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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편에서 미꾸라지 추()’자 찾기 / 천수호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그 꼬리를 기억하며 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올린

비린내 묻은 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 (잉어),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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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까마득한 시의 고고학 속으로

 

국그릇에 드나드는 숟가락이 국맛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 시가 아직 맛을 알지 못하듯이. 그러나 숟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그리워 나는 자꾸 시 속으로 몸을 담근다. 그릇 안의 온기만큼만 몸을 녹이고 난 또 국을 데운다.

 

시를 사랑하느라 견제하는 법을 놓쳐버린 건 아닌지, 내 기억을 갖고 있는 숟가락과 내 체온을 갖고 있는 국그릇을 번갈아 쳐다본다. , 많은 그릇들을 채운 것 같았는데 결국은 비워져야 할 것들이었다. 시를 쓰는 것은 끊임없이 비워내는 국그릇과 같아서 자꾸 숟가락을 퍼올려 씹어도 보고 삼켜도 본다.

 

가야할 길이 멀다. 몇백 년이 지나도 눈··입이 그대로인 시, 피부의 탄력이 느껴지는 시, 팔뚝의 푸른 동맥이 푸릇푸릇 드러나는 시의 고고학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가다가 길을 잃지 말라는 당부의 소리가 들린다.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리며 부족한 시를 세상으로 밀어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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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긴장된 시적 질서·패기 탁월

 

신춘문예가 프로신인을 배출하는 제도라면, 가장 중시되어야 할 요소는 그 신인의 프로로서의 가능성일 것이다. 이 가능성은 때로 작품의 완결성이 미흡할 경우에도 거칠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수가 있다. 작품의 질서가 주는 조화에 매료되어 그 뒤의 힘찬 에너지를 놓친다면, 심사자는 두고두고 아쉬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옥편 속에서 <미꾸라지 추()>자 찾기’ ‘오래된 부채3편의 천수호 씨와 못은 나무의 역사를 만든다4편의 김형미 씨는 이 같은 아쉬움을 처음부터 걷어내 준 분들로 높은 평가에 값할 만하다. 당선자가 된 천씨는 긴장된 시적 질서와 패기 양면에서 탁월한 재능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이며, 김씨 역시 패기가 대단하고 대담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지하철역에서3편의 윤석정씨, ‘석모도 민박집4편의 안현나씨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내는 능력이 기성 시인을 차라리 앞서는 면이 있다. 당선자, 그리고 당선을 양보한 김씨의 창의력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의 활동을 주목하고 싶다.

 

-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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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장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튀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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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끔은 화려한 문신으로 누군가에 각인되고 싶다

 

가만히 손 끝마디를 들여다보면 무엇이 우리의 가슴을 친다. 둥글게 소리가 사무친다. 산과 산이 물결쳐 나가다 다시 안으로 고요히 잦아들고, 거기 도달해야 할 우리의 꿈으로 남는 등고선. 두려운 일은 피가 비치도록 살갗이 닳아 벗겨져 민둥산처럼 아예 울음을 잃는 것이다. 온몸을 낭랑하게 울려야 우리는 허름한 것에서도 낯익은 손자국으로 만나 서로의 가슴 속에서 조용히 메아리로 무늬지는 것이다. 살며 외로워 흔들릴 때, 누구나 다 누군가에 가 닿아 잔잔한 무늬로 남고 싶어진다. 가끔 나도 화려한 문신(紋身)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각인(刻印)되고 싶다. 사실, 잊혀지는 것만큼 서글픈 것도 없지만, 초연히 무심이고 보면, 소멸하는 그 자리는 명징(明澄)하다.

 

나른한

아침 봄볕

두울둘 감긴 것이

순간,확 풀리며 지붕 위로 튀오르고

휑하니

사라진 자리

허허로운 빈 하늘

<고양이, 욕망이라 불리우는>

 

나이 마흔이 넘어 문득 옹이가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세상을 다시 보았을 때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한곳이 환해 보였다. 옹이가 있던 자리는 무욕의 맑은 눈이었다. 소원이 뭐냐고 누가 내게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 간혹 막막하지만 여러 바람들 중에 분명 끝까지 변치 않을 단 하나의 바람은 내 생애의 마지막 날 내 사랑하는 이들과 내 사랑하는 것들과 마지막 대면하는 내 눈빛이 말고 깨끗한 하늘빛이었으면 하는 그것이다. 내 아는 이들과 미천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의 고마움을 언제나 맑은 눈에 담고 싶다.

