럼 섬뜩한 이미지의 ‘아야와스키의 시간’, 태어날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앓아 주렁주렁 매달린 ‘몰식자(沒食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보았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향한 탐색과 언어 실험자로서의 패기가 지나쳐서 억지스러운 조어가 이물(異物)처럼 박혀 있는 것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시란 사물과 사유를 언어로 갈고 닦아 가장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삶의 타성과 시류와 진부에로의 수압을 잘 견뎌내어 부디 좋은 시인으로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 조정권, 문정희 시인

 

728x90

 

 

조련사K /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초심으로 돌아가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연말 캐럴 송을 들었지만 올해의 캐럴은 유난히 따뜻한 음절로 들립니다. 상처받으면 혼자 공상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좋아하던 제가 이렇게 보상을 받는군요. 세상의 모든 관계들과 사물들에게 감사합니다.

 

집 근처에 있는 동물원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자주 갔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개최하는 동물교실을 수강 신청했습니다. 염소에게 풀도 주고 물개들에게 생선도 던져주며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련사를 보면 동물들은 달려왔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는 어느새 컸고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나는 여전히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새장 속 독수리, 철창 속 호랑이, 돌 위에서 앞만 멍하게 바라보는 곰 식구들. 그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였기에 야생을 그리워하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동물원 입구에 서 있던 나뭇잎이 휘날리고 머리 위로 나뭇잎 왕관이 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동물원을 다 돌고 나올 때가 되면 어느새 마음이 편해져 겸손한 내가 오만했던 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미흡한 제 글을 뽑아주신 조선일보와 조정권, 문정희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문학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용기를 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이승하 선생님께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친구 미정, 옥련, 미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제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이 내린 축복 같은 딸 수연과 오랜 시간 묵묵히 견디어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초심으로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nefing.com

 

 

 

[심사평] 치밀한 관찰과 묘사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 곳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불통을 어루만지다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 심사위원 문정희·조정권 시인

 

728x90

 

 

유빙(流氷) /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저를 독려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지 않을 때,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을 때, ‘소통은 거짓과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조금씩 버리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만큼 타인의 구원도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대한 거절을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이에서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더디게 쓰더라도 그만두지는 않겠다. 시 한 편과 한 편 사이에 열 길 낭떠러지가 있음을 잊지 않겠다.

 

한 줌의 시를 건져 올려 주신 문정희,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저를 독려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선후배님, 동학들께 감사드립니다. 화요팀 선생님과 문우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계신 스승들과 가까이 있는 지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시의 시작이자 끝인 할머니, 오래 사세요. 은영아, 사랑해.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nefing.com

 

 

 

[심사평]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눈 돋보여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을 찾긴 힘들었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임여기의 면접관’, 정승기의 실종’, 이재흔의 스파이더맨의 후예’, 이도은의 아주 식물적인 꿈’, 신철규의 유빙5편이었다. ‘면접관은 면접관과 면접인 간의 관계 대립을 긴장되고 설득력 있게 고조시켜나갔으나 결구 부분이 너무 안이했다. ‘스파이더맨의 후예는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나타냈으나 제각기 다른 일상의 벼랑 끝에서 한 번씩은 실족했던 사연들이같은 표현이 산문적이고 진부했다. ‘실종또한 현대인의 실종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산문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아주 식물적인 꿈은 식물적인 꿈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체적 양상이 불명확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 결국 당선작은 유빙으로 결정되었다. ‘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한국시단의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

 

- 심사위원 문정희· 정호승 시인

 

728x90

 

 

폴터가이스트/ 성주은

 

 

하늘은 별을 출산해 놓고 천, , 히 잠드네

 

둥근 시간을 돌아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어 동구나무처럼 서 있다가 숨 찾아 우주를 떠돌던 시선은 나를 더듬기 시작하네 씽끗, 웃다 달아나 종이 인형과 가볍게 탭댄스를 추지

 

