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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명 / 강은교


희명아, 오늘 저녁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너는 다섯 살 아들을 위해

아들의 감은 눈을 위해

나는 보지 않기 위

산 넘어 멀어져 간 이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 위해

위어이 워어이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고

희명아 저 노을 앞에서 우리 함께 기도하자

종잇장 같아지는 희 별들이 떴다

우리의 기도문을 실어 갈 바람도 부는구나

세월의 눈썹처럼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희명아, 오늘 밤엔 우리 함께 기도하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자

워어이 워어이

서걱서걱 흩날리는 그 마당의 나뭇잎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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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김초혜


억새꽃 희게 딘

가을 저물녘

주인은 나그네 속에 있고

나그네는 주인 속에 있다


길다해도 지닐 수 있는 것

이 순간 뿐


그대는 나그네를 잊을 것이고

나그네도 그대를 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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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에 걸리다 / 유안진


하느님

저는 투명인간인가 봅니다

바로 앞 바로 옆에 있어도 없는 듯 여깁니다

불쾌하고 기분 나빠

'있다'고 '나'라고 주장하다가 지쳐 그만

성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초기그리스도교처럼

순교를 영광과 환희로 맞았던 초기기독교도처럼

명성을 영광과 환희로 맞이하고 싶은데

도저히 정복할 수 없어서 국교로 삼아버린 로마제국처럼

제각 정복할 수 없는 명성은

저의 종교가 되었나 봅니다

저의 하느님이 되었나 봅니다


정복할 수도 정복될 수도 없는

성병에 걸려서

스스로를 얼마나 속이며 기만했으며

꿈과 성병을 구별하지 못했던가를

선망과 조롱으로 우습게 보았던 타인과 자신을

사람본래로 보게 눈 열어주십시오

죽는 순간까지도

해방될 수 없다는 그 성병을

저만은 반드시 살아서 고쳐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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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내 가장 먼 여행2 / 이가림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이렇게

육심 년도 더 넘게 끌고 온

꿰매고 기운 헝겊 투성이의

내 슬픈 부대자루를

해지는 고갯마루에 잠시 부려놓고

하늘에 밑줄 친 듯 그어진 운평선에

망연히 한문팔고 있노라니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ㅎㄴ

허연 수염 휘날리는 조각구름 하나가

불현듯 다가와

축 처진 내 어깨를 두드리며 타이르네


"그 동안 많이도 수고했네만

네 부대자루가 넝마가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끌고 가보게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천길 낭떠러지

그 미완성의 정점 끝에 다다를 것이니

그 때 푸른 심연의 바다 한 가운데

서슴없이 뛰어내리게"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이렇게

육십 년도 더 넘게 끌고 온

꿰매고 기운 헝겊 투성이의

내 슬픈 부대자루,

다 닳아진 한 조각 걸레가 되기까지

해 떨어지기 전

생의 마루바닥을

무릎 꿇고 더 닦아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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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1 / 서정춘


오, 불아

누가

훅 불어버린 불아

눈감고 눈 준

명목도 버려놓고

겁도 없이 없도 없이

일확천금 허공만을 훔쳐서

떠돌이로 달아나는

너, 마지막 처음인

연금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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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을 지나며 / 이은봉


자동차에서 내려 바라다보는 강물은 자꾸만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 고요가 제비처럼 대각선을 그으며 허공 위로 날아갔다 강물을 가로지르며 늘어서는 대각선, 문득 나는 대각선 위에 내 지루한 운명을 빨아 널고 싶었다 금세 거기 지난 시대의 무수한 역사까지 하얗게 펄럭이고 있었다 강가의 미루나무도 이젠 고요에 익숙해진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사 안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입가엔 어느덧 담배 연기가 뽀얀 낯빛으로 달려와 피붙이처럼 서성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 함께 살력 하니? 곁에 서서 주춤거리던 고요가 쯧쯧 혀를 차며 내게 물었다 힘을 잃고 비틀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ㄹ것이 강물이잖아 덤덤한 내 대답은 미처 말이 되지 못했다 그림자처럼 고요와 더불어 살고 싶긴 했지만 고요가 세상을 만든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멈춰 서 있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며 차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자 강물은 다시금 늙은 뱀처럼 천천히 제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강물 위엔 어느덧 아까와는 다른 고요가 참새 떼처럼 통통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고요가 부러운 것일까 빠른 속도에 중독된 지 오랜 낡은 자동차는 내 속을 뒤집어대는 저랑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여전히 크르릉크르릉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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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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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누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올랐다

신음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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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치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드려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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