 

 

 

 

생의 볼륨을 높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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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감추지 않는 패기 돋보여

 

높고 고른 수준의 시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규격적인 훈련을 받은 비슷비슷한 시들을 읽는 일은 동시에 다소간 괴롭다. 대체로 즐거우면서도 이따금씩 괴로운 작업 끝에 우리는 이윤훈 씨의 <옹이가 있던 자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가 우수하지만, 그가 당선자가 된 까닭은 역설적으로 <돈황으로 가는 길>, <아씨시 성 프란시스코와 마주하여>,<주인님 전 상서> 등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들 덕택이다. 거기서 그는 엉뚱한 상상력과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 스타일을 감추지 않는 패기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 남아 있는 패기이지만, 더욱 힘을 길러 세상을 보는 시인만의 시각을 키워가기 바란다.

 

이민, 김미영, 최찬상, 문신 씨 등도 상당한 경지에 근접해 있는데 문제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자기의 언어 발견이다. 가정 속의 일상성, 시어의 상투성, 운율이 결핍된 산문시 애호 현상 등등은 이를 위해 싸워야 할 대상들로서 시인을 동경하는 분들이 깊이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 심사위원 황동규, 김주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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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 정임옥

 

 

나무 뿌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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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담바라꽃 피워내듯

 

밤새 뒤척이고 난 새벽 불곡산을 올랐다. 돌아와 문을 여는데 발밑으로 이슬 하나가 툭, 떨어진다. 옷에 묻히고 온 많은 이슬 중에서 단 한 방울만이 나를 떠난 아침, 젖은 옷 벗어 걸며 내 안에서 마르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한 그들에게 미안했다.

 

얼마 전, 삼천 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꽃을 보았다. 금불상을 뚫고 나온 그 꽃은 마치 이슬방울 같았다. 시를 쓴다는 것이 가슴으로 우담바라꽃을 피워내는 일이 아닐까. 일생동안 갈고 닦아 좋은 시 한 편 써야 할 숙명의 길로 나는 지금 한 발 들어서고 있다.

 

삶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오지 않음을 알고 느꼈던 비애마저 기쁘게 감싸 안도록 다독여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친정 부모님과 종가의 맏며느리 역할에 소홀함을 덮어주느라 더 바쁘셨던 시어머님, 글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현식과 담비 그리고 야생화로만 알았던 당신이 내겐 우담바라꽃이었음을. 그들이 있어 행복하다.

 

시의 호흡법조차 모르는 내게 산소호흡기를 끼워주신 정호승 선생님, 이제 '어떻게' 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로 고민하라고 하신 말씀 늘 기억하겠습니다. 황야에 조심스레 밀어올린 대궁에 튼실한 뿌리가 되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슬프게 떠난 이와 그리움으로 머무는 뭇 인연들에게도 인사해야겠다. 그들과 함께하고, 함께 할 세상이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파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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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직한 자기성찰 돋보여

 

조필수, 이채운, 정임옥 세 분의 작품을 놓고 당선작을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더라도 별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임옥의 '뿌리'가 당선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주의 깊은 관찰력, 섬세한 즉물성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다정한 분위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수작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이 그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정 씨의 모든 응모작은 당선작에 못지않았으며, 특히 '명암방죽'은 보기에 따라서 더 매력있는 작품으로 뽑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채운의 '리듬체조''사과알 속의 수행자'도 당선작에 비해 손색없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한편 조필수의 '내부 순환로'는 패기와 독창성이 돋보인 작품이다. 당선권에 든 분들은 아니지만 최승철의 몇몇 작품들도 힘이 있어 보였으며, 하정임의 '햇빛별빛잔치'도 동화적 목가성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 심사위원 황동규·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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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 최영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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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새천년 여는 도전 정신 돋보여

 

새천년에는 새 시를? 언어는 그대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마치 생명과도 같다. 그 새로와지는 변화의 중심에 시인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민족의 언어는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작 우물(최영신)이 결정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우리 모두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않을는지 모르나 적어도 이 작품에는 새로운 도전이 있다. 이 도전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가볍게 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고답적이지 않다. 그다음으로 이 시는 문제의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시 정신을 동반하고 있다. 끝으로 상찬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적절한 관찰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삶 전체를 투사하는, 용해된 정열이랄까 하는 것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매력들은 가령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는 표현과 같은 데에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제 얼굴을 드러낸다. 추억도 복고도 아닌 자기성찰로서 우물의 이미지가 이만큼 빚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격언의 풍자」 「흙을 바라보며등 다른 작품들도 우수하다. 독특할 개성의 시인으로서 자기 세계를 일구어 나가기바란다.

 

당선작을 양보한 작품들로서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조정), 물방울 하나에도(한용숙) 등이 있었음을 부기한다.

 

- 심사위원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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