그들은 의자며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고 가끔, 열쇠를 집어삼켜 버리지 그럴 때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울곤 해 스스로 문이 열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릴 때 화장실 문은 물큰물큰 삐걱대며 겁을 주기도해 과대망상은 공중으로 나를 번쩍 들어올리지 끊임없이 눈앞에서 주변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조였다 풀어져

 

골치 아픈 그들의 소행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광대를 찾아갔지 광대는 자신이 두꺼운 화장에 사육당하고 있다며 웃어야 할 시간에 울고 있었어

 

천장을 훑어 오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때론 엉성하게

 

그러다 접시가 입을 쩌억 벌렸어

 

누워있던 골목들 일제히 제 넋을 출렁였지

 

붙어 있던 그들은 홀가분하게 나를 떠났어

 

온갖 소동 부리고 떠난 자리,

 

무성한 음모만 시끄럽게 남아 있네

 

Poltergeist : 불안정하게 소란을 피우는 영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문학은 나의 치료제

 

시를 쓸 수 있도록 해준 '지금''공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세상 만물과 연애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싶습니다. 무엇에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닌,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입니다.문학은 나를 발견해주는 치료제였고, 소외된 사유를 관계의 중심으로 옮겨 놓아 주었습니다. 시는 제 파토스에 하나하나 리본을 달아주며 질서 있게 나를 복원시키려 했습니다. 의미 없는 의미들이 부식되던, 어제는 감각적인 경계를 만나 별도의 설명도 없이 포장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랑할 대상을 찾아 떠났습니다. 당선소감을 쓰는 날 이사를 했습니다. 눈 때문에 살짝살짝 하얗게 지워지는 길 위에서 생각했습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지워져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지워지는 건 두려운 게 아니었나 봅니다. 작년 이맘때쯤 USB의 고장으로 모든 작품을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잃었기 때문에얻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기뻐해주실 지도교수님과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시는한남대 문창과 교수님들, 학점을 잘 주셨던 이재무 교수님, 늘 멘토링받고 싶은 김동석 소장님, 시정신학회 회원들, 사랑하는 친구들, 당근,앨리스,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믿고 지켜봐주시는 아버지, 독수리 오형제보다 강한 우리 오자매 언니들, 형부들, 조카들, 사무엘 사랑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엄마, 할머니, 하느님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감사를 명료하게 밝힐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시다운 시로 보답드리겠습니다.

 

 

 

 

[심사평]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 문학적 역량 높이 평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2편과 김아타의 달로 날아가는 방5편이었다.

 

김아타의 시는 새로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체 실험실에서 나온 듯한 그의 의욕적인 작품들은 특이한 언어의 선택과 뒤틀린 배치, 엉뚱한 결합을 통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물론 평범한 문법을 거부하려는 신인의 자세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소통의 단절을 앞세우는 듯한 난해하고 모호한 문장들을 누가 읽어낼 수 있겠는가. 현란한 수사에의 도취는 자칫 시의 본질을 벗어난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쇄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내는 큰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는 이견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든든한 문학적 역량이 느껴졌고 신뢰가 깊이 갔던 작품이다. 폴터가이스트는 불안을 형상화했다. 불안을 토로하는 것은 쉽지만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심이 묻어 있는 어눌하면서도 차분한 어조, 공포를 잠시 해소시키는 짧은 농담, 살얼음처럼 떨리는 셈세한 문체로, 불안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 심사위원 : 문정희. 최승호

 

728x90

 

 

오늘은 달이 다 닳고/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나와 나의 시, 집요하게 거리 두기를

 

음성메시지로 당선을 통보받았다. 식구들에게 번갈아 들려줬다. 대낮에 벼락을 맞은 것 같다고 하면 좀 더 그럴듯하겠지만 이로써 갈 길이 더 멀어진 기분이다. 그것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재촉한다. 두근거리게 한다. 웅덩이에 발이 빠지면 통째로 달고 가는 수밖에. 내 발이 썩지 않고 견딘다면 섬 하나를 띄울 수 있을까.

