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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대상]

몽유도원도 / 이지안

어머니를 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조몰락조몰락 살갑던 유방 부드러운 
당신은 한 움큼 홈홈하던 복숭아였네
뽀얀 고 가슴 가슴 얼굴을 파묻으면 
잉큼잉큼 달아나던 여린 심장들 나는 
내 어머니 가느다란 혈맥을 타고 
밤마다 뿌리째 내달리는 꿈을 꾸었네
달큰한 뗏국물 속살까지 차오르면
연분홍 가지마다 피어나던 어머니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들도 
아그데아그데 열리느라 아름다웠는데
내가 다 빨아먹은 단물 탓인가 
지금은 사늑해진 황혼
한 철이었다는 듯 다 물러진 어머니 
젖가슴은 자꾸만 흐물흐물 내려앉으시는데
내가 본숭만숭한 어머니 두 복숭아가
나도 몰래 내 가슴에 가지치고 있었나
이제는 내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네
언젠가 한 삽의 꿈으로 심기운 내가  
날카로운 우듬지 저 끝으로 가 닿아 
순연한 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면,
저기 저 칼을 숨긴 바람에게마저 
한 모금 내 초근한 젖 물려줄 수 있다면!
복사꽃 한 땀 한 땀 상상화로 수 놓이면
내일의 어머니로 성숙하는 열매들 
그 속에 흠집 많은 내가 매달려 
한잠쯤 달게 피어나고 싶다
 
 
 
 
제4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복숭아를 닮은 당신에게 / 서기슬

복숭아를 베어 문 순간,
혀 위로 물러진 미련 몇 개가 맴돌았다.
하지 못한 말들이 이빨 틈으로 촘촘히 걸릴 때
눈물도 오래 익으면 향기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와 바람을 안으로 머금고 견뎌온 시간은
멍든 자리마다 속으로 연해지는데
어쩜 그리도 초연하게 고운 살빛인지
여름에 태어났지만 그 표정은 봄의 무늬를 닮았다,
뜨거움도 서러움도, 한 계절 속으로 익으면
아련한 단 맛처럼 떠오르는데,
안으로 다 익지 못한 나는 
숨겨진 색깔에 가까울수록 아직 좀 시큼한가,
단단해왔던 그리움은 속으로 물러질 때에 
남몰래 가장 향기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4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복사꽃을 따다 / 이재은

연변에서 살기 힘들어 
돈 벌러 왔다는 연변족 아지매
경기도 이천 과수원의 길따라 펼쳐진 과수원
붉은 수줍음이 하나 둘 영글어가고
흐드러지는 복사꽃 아래 아지매는 오늘도 바쁘다
풋풋한 가지마다 매달아 놓은 가족들 얼굴
달아오르는 햇살을 받아 먹고 자란다
보스스 날리는 솜털마냥 아이얼굴을 떠올리고
이미 속살까지 문드러진 어머니를 떠올리면
분홍빛 실바람처럼 넘실거리는 그리움
이 꽃잎을 따야 복숭아 과육이 실하고 달다네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말소리에 따라
다시 꽃잎을 한 장 한 장 따는 아지매
코 끝에 불어오는 꽃내음이 달디 달다
한 손 가득 쥔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햇살을 받아 먹고 알알이 차오르는 복숭아 과육
아지매의 꽃 진 자리는 아물어가고
복숭아 달콤한 삼킴이 입 안 가득 머문다

 
 
