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 최현우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 발레의 점프 동작
[당선소감] "눈이 내렸다… 오늘은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랭보가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아팠다고, 외로웠다고 자랑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시를 앓는 사람들이 다 아프고 외로워서 혼자 특별하게 피 흘린 척할 수가 없다.
시와 현실의 압력 차이로 사람이 펑 하고 터져버릴 수도 있겠구나 하며, 희망과 절망을 양 겨드랑이에 한쪽씩 목발 삼고 걸었다. 편한 쪽으로 기대려다가 자꾸 넘어졌다. 주저앉는 곳은 어디나 골목이 되었다. 그 담벼락에 실컷 낙서나 하다, 침도 뱉다가, 날아다니는 나방을 세어보기도 하다가,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 희망과 절망에 같은 힘을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십원짜리 동전을 세우는 일 같았다. 그러니까 아주 가끔씩만, 나는 희망도 절망도 아닐 수 있었다.
김혜순·송찬호 두 심사위원께서 호명해주셨다. 스무 살 때 허연 시인이 영혼에 열병을 심어주셨다. 불치병이 되었다. 박찬일 교수님과 김다은·윤호병 교수님께 목구멍의 생선가시처럼 걸려 있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이형우 교수님과 많은 술잔을 기울였고, 임경섭 선생님과 거짓말처럼 한 약속이 있다.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추계 학우들의 축하 때문에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고, 부모님께 아직도 반찬 투정하는 아들이고, 내게 미현은 여전히 반짝거린다.
간밤에는 목발을 잠시 내려놓고 주저앉아 길게 자란 발톱들을 깎았다. 날이 밝았다. 이곳에 눈이 내렸다. 그 위로 누군가 모스부호처럼 흘린 발자국, 오늘은 해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심사평] 발뒤꿈치 들고 도약을 시인이여, 더 높게 발롱(점프)!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광고의 말과 현란한 드라마 대사 속에서 시가 나아갈 길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꽃·별·구름·사랑과 이별, 버려진 구두 한 짝, 창문의 덜컹거림, 전화기 속의 흐느낌… 등을 질료 삼아 늘 그래 왔듯 묵묵히 시를 쓰는 것. 황지우 시인은 "시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 마신다"고 하였다. 갑갑한 소화불량의 사회에서 시는 더욱 예민해졌고 더욱 갈급한 형식이 되었다.
이번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송민규의 '곰팡이로 만드는 바람소리'外, 조창규의 '불안한 상속'外, 서문정숙의 '시간여행자들'外, 최현우의 '발레리나'外를 주목해 읽었다. 위 응모작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수준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새로운 시인으로서 외침은 있되 아직 그 울림이 뚜렷하지 않고 자기만의 웅얼거림에 갇혀 있는 듯했다.
고심 끝에 최형우씨의 '발레리나'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발레리나'는 '한 번의 착지를 위해' 거듭 삶을 연습해야 하는 발레리나의 내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특히 시에서 계절로부터 '부슬비'의 가는 발목을 발견하거나 바람으로부터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원시의 무용을 발견하는 응시의 시선이 돋보인다. 발레는 발뒤꿈치를 들고 돌거나 도약과 착지를 거듭해야 하는 고된 춤이다. 시도 이와 다를 게 무어랴. 당선자는 오래 습작기의 열정을 내려놓지 말기 바란다. 새로운 시인에게 시가 발롱! 더 높게 발롱!
- 심사위원 : 김혜순, 송찬호
'신춘문예 > 조선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안지은 (0) | 2016.01.01 |
---|---|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정현우 (0) | 2015.01.05 |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김재현 (0) | 2013.01.01 |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한명원 (0) | 2011.12.31 |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 신철규 (0) | 2011.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