 

이제 시는 나를 주시하고 교대로 돌며 내 행적을 감시할 것이다. 교묘히 숨는 대신 얼굴을 드러내고 두 손에 들린 연장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휘두르고 싶다. 꽃과 뿌리가 줄기만큼의 여백을 두듯, 나와 내 시도 끝내 일치하는 지점을 찾지 못하고 집요하게 거리를 두길 바란다. 부족하지만 시를 쓸 때만큼은 프로라는 자신감을 부여하겠다.

 

내 이름은 본명이다. 일의 자리 가운데 제일 높은 숫자라고 그런 이름을 달아주셨다. 많이 다르게 흘러왔지만 자잘한 기억 하나 놔줄 수가 없다. 깨물어서 아플 손가락은 전부 다 잘라버렸다. 그러니 내 고통의 빈도를 기록해둘 만한 서식이 달리 없다.

 

당선되고 사라진다면 그보다 더한 낭비는 없을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 작품을 선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나를 격려하는 분들께 더 나은 작품으로 답하는 것 말고는 이제 방법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인이 되는 생각을 한다. 벼락을 맞아도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한다.

 

 

 

 

배가 산으로 간다

 

nefing.com

 

 

 

[심사평] 특별함 끄집어내는 시적 상상력 보여

 

우리 두 심사위원은 각기, 김다연씨의 '얼음왕국'과 민구씨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를 당선작 범위 안에 든 작품으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이들의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하여 두 차례 더 읽어보았다. 민구씨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를 당선작으로 꼽는 것으로 합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민씨의 작품들은 시가 일상언어 사용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시 아닌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케 하는, 고유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층위란 산문의 평지에서 좀 떠 있는 부력, 흔히들 말하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민씨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새들은 ()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라든가, 그의 다른 시 배가 산으로 간다에서의 "물속에 매달아 놓은 조등" 같은 대목은 범상치 않은 발견이다. 그것이 있을 때 시가 스스로 뜬다. 이런 좋은 부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민씨에게도 있다. 다분히 서술적인 말투라든가, 시라고 하는 대단히 인색한 지면에서 동어반복하면서 낱말들을 낭비하는 것, 시적 상념이 더 깊은 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등등이다. 이런 악습은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 더 해당된다 하겠다. 특히 근래 판타지에의 경향성 속에서 스스로도 감당 못할, 실패한 은유들의 범람은 참 견디기 힘들다.

 

김다연씨의 '얼음왕국' 2편도 고루 시를 스스로 유지시키는 역량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텍스트 안에 반짝 전기가 들어오게 하는 발견의 신선함이 약하다 할까. 상념이 동화적이라고 해야 할지, 유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심사자들에게 앞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시인의 이름을 부여하기에는 아직 실감이 덜 왔다. 양서연씨의 '붉은 귀', 한창의씨의 '어떤 행방'을 최종심에서 우리가 논의했다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의미한다. 이 땅의 싱싱한 시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모두의 정진을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문정희, 황지우 시인

 

728x90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모든 두근거림의 뿌리를 보고 싶었다

지금 손에 쥐어진 내 온도가 낯설다. 이것은 누구의 것일까. 모든 두근거림의 뿌리를 보고 싶었다. 왜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일찍 죽거나 죽으려 하는 것일까.

드디어 앰프가 터졌다 이제 음악 없는 서커스다. 어릿광대의 춤을 보고 있는 누구도 웃지 않는다. 박수도 없다. 침묵이 두꺼워질수록 광대는 더 빨리 춤을 추고, 그의 두 뺨은 겁에 질린 땀으로 번들거린다. 그러나 광대는 뛰쳐나가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창 밖에서는 괴물이 숨 쉬고 있다. 단단한 비늘이 있고 타오르는 거센 숨에 둘러싸인 괴물이 두껍고 튼튼한 발이 달리기 시작한다. 보라. 괴물은 제 몸집의 크기를 보인 적이 없다.