제4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오후 5시의 향기 / 모재린

눈 우물 복숭아 띄워
사각 정지 화면으로 들어간다 왼쪽
구겨진 주름 얹고 서 있는 이가 어머니다
오른팔 들어 어머니 손 잡고 있는 여섯 살 오빠
막 울기를 그치고 두 눈 벌건 네 살 언니가 있다
갓난쟁이 나까지 자리하면 거추장스러웠을 순간,
유리창으로 들어선 바람
하교길 만원 버스 안 공기를 털어 놓는다
교복을 입기 시작하던 날
책가방에 더해지던 통증은
손으로 바삐하는 벙어리 사내 둘의 이야기였다
말 못하는 사내들도 즐겁게 손을 갖고 노는데
할 말 많은 여자 속내 지니고도
흥정 소리 한번 낼 수 없이 아프던 어머니는
장바구니에 단단히 손을 묶고
가득 복숭아를 사오셨던가
"곯은 것이 훨씬 더 달다"
성한 것들만 골라 내밀던 어머니 여윈 손 위로
벼룩 하나 지나간다 울음길로 번지는
건너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풍경
앞으로 문득 달디단 향이 퍼져 오르고
그제서야 나는 복숭아를
꼬옥 감아쥔다
 

제4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여인의 향기 / 최정희

바람에도 햇살에도
제 가슴을 꽃으로 열어 보이던 스무살
꽃그늘마저 환해 
봄날은 눈이 부셨다
그러나, 그 빛나던 봄날
꽃잎위로 찬비가 내리고
아프게 꽃들이 져 내리고
꽃진 자리마다 멍울처럼 남겨진 상처
파르르
여린 바람에도 가지들이 떨렸다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건
태양의 뜨거운 시선을 온몸으로 견디며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비바람 모진 시간들을 눈물로 삼키며
푸르게 잎새를 키워 가는 것
시련은 제 안의 상처를 진주처럼
단단한 씨앗으로 키웠고
시간은 딱지 앉은 가지에서 희망처럼
새살들을 피워냈다
하늘은 날로 높아지고
생각이 뿌리까지 깊어지자
삶에는 조금씩 향기가 배고
세상으로 향한 눈빛은 한층 부드러워 졌다
가을이 올 무렵
조심스레 제 가슴을 열어 보이는 마흔살
성숙한 삶의 향기 단물처럼
마음을 적시고 있다 
  
 

6
복숭아꽃이 진다 / 임석훈

이른 새벽부터 복숭아꽃이 흩날리고 있다
공사장 사이사이 서서 
가늘게 몸을 떠는 복숭아나무
바람조차 알 수 없는 금의 방향은
공사장 곳곳 나무의 실뿌리와 번졌다
사내도 저 뒤엉킨 뿌리들처럼 벗어날 수 없다
그가 지고 가는 벽돌 위로 
작은 꽃잎들이 업힌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흘러 온 건지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는다
검은색 껍질의 기둥들이 직렬로 이어지는
꽃들의 그늘만 간직한 도시
꽃잎들은 내려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다리 아래로 떨어져 간다
땅 아래 추락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그의 눈에
젊은 시절 피었던 꽃들이 진다
굴삭기의 굉음에 복숭아밭이 허물어지듯 
가슴에 찍힌 복숭아 뺨의 기억은 
천천히 녹슬어 간다
하늘을 뒤덮으며 춤을 추는 복숭아꽃들
봄은 그렇게 연분홍으로 물들어 가고 있지만
철판과 굵은 기둥 사이는 검고도 깊다
안전모를 쓴 그가 
철근들의 균열 사이로 피어나는
봄을 몰래 엿보고 있다
 
 

7
풍경
-복숭아 나무가 있다

김생자

삼색나물 나란히 앉아 있는 정갈한 제사상 
살아생전 좋아하던 막걸리 잔으로 앉으시는지
잔에 올려진 젓가락 미끄러진다
식구들은 한가지 말로 입을 모아
저승에도 막걸리가 좋은 갑다 하시고
나는 빈속에 술 드시던 아버지가 안쓰러워
슬그머니 젓가락을 돼지고기 위에 올려 드린다
아버지는 밤새 자식들이 성장한 얘기를 들어주고
마음 들여 장만한 음식 위에 애틋한 맘으로 내려 앉는다
어린 아들은 지방에 쓰인 한자를 더듬거리며 읽다가
 "엄마, 외할아버지도 학생이에요? 저 글자 중에 
학생이 있어요!" 하는 바람에 식구들은 
설탕 같은 웃음 쏟아 놓는다.
밤은 더욱 깊어 아버지가 음향한 음식을 음복하고
삼각 김밥 같은 오빠 집 나서는데
쭈볏쭈볏 트럭에서 꺼낸 흠집 난 과일 한 상자
 "오빠가 요즘 복숭아 장사한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오빠의 상처같은 복숭아를 받아들고 
섰는데 환한 빛을 몸에 심고 사는지 오빠,
복숭아 나무처럼 근심없이 서 있다

