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적멸寂滅 / 박미라
잘 익은 복숭아를 고른다
향기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을
너무 오래 골랐을까
손 댄 자리마다 거뭇거뭇 멍든 복숭아를 먹는다
보스스 솜털 날리던 비리고 작은 몸
언제 이만큼 깊어졌을까
속살까지 문드러진다
주르르 단물 흐른다
제 가진 가장 향기로운 것으로 나를 적신다
그냥 흘러 갈 수 없다는 듯 끈적이며 늘어 붙는다
끈적이는 것이 모두 집착은 아닐테지
시퍼렇게 멍든 살점을 꿀꺽 넘긴다
이제 다 익었나
그냥 두면 떨어져 버릴 텐데
누가 나를 자꾸 고르는 중인가보다
송구하여라
비를 많이 맞아서 싱거울 텐데
몇 군데 벌레 먹은 곳도 있는데
손가락으로 저승꽃을 지우는 거울 속의 여자
[우수상]
복숭아 그 설레임 / 방인자
금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작은 실바람이
향기를 몰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찻잔에 가슴만큼 뜨거운 물을 담고
여린 복숭아 꽃 한 송이 띄우니
아기 얼굴 같은 꽃잎이 하나 둘 열린다
차마 마실 수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이 웃고 있다
땀이 빗방울 만큼
쏟아진 지금
작은 꽃송이는 솜털 뽀송한
복숭아 되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마 한 입 베어 물지도 못한 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수줍음 많은 색시가 되어
발그레 웃고 있다
지지 않는 복숭아꽃 / 권명숙
흐린 날도
그 곳은 환하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양 어깨에 둘러메고
마음 든든했던 것처럼
사월 하순
4주간의 숙박을 청하며 그녀의 마을로 들어선 것이
발 디딜 틈없이 온통 샛 분홍의 물감을 덧칠한
바로 그 날이었다
방망이질하는 가슴으로 교육실습생이 찾은 곳이
하필이면 복숭아꽃처럼 맑은 여학생들이 모여
복숭아 과수원을 이룬 시골 여학교
봄볕은 꽃잎에 부딪혀
눈을 뜰 수 없게 쏘아대고
긴장된 실습생은 눈을 감고라도
꽃들의 마음을 읽어야 했다
바람과 구름을 헤치고서 그들은
햇빛을 빨아먹어야함을 이해해야했고
꽃 진 자리 아물 때까지
새벽 별빛 아래서 손 모아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성이 모여 살이 되고 향이 되어
달콤한 과즙 한 방울 만들게 됨을 알게 되면서
그녀도 고개 숙여 손을 모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처럼
넓은 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 곳에는 늘 환한 빛이 있으므로
이후로 그 곳에는
복숭아꽃이 지지 않는다
복숭아 그림자로 남아 / 최윤경
누군가에게 향기 짙은 꿀이 되고 싶다
달콤한 속내 감추고 얼굴만 붉혀
꺼칠하게 깎지 않은 수염을 비벼대던
아버지의 힘없는 미소와 함께
병석에 누운 황도 통조림 한 조각
덧없는 세월에
발그레 상기된
절정의 꽃은 스러져
화사한 자태로 웃음 한 자락 걸치고 있다
따스함이 배어 난
수줍은 듯 청아한 미소
쉴 새 없이 소곤소곤 부풀어
홍조 띤 두 볼이 곱다
보송보송 솜털이 돋아난
아기의 볼기같이 뽀얀 살
벗겨진 껍질에서 달디 단
어머니의 젖이 흐른다
세월을 떠메고 간 모든 것들이
출렁이며 다가선다
개복숭아의 미학 / 오서정
찔러대는 매미가 더위에 불을 댕긴다
삼복염천에 휴가라는 이름을 덮어 쓴
조카들과의 계곡 나들이
하물며
굵은 주름 베개 삼아 땀방울도 쉬어 가는데
단물난 밀짚모자 속
시원하면 여름이더냐
힘겨움 뒤로한 사랑의 미소.
시뻘겋게 달아오른 벽촌의 양철지붕
망중한 한나절도 아깝다시며
어여 가라~ 동구밖까지 춤추는 손
아쉬운 뒷걸음질만 쳐지는 건…
담벼락 삭은 벽돌 구멍 속
숨통 조이고 있던 검정 비닐,
옹기종기 복욱함 속의 널
조카가 안고 왔다.
자손들 나들이길 주실 건 없고
행여 섬섬옥수 쓸릴새라
억센 솜털 손수 닦아내시며
실한 놈 하나마다 곡진한 마음.
촌음에 성성 낀 검버섯
비소하고 구주레한 널,
뽀드득 뽀드득
우금의 계곡물에 띄운다.
살짝 삐져 물은 너의 육신
향신료 쏟아부은 듯
진한 향의 전율에 취하는 몸,
부모님 사랑에 한번 더 취한다.
과수밭 가는 길 / 황용철
나는 과수밭 가는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다보면
들꽃도 보고 작은 벌레며
매미 우는 소리도
정겹게 느껴진다
과수밭에 들면
분홍빛 나는 복숭아와
볕에 익은 빨간 복숭아들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아 좋다
과수밭 복숭아 향기가
사방에 퍼지면 일상 속 삶이
온통 향기로움만
가득 해 지는 것 같아 좋다
복숭아 한 경운기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네 부모님 얼굴에
굵직한 땀방울 가득
얼굴 가득 삶의 주름이
이 과수밭과 함께하니
난 과수밭 가는 길이
우리네 인생과 같아서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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