독과 고함과 친구들에게, 이름의 한 글자씩 빌려주신 연 선생님과 성 선생님께, 권 선생님과 J형께, 아해와 부모님께, 그밖에 모든 사람들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nefing.com

 

 

 

[심사평] 몰개성의 시대, 눈에 띄는 참신함  

예심을 거친 20명의 응모작들 가운데 이연후씨의 ‘우니코르’, 이서씨의 ‘고래자리’, 최수연씨의 ‘누에의 잠’, 유희경씨의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정도가 최종심 대상작으로 언급할 만하다고 여겨진 작품들이다.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보면 한 시대의 사회적 징후가 집약된 듯한 목록들을 읽을 수가 있다. 그 목록들이란, 최근 수년 동안 뭉쳐져 있는 경향이어서 어지간해서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역시 현저히 즉물적이다는 것, 다분히 자폐적이다는 것, 몰개성적이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특징들이 나쁘다, 좋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요는 이런 특징들을 가지되 응모작들이 스스로를 한편의 시로 ‘성립’시키고 있는가를 가려내는 것이 우리 심사자들이 할 일이었다.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갖는 조건, 즉 ‘시의 기본’을 모른 채 시 비슷하게 써서 시라고 우기는 것 같은 수많은 위조품들을 읽어야 하는 심사자의 고역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물적이다는 것은 사물을 주절이 주절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헤프게 낭비하는 것, 동어반복하는 것은 시에서는 범죄일 수 있다. 또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넌센스의 나열이나 실패한 은유들을 가지고 시의 특권이라고 오해하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많은 투고작들이 어쩜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는데 이 개성의 표준화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할까?

위의 네편 최종심 대상작들도 이런 지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를 시로 성립시키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최수연씨, 유희경씨의 두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최수연씨가 시를 다루는 데 더 유연해 보이는 점이 있지만 유희경씨가 상대적으로 더 참신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선자는 앞으로 한 권의 시집으로 자신의 시인됨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 심사위원 황지우·문정희

 

728x90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벌컥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신기해 


‘진정한 의미의 공적인 분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노나 슬픔을 불특정 다수의 동포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운 환상에 불과하다. 아픔이란 우선 개인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호리에 도시유키 ‘곰의 포석’ 중에서)

올여름, 선풍기 없이 폭염에 시달리면서 이 글을 옮겨 적었다. 선풍기 바람이 싫기도 했지만, 선풍기가 없었기 때문에 악창처럼 달라붙은 더위를 떨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나에 대해 골몰해보기로 했다. 너무나도 평이하게 살 것이다, 라는 내 생각과 달리 살고 있다는 것.

자다가도 벌컥벌컥 가슴이 열리고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신기하다. 그러니 인생은 내게 아름다운 것일까? 끔찍한 것일까? 존경하는 분이 일러주신 것처럼 좀 더 절실해지기를. 그래서 내 시에도 부디 그 깊이가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문학의 깊이와 열정을 몸소 보여주신 서울예대 교수님들,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까지도 재봉일로 생계를 꾸리시는 부모님, 편벽한 나를 이해해주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보인, 05학번 친구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준 친구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여태도록 나를 놓지 않는 하나님께도.

 

 

 

다시 없을 말

 

nefing.com

 

 

 

[심사평] 사근사근 풀어내는 언어감각 돋보여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는 언어와 리듬이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며, 이 광활한 시대에 개성적이면서도 깊은 시정신을 내포한 시인을 찾는 작업이 지난함을 느꼈다.

수천통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대체로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삶의 삼투압이 시 속에 스며들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는 곧 언어의 낭비로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논의되었던 작품은 이주연의 ‘21세기,실낙원’, 박여주의 ‘신호대기’, 권지희의 ‘직소 퍼즐’, 이산의 ‘낭만적인 잠수부의 작은 눈’,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 등이었다.