 
8
오로지 심장만 잉태하였다
 
손지은

공중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것은 모두 그녀였네 
(위태로운 것은 공중이 아니라 그녀라는 사실이었다)
공중에 물기 많은 생을 걸어놓고 사는 일은 
그 무게가 추락과 맞닿게 되는 운명인 까닭에  
서늘한 얼굴마다 바람의 표정이 새겨져 있었네
양팔 없이 빗속에서 취기로 밤을 보내는 날이면
실바람에도 몸속 깊이 파문이 일곤 했던,
팔랑이는 숫자조차 바스라질 것 같은 
복사꽃잎의 나이가 있었음을 그녀는 기억했네 다만
젖가슴에 멍울 서도록 바득바득 열매로 자라난 죄가 
추락의 이유를 머리털만큼 세어도 덜어질 줄 모르던 
청춘, 괜찮았을까? 
온 몸이 무르게 무르익도록 계절을 보낸 후에야 
허공으로 몸을 옭아매던 단단한 제 목을 스스로 
치고 일생에 단 한번 몸이 바람을 지나가는 비행을 했네 
비행과 추락과 착지와 죽음과 해방의 엑스터시! 
그녀의 터지고 멍든 가슴을 주워 도려낸 
내부에는 짜글짜글한 심장이 예외 없이 박혀있었네 
생애를 다 쓰고도 미처 살갗까지 올려내지 못한 
붉음이 먹처럼 온통 번져있었네 

 
9
복숭아나무
 
김옥길

당신의 앞마당에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를 기억할런지요
꽃잎 하나 하나 들춰보면 복숭아빛 속살이 보일 것 같아 
조심스럽다 했지요
어쩐지 속치마 흘러내리듯 화사했지요
뒤집어질 듯 겹겹이 포개진 꽃잎마다 죄다 열리며 벌을 맞던
몇 해 전 함께 보았던 복사꽃은 
올해도 복사꽃이 피었습니다
속치마 속저고리 야무지게 입고 버선도 단정히 신은 꽃망울이
묵은 나무 가지마다 차 오릅니다
오늘 아침에 들여다 본 꽃잎엔 거미 한 마리 머물고 있더군요
순백의 면사포에 시커먼 집거미 올라앉은 모습이 
기이하고 처량하더이다
인기척에 놀란 거미, 줄을 타고 저만치 나갔다가 
그쯤에서 날 따돌렸다 생각했는지 재빠르게 꽃잎 뒤로 숨어버려요
다리도 보이고 머리도 보이는데
당신의 앞마당 뛰놀며 웃는 
발그스름한 복숭아 하나 보질 못하고
올해도 복사꽃 홀로 또 피어
 

10
복숭아 밭의 꿈

남대희

사월 복숭아 밭은 여학교 교실이다
가지가지 마다 연분홍빛 소녀들 재잘 댄다
뜀박질 하는 햇살 사이로
왕거미 뜨개질 한창이다
꽃자리 마다 솜털 보송한, 
풋풋한 꿈 영글어 가는 교실
바람과 햇빛과 달빛 이슬 
꽃잎 마다 쌓이면
꽃분 칠한 희망들도
나비 날개 타고 더 높은 하늘을 날겠지
초록 이파리 사이 
수줍은 젖 몽우리 부풀 듯
발그레 볼 붉히는 복숭아 단물 오르면
교실 칠판에 빼곡한 글씨처럼 
소녀들 가슴에 가득 찬 꿈들도, 
복숭아 씨앗 같이 단단해 지겠지
 
아지랑이 하롱하롱 꿈꾸는 사월

 
--------------------
 
심사평
이미지와 비유, 그리고 대상을 보는 참신한 눈
 
이건청 시인ㆍ한양대 명예 교수

 '복숭아문학상' 심사를 하면서 기쁜 마음이었다. 우리나라에
 '문학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학상을 주관하는 단체나 지면의 권위를 내세우는 그럴듯한 이름의 상들이 거액의 상금을 내세우면서 공모를 하고 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복숭아문학상'은 얼마나 풋풋하고 신선한 것인가. 첫 봄의 햇살을 머금고 이 나라 들판과 산등성이를 기적처럼 뒤덮는 복사꽃의 화사함이라니! 꽃 진 자리에 푸른 열매로 맺힌 것들이 튼실한 열매로 익어 입 안 가득 풍미를 채워주는 복숭아, 그 복숭아를 '문학'의 자리로 이끌어 낸 사람들의 혜안이 놀랍다. 또, 이 상을 만들고 운영해 오는 사람들과, 공모에 응해준 수 백 명의 응모자들의 열정은 얼마나 미쁜 것인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을 중심으로 '복숭아축제'가 하나의 브랜드 이미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땀 흘려 복숭아를 키워낸 사람들과, 하나의 열정으로 뭉쳐 성원의 힘을 보태주는 지역 사람들과 비옥한 흙과 물과 햇빛과, 아름다운 감성과 상상력으로 '복숭아'를 노래해준 응모자 모두에게 축복 있을진저. 바라기는 '복숭아문학상'이 한국을 대표하는 명성을 이뤄 문학적 성취도 크게 이뤄가기를 바랄 뿐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90 편의 응모작들을 공들여 읽었다. 상당한 문학적 수련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도 있었고, 아직 '시로 말하기'의 어법을 터득하지 못한 작품들도 있었다. '시로 말하기'란 무엇인가? 시인은 표현의도를 직설적으로 들어내지 않는다. 가령, 절대 고독의 나락에서 괴로워하던 어떤 시인은 그가 겪고 있는 '절대 고독'을 그대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고 쓰고 있다. 시인은 하고싶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고싶은 말' 대신 그 말의 '형태'를 찾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미지'나 '비유'는 말의 '형태'를 들어내 보여주는 최적의 방법일 것이다.
 또 하나, 응모작의 대부분이 '복숭아' 라는 핵심 주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인의 시선이 주제 자체에 머물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방식의 작품 공모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룰 주제나 표현 방식이 어떤 것일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복숭아 꽃의 아름다움이나 맛, 복숭아 재배의 어려움 등은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유형적인 것들이다. 새롭게 읽히고 감동으로 전해질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지안의 <몽유도원도>는 복숭아와 어머니를 합일 시켜 이미지의 통합을 이뤄내고 있는 작품이다. 말 다루는 솜씨도 능숙하다. '내일의 어머니로 성숙하는 열매들/그 속에 흠집 많은 내가 매달려/ 한잠쯤 달게 피어나고 싶다' 같은 표현이 그렇다.
 서기슬의 <복숭아를 닮은 당신에게>, 이재은의 <복사꽃을 따다>, 모재린의 <오후 5시의 향기>, 최정희의 <여인의 향기>와 같은 작품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시적 수련이 뒷받침된 시편들이다. 이미지나 비유를 표현 장치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임석훈의 <복숭아꽃이 진다>, 김생자의 <풍경>, 손지은의 <오로지 심장만 잉태하였다>, 김옥길의 <복숭아 나무>, 남대희의 <복숭아밭의 꿈>과 같은 작품들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노력해서 시적 자질을 기른다면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응모자 여러분의 앞날에 시적 행운이 활짝 열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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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대상]