이 중에 이주연의 ‘21세기, 실낙원’은 검은 비닐속에 자라는 생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불임성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마무리가 허전하여 읽는 이를 깊은 감동으로 이끌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 박여주의 ‘신호대기’는 자연스러운 솜씨로써 삶을 투시하는 힘이 느껴졌지만, 관념어의 돌출과 몇 군데 표현이 클리쉐(cliche)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를 정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쁜 숨결 속에서도 잘 유지되는 묘사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소 시류적인 어투와 산문성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근사근 시를 풀어내는 언어감각은 앞으로 한 시인으로서의 항해에 눈부신 햇살을 예고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새 시인의 출발을 축하한다. 한국시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서, 힘차게 비상해 줄 것을 믿는다.

 

- 심사위원 문정희 황지우(본심) / 김기택 정끝별 이광호(예심)

 
728x90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 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이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 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부리 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 머리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 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조금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 같아서 뼈째 씹어야 해요 오도독 오오독 물렁뼈처럼

씹을수록 맛이 나죠 .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 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쳐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입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 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느린 우주의 걸음으로 당신을 다시 만났다

 

꿈같고 꿈에서 운 아침같다

 

한때 당신과 나, 우리 둘이는 짝짝이 신발처럼 어색했지만 잘도 어울려 다녔다.

 

내가 가장 착할 때 당신은 떠났고

 

왜냐고 묻지 못했다.

 

조금씩 해와 달의 각도를 맞추듯 그렇게

 

느린 우주의 걸음으로 걸어와 당신을 다시 만났다.

 

참 예쁜 당신

 

당신이 나를 알아볼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그냥 안아줄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묻지 않겠다.

 

이 별에 오길 잘했다.

 

시가 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시인들 - 감태준 이승하 선생님과 문창과 선생님들, 강형철 선생님, 오정국 선배님, 차창룡 선배님 그리고 멀리서 마음의 손 잡아주시는 철학과 선생님들과 선후배들, 토지문화관의 봄에서 여름까지 뜨거운 예술가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나의 벗 기연. 그리고 엄마 아빠 가족들, 내가 그다지도 귀애하는 꽃과 새와 별의 지옥인 너에게. 시를 쓰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문정희 황지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활달한 상상력, 시어를 부리는 탁월한 능력

 

언어를 통하여 삶을 투시하는 힘, 절제된 표현, 무엇보다 참신한 패기를 기대하며 심사에 임했다. 박민규의 '낙산', 신미나의 '부레옥잠', 한인숙의 '마이산',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남궁선의 '폭설', 김종훈의 '국소 마취'는 상당한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 중 박민규와 이윤설의 작품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올렸다.

 

박민규의 '낙산'은 시어를 다루는 솜씨와 객관적 서술력이 돋보였지만 신인의 패기보다는 모법답안이 주는 안정성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은 활달한 상상력과 살아있는 시어를 부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섬세한 묘사로 주제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감으로써 한편의 시로서 스스로를 지탱시키는 힘을 느끼게 했다.

 

이 작품과 함께 보내온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수준을 이루고 있어 그동안의 습작의 흔적도 알 수 있었다. 부드럽고 미화된 언어보다 정확하고 정직한 언어가 감동으로 직결된다. 언어 사용자로서 최고의 축복을 누리는 한 시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분들께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라며, 오래오래 깊은 향기를 터뜨리는 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문정희, 황지우 시인

 

728x90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 김승혜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소식 엿듣게 하는가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삐딱이 부처님 본 뒤 절을 꼭 올리고 싶었다

 

화순 땅 운주사, 누운 부처를 처음 보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곳엔 부처 아닌 돌이 없었다. 뭉툭하게 문드러진 돌들이 부처라니. 코가 닳은 못생긴 부처님, 귀가 떨어져 나간 삐딱이 부처님을 처음 본 그때, 내게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천하 귀신들도 탄복할 절을 꼭 한번 올리고 싶었던 걸까?