첫사랑
- 나의 황도복숭아나무  / 임상훈

있잖아, 살이 점점 불어갈수록 바람이 
싸락싸락 내 여린 잎을 쓸어내렸지 무슨 봄날을 머금은 
바람이었나 단단해졌어 내 속의 씨앗이 
두근두근 여물면서 말이야 열일곱 살 내 가지들은 
햇살보다는 바람으로 자라났지 볼이 살짝 붉어지며 
너는 아니 내 꽃잎을 따가며 꽃자리 속 
심장 몇 덩이를 가지가지 돋아나게 하던 너 
매일 내 마음 속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나를 서리했지 덜 익은 심장이 콰득 
네 입 속에서 시큼하게 씹히던 여름날 
나는 토방 깊이 뿌리내리며 울창해지는 한 그루 
기다림이었네 침이 가득 고이던 잇속 너의 
그늘이었네 여름이 깊어 갈수록 
내 심장은 물러지고 한 철이었다는 듯 
너는 오지 않았지만 있잖아, 
불어가는 살 속 퐁 퐁 퐁 
네가 뱉은 내 씨앗들이 내 속에 가라앉는 저녁 
기억의 나이테는 파문처럼 전신에 퍼진다 
열일곱 여름은 그랬지 다른 여름이 또 와도 
아픈 꽃자리 뚫고 내 심장들이 앓을 걸 알면서, 그래도, 

 

제3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복숭아의 사랑 / 서 규

우체통 같은 복숭아에서 
그대의 편지를 읽는다 
봉숭아로 꽃물을 들인 
약지의 손톱처럼 꽃잎 음절들이 
내재율의 향기로 배어난다 
복사꽃 핀 언약의 한때가 
깨끗한 마음결 여백에 
깊고 고요한 떨림으로 새겨진다 
나비가 일군 바람의 길을 따라 
하늘하늘 꽃 진 작별이 
이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샛별 뜬 샘물에서 
정화수를 길어 눈빛을 씻고 
햇살에서 뻗어 내린 혈맥을 
푸릇한 과육에 올올이 엮었습니다 
풀벌레 울음이 글썽한 한밤  
그리움으로 돋운 등의 심지에 
불씨를 밝혀 만월을 품었습니다 
꽃몸살로 신열이 지펴지면 
별빛 침으로 속살에 문신을 떠  
고통으로 견뎠습니다 
열매 한 알을 충만하게 익혀 
당신께 고이 바칠 때 
기쁨이 차고 넘치는 
선한 눈매를 그렸습니다 
결실의 축원으로 넘는 하루하루가 
값진 생이었습니다 

생혈 같은 과즙 한 방울을 
허투로 흘릴 수 없는 
편지 속 정금正金의 말씀들 
향긋한 여운이 죄를 씻기며 
해맑은 기운으로 휘감는다 
사랑표시로 빚은 문양에 
단청빛으로 환해진다


제3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도화-살  / 장 미

소시적 너는 
솜털같은 바람도 
간지러워서 날아가는 마음이었다. 
낯을 붉혔던지 
귀부터 발그레져 가던 얼굴은 
집집마다 봄바람 다녀간 처녀들 같았다 
꿈꾸듯 떠다닐 때에 
처녀들 치맛단이 같은 색으로 나폴거렸던 
그즈음  
너는 누구를 사모했던지 
보름달빛에 
비쳐보이는 잔상이 있었는가 보다 

- 그때부터였을 게다  
아름답지만 슬픈 처녀를  
너로 불렀던 것은 - 

담장 밖으로 손뻗은 가지 하나가 꺾였다. 
허울이었던 잔상을 쫓던 너는 
온 마음을 슬픔으로 우르르 날려보내고는 
하염없이 비춰보던 달의 얼굴을 닮아갔다 

이제는 
서둘러 가을을 들이려는 
그 뺨 
수줍음이 번지던 시절이 생각난다 
두터운 상처로 엮은 외투 
벗은 속살에 입 맞추면 
가득 눈물처럼 번지는 진한 香 
아직도 속내가 많은 여인이다 
소시적 낯붉히던 풋 마음이 
향으로 배있는 

 

제3회 복숭아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기억에서 피는 꽃 / 이병희

베어낸 복숭아 나무로  
아버지는 군불을 지피셨다 
다 피지 못했던 
꽃을 기억해낸 걸까 
가지 끝에서 
붉고 투명한 불꽃이 
복사꽃처럼 밝게 
꽃을 피운다 
푸시시 푸시시 타닥거리며 
가지에 앉아 부르던 
새들의 소리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늦은 기억에 
아파한다 
가지에 매달리던 복숭아 같던 
첫사랑을 솎아 버리고 
해마다 
여름이면 장맛비보다 더 많은 
눈물을 과수원에 쏟아내야 했다 
첫사랑이 매달리던 그 자리에 
올해부터 백촉짜리 전기불로 황도가 열리지만 
기억까지 솎아내지 못하겠어 
아프다 

아궁이 안쪽이 달속처럼 환하다 
헛기침 소리 두어번 난다 
나는 복숭아 향내 나는 구들방에서 
황도를 싼 봉지를 뜯는다 
죄를 짓듯 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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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적멸寂滅 / 박미라

잘 익은 복숭아를 고른다 
향기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을 
너무 오래 골랐을까 
손 댄 자리마다 거뭇거뭇 멍든 복숭아를 먹는다 
보스스 솜털 날리던 비리고 작은 몸 
언제 이만큼 깊어졌을까 
속살까지 문드러진다 
주르르 단물 흐른다 
제 가진 가장 향기로운 것으로 나를 적신다 
그냥 흘러 갈 수 없다는 듯 끈적이며 늘어 붙는다 
끈적이는 것이 모두 집착은 아닐테지 
시퍼렇게 멍든 살점을 꿀꺽 넘긴다 
이제 다 익었나 
그냥 두면 떨어져 버릴 텐데 
누가 나를 자꾸 고르는 중인가보다 
송구하여라 
비를 많이 맞아서 싱거울 텐데 
몇 군데 벌레 먹은 곳도 있는데 

손가락으로 저승꽃을 지우는 거울 속의 여자

 

 

 

[우수상]

 

복숭아 그 설레임 / 방인자

금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작은 실바람이
향기를 몰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찻잔에 가슴만큼 뜨거운 물을 담고
여린 복숭아 꽃 한 송이 띄우니

아기 얼굴 같은 꽃잎이 하나 둘 열린다
차마 마실 수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이 웃고 있다

땀이 빗방울 만큼
쏟아진 지금

작은 꽃송이는 솜털 뽀송한
복숭아 되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마 한 입 베어 물지도 못한 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수줍음 많은 색시가 되어
발그레 웃고 있다

 

 

 


지지 않는 복숭아꽃 / 권명숙

흐린 날도  
그 곳은 환하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양 어깨에 둘러메고 
마음 든든했던 것처럼 

사월 하순 
4주간의 숙박을 청하며 그녀의 마을로 들어선 것이 
발 디딜 틈없이 온통 샛 분홍의 물감을 덧칠한  
바로 그 날이었다 
방망이질하는 가슴으로 교육실습생이 찾은 곳이 
하필이면 복숭아꽃처럼 맑은 여학생들이 모여 
복숭아 과수원을 이룬 시골 여학교 

봄볕은 꽃잎에 부딪혀  
눈을 뜰 수 없게 쏘아대고 
긴장된 실습생은 눈을 감고라도 
꽃들의 마음을 읽어야 했다 
바람과 구름을 헤치고서 그들은 
햇빛을 빨아먹어야함을 이해해야했고 
꽃 진 자리 아물 때까지 
새벽 별빛 아래서 손 모아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성이 모여 살이 되고 향이 되어 
달콤한 과즙 한 방울 만들게 됨을 알게 되면서  
그녀도 고개 숙여 손을 모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처럼 
넓은 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 곳에는 늘 환한 빛이 있으므로 