 

내 마음 안에 돌탑 하나 세우고 돌아선 그날 이후 가끔 꿈속에서 운주사 가는 그 옛길을 타박타박 걷곤 했다. 그저 한 무더기 돌덩이를 만나도 그것이 탑이 되고 부처가 되게 하는 간절한 천불천탑의 땅. 이제 나는 떨리는 첫 마음 모아 새로 돌탑을 올린다. 그러나 이 간절함이 어디에 가 닿게 될지 지금은 모른다. 다만 나를 위해 불문 훨훨 열어놓고 뜨겁게 데워주는 내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염려와 기도 안에서 운주사 가는 옛길을 가듯 멀고 낯선 길을 간다.

 

늘 따뜻한 가르침을 주시는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는 학형들, 부족한 시를 세상에 내놓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水壓 센 한국의 바다서 보물 건질 능력 있어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장성실 '소금쟁이 메모', 이병일 '빈집에 핀 목련', 이다연 '가설무대'를 최종심 대상작으로 좁혀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는 이들 네 작품이 최소한, 누가 읽어봐도 "이게 시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게끔, '스스로 시를 성립시키는' 구성의 내구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당선작을 고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정을 두 번이나 번복할 정도로 우리 두 심사자들을 꽤 괴롭혔다. 이들 네 작품이 두루 괜찮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동시에 눈에 확 띄게 스스로를 구별시키는 작품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결국 우리가 이번 심사에서 기대하고 예감하고자 한 것은 누가 보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수압이 센 한국시의 해저에 누가 더 오랫동안 잠수하여 보물을 건져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당선작으로 최종결정했다. 이 시가 그 자체로 잘 다듬어진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과 대등한 수준의 다른 응모작들을 고루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도 그가 계속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한 권의 시집을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부릅뜨게 해주길 바란다.

 

- 심사위원 문정희. 황지우 시인

 

728x90

 

 

()타이어 /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詩作은 눈물로 바위 뚫는 작업두려움 껴안고 시의 밭 뒹굴것

 

늘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의 축하한다는 짧은 말씀에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느낌이 있었다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평생 이런 느낌을 껴안고 시의 밭을 뒹굴고 싶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응시하게 하는 그 무엇인 시를 위해 시는 눈물로 바위를 뚫는 작업이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제 생활의 척추로 삼고 있습니다. 저의 눈물로 불완전한 척추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 시작(詩作)에 오체투지하겠습니다.

 

영남대학교의 이기철 은사님, 삶의 길을 깨우쳐 주시는 ‘www.ssza.co.kr’의 채종한 선배님, 시의 싹을 틔워 주신 경주대 문예창작과정의 손진은 선생님, ‘포항문협’, ‘푸른시가족과 미숙한 시를 예쁘게 보고 뽑아주신 조선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 포항 세화여고 3학년 6반의 고운 눈빛들, 그리고 밝고 맑은 이름과 마음을 지닌 분들과 함께 당선이라는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하고도 서늘한 새벽입니다.

 

 

 

 

 

[심사평] 문명의 피곤 어루만지는 힘 탁월

 

실체야 쉽게 달라지지 않겠으나, 시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기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다소간 달라지는 양상이다. 따라서 이번에 선자들이 주목한 점은 새로운 문제의식이었다.

 

당선작 [()타이어]는 이러한 의식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다. 우리 현실의 핵심을 가로질러가는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 서정의 회복을 꿈꾸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찰과 한편으로 그 피곤을 어루만지는 시의 힘, 그 부드러움을 탁월하게 대비시킨다.

 

시와의 더욱 치열한 싸움을 통해 새로운 세기의 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다. ‘히말라야의 물고기’(김성신), ‘매직아이@’(민미숙) 등의 작품들도 당선을 겨룬 우수한 시들이었다.

 

시적 언어의 조탁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야만스러워져가는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새삼 이루어가려는 박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심사위원 황동규 시인, 김주연 문학평론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