이후로 그 곳에는 
복숭아꽃이 지지 않는다 




복숭아 그림자로 남아 / 최윤경 
                         
누군가에게 향기 짙은 꿀이 되고 싶다  
달콤한 속내 감추고 얼굴만 붉혀  
꺼칠하게 깎지 않은 수염을 비벼대던  
아버지의 힘없는 미소와 함께 
병석에 누운 황도 통조림 한 조각  
덧없는 세월에  
발그레 상기된  
절정의 꽃은 스러져  
화사한 자태로 웃음 한 자락 걸치고 있다  
따스함이 배어 난   
수줍은 듯 청아한 미소  
쉴 새 없이 소곤소곤 부풀어  
홍조 띤 두 볼이 곱다  
보송보송 솜털이 돋아난  
아기의 볼기같이 뽀얀 살  
벗겨진 껍질에서 달디 단  
어머니의 젖이 흐른다  
세월을 떠메고 간 모든 것들이 
출렁이며 다가선다




개복숭아의 미학 / 오서정 
                                      
찔러대는 매미가 더위에 불을 댕긴다 
삼복염천에 휴가라는 이름을 덮어 쓴 
조카들과의 계곡 나들이 

하물며  
굵은 주름 베개 삼아 땀방울도 쉬어 가는데 
단물난 밀짚모자 속 
시원하면 여름이더냐 
힘겨움 뒤로한 사랑의 미소. 

시뻘겋게 달아오른 벽촌의 양철지붕  
망중한 한나절도 아깝다시며 
어여 가라~ 동구밖까지 춤추는 손 
아쉬운 뒷걸음질만 쳐지는 건…

담벼락 삭은 벽돌 구멍 속 
숨통 조이고 있던 검정 비닐, 
옹기종기 복욱함 속의 널 
조카가 안고 왔다. 

자손들 나들이길 주실 건 없고 
행여 섬섬옥수 쓸릴새라 
억센 솜털 손수 닦아내시며 
실한 놈 하나마다 곡진한 마음. 

촌음에 성성 낀 검버섯 
비소하고 구주레한 널,                     
뽀드득 뽀드득  
우금의 계곡물에 띄운다. 

살짝 삐져 물은 너의 육신 
향신료 쏟아부은 듯 
진한 향의 전율에 취하는 몸, 
부모님 사랑에 한번 더 취한다. 




과수밭 가는 길 / 황용철

나는 과수밭 가는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다보면 
들꽃도 보고 작은 벌레며 
매미 우는 소리도  
정겹게 느껴진다 

과수밭에 들면 
분홍빛 나는 복숭아와 
볕에 익은 빨간 복숭아들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아 좋다 

과수밭 복숭아 향기가 
사방에 퍼지면 일상 속 삶이 
온통 향기로움만 
가득 해 지는 것 같아 좋다 

복숭아 한 경운기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네 부모님 얼굴에  
굵직한 땀방울 가득 
얼굴 가득 삶의 주름이 
이 과수밭과 함께하니   
난 과수밭 가는 길이 
우리네 인생과 같아서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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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복숭아 처녀 / 김명숙

그녀가 말하던 동네를 물어물어 가다가 
굽이굽이 돌아나오다 다시 찾아가는 길  
햇살은 붉은 빛을 토해내고 돌담도 흙담도  
혓바닥처럼 달아오르는 팔월의 한낮 

내 맘 속 그리움으로 남아있던 아이는 
복숭아밭에 갔다 온다며 얼굴 붉히는 수줍은 새 
내 맘 속에 걱정으로 자리했던 그녀는  
탈탈 자전거 밟으며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봉숭아 꽃물 들이는 장독대의 저녁 무렵 
열 손가락 칭칭 묻어나는 사랑에 
하늘에는 잠자리가 빙빙 맴을 돈다. 
마주한 웃음 메아리로 깔깔대는데 
그녀의 복숭아도 환한 웃음 짓는다. 
살아 온 이야기는 마당으로 퍼지는데 
무거운 짐보따리 하나 마당에다 털썩 내리고 
복숭아 양푼에 가득 행복한 추억을 담는데 
마루 건너 밭에서는 복숭아가 또 웃고 있다. 




[우수상]

복숭아의 사랑 / 이병룡 

이른 아침  
박새 한 마리가 
복사꽃 피는 소리도 
듣지 않은 채  
나뭇가지에 발자국만 남기고  
다른 나무로 날아간다 
흰나비가 일으킨 물결이  
나른한 복사꽃의 한낮을  
살짝 흔들고 
바쁘게 지나가던 바람이 
복숭아나무 밑에서  
졸고 있던 누렁이 털을  
후욱 털고 지나간 것뿐인데 
그날, 
복사꽃은  
소리 없이 머리를 올리고 
기어코 쳐들어오는 햇살의 
따뜻한 끝점을 위해 문틈을 열어 두었다 



[우수상]

복숭아 / 김용철 

풋풋한 가지마다  
종이 꼬깔 쓴 열매  
그것은 소망을 매달아 놓은  
마음의 종이다 

도회지로 유학 보낸 아이 
환한 얼굴 어루만져줄 손길이요 
노부모 공양할 양식이고 
따뜻한 아랫목 아내와 나눌 정이라 
염원의 종 매달아 놓고  
날마다 땀방울로 혼을 울린다 

보리수 아래 석가가 깨달음의 수행 하듯 
아흔아홉 날 비바람과 햇살에 씻기며 
고행을 함께 하여 빚은 종소리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고운 모습 우화의 껍질 벗는 날 
아비가 딸을 시집 보내듯 
꽃가마 태워 너를 보내리라 



[우수상]

복숭아 예찬 / 홍미영 

동그란 두볼에 흐르는 붉은 수줍음은 
움푹 파인 골을 지나 살색 설레임으로  
흐르고 또 흐른다. 
누구를 향한 부끄런 속내일까? 

얇은 껍질속 떨리는 속살이 행여나 보일까 
초록빛 이파리로 얼른 몸을 숨기니 
아마도 부끄런 새색시 맘인가 보다. 

단아한 너를 두손에 조심스레 담아보니 
몸안엔 부끄런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몸속엔 파란 가을 하늘이 가득 들어있구나. 
부끄런 속내가 하늘하늘 가을꽃이 되었구나! 

수줍은 달콤함의 고운 향내가 혀끝을 감돌고 
아름다운 모양새가 나의 온몸을 휘감는 가을날 

탐스런 복숭아 고운빛 수줍은 숙명은  
그렇게 부끄런 속내를 몸안에 가득 담고   
설레임과 두근거림속 깊은 행복을 전하는 
고개숙인 부끄런 새색시 아름다움인가 보구나 



[우수상]

복숭아의 가르침 / 박기정     

따뜻한 봄햇살 받으면 외롭게 자라난 복숭아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반가워하며 자신의 살갗이  
젊은 여인의 발그레한 볼살 색깔로 바뀔때 
복숭아는 여물 때로 여물어 건드리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빨갛고 흰 풍선으로 변하고 
그런 복숭아의 단아한 색동옷을 들춰보며 나는 행복합니다. 

색동옷을 들추고 나면 홍안의 미인은 사라지고 
이 뜨거운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함박눈이  
여름에 지친 나를 식혀줍니다. 
나만 더위를 식히고 나니 남은 것은 나의 어머니의 주름살 
같은 복숭아 씨앗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나는 후회합니다. 

홍안의 미인이셨던 어머니가 나만의 목마름을 채워주시고 
이제 보이는 것은 주름뿐.. 
복숭아를 보며 나는 오늘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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