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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여인 / 이병철 [대상]

 

햇살에서 찰랑, 물소리가 들린다

복숭아나무 우듬지는 파란 깃발을 흔들고

허공마다 잠에서 깬 물결무늬의 기지개

멀리 보이는 구름들은 절해의 외딴섬이다

고기떼처럼 살랑거리는 잎사귀 사이로

성큼성큼 부풀어 오르는 분홍색 파도

너는 신열처럼 만개했구나

피부는 고운 결마다 붉은 빛을 뿜어내고

가늘고 투명한 솜털 위엔 하얀 숨이 굽이돈다

잎새 하나 파르르, 잡아 흔드는 엷은 바람

너는 달콤한 향기로 내 코를 자극하고

내 입술 위로 이슬 머금은 네 입술이 겹쳐질 때

수평은 무너지고, 세상의 모든 직선이 구부러진다

 

 

 

 

 

 

장호원 복숭아 / 최인숙 [최우수상] 

 

대숲에 바람이 들어서면

긴 휘파람 소리가 납니다

휘파람은 날아서 항아리 속에 담깁니다

침묵을 퍼내고 둥근 속을 어루만지며

오래 기다렸던 손길로 파고듭니다

모난 곳 없이 둥근 손짓입니다

둥근 손짓에 깊이가 생겨납니다

채움과 비움을 생각하는 동안

항아리엔 달빛과 낮은 자장가 소리 가득하다 비워지고

비워지다 다시 가득합니다

그 위에 붉은 뺨에 패인 보조개도 스칩니다

젊은 어머니 처음 젖을 물렸던 날

내 울음소리도 저렇게 붉었겠지요

 

 

 

 

 

 

복숭아 / 허영둘 [우수상]

 

도공은 보이지 않는다 달이 백도처럼 익고 있는데 달항아리 빚던 사내 여기 없다 낙관 한 점 붉게 찍어놓고 하늘은 모르는 척 말이 없어 거처 모르는 바람의 행방이나 가늠해 본다 칠월은 고매한 정신마냥 푸르고 장인이 목숨으로 지키는 가마 속 열기에 여름은 명품으로 완성된다

 

초록 불길에 달이 아주 익어 밤길마저 환할 때 다시 그는 오리라

 

옹기종기 매달린 항아리들, 달을 가득 채운 달항아리들에게서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비할 바 없는 향기를 깨물면 이른 봄부터 햇빛 쓸어 모으던 비질 소리 들리고 햇살 뭉쳐 물레를 돌리던 손금 없이 맨질한 손이 만져진다 바람의 가닥을 한 줄 한 줄 고르던 고집스런 그의 숨소리, 달빛에 떠는 심장도 물컹 씹힌다

 

가마 속 불길 잦아들고 달을 모두 비운 항아리들, 머물 수 없는 달처럼 지체 없이 저물어야 할 때, 빈 항아리를 짊어진 한 사내 가을이 오는 길로 뉘엿뉘엿 가고 있다

 

 

 

 

 

 

황도 복숭아 / 오아녜스 [우수상]

 

매미울음소리에 둘러싸인 복숭아밭

키 작은 나무들이 잎을 흔들고 있다

복숭아를 감싼 노란 종이 속을 들추는 바람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황도 복숭아 아래

먼저 익은 복숭아들 멍이 든 채로 떨어져 있다

 

갈라진 벽 틈을 회색 시멘트로 메꾸고 있는

늘푸른 노인전문 요양원

5층짜리 건물이 층층이 색을 덧칠한다

시멘트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3층

치매를 앓는 할머니들만 모여 있는

306호 문 속으로 울음소리가 절여 있다

더 이상 돌볼 수가 없어 이곳에 맡겨진 할머니들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 어쩌다 오는 날이면

황도 복숭아 통조림만 가득 놓고 간다

끊긴 가족들의 발걸음 잊어버리도록

황도 통조림 캔 하나 따서 주는 보호사들

숟가락으로 잘게 쪼개준 황도 베어 물며

할머니들은 외로움을 삼킨다

새들이 날아와 단물을 빨아먹는데도

손을 휘젓지 못하던 할머니들

멍이 든 복숭아처럼 축 늘어져 있다

기저귀 찬 곳에 난 땀띠를 박박 긁을 때마다

할머니 가둔 요양원도 긁어버리고 싶은지

창밖을 바라보며 인상을 쓴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초코파이만 먹는 할머니에게

치약을 건내는 할머니

제 아픔들은 잊은 채 서로를 돌본다

 

늦은 오후, 보호사가 빈 침대 시트를 정리 한다

침대에 앉아 고양이 울음소리 내던 할머니 자리엔

여름 햇살이 대신 드러눕는다

침대 옆 서랍장 안으로

따지 않은 황도 복숭아 통조림 가득 열려있다

 

 

 

 

 

 

복숭아 / 박동미 [우수상 ]

 

붉은 뺨 부비는 저 여린 초록

살아 온 날들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산 허리 돌아 어디쯤

몸을 풀어놓을까

바람에 부풀린 그림자가

쟁쟁한 햇살과 어렴풋한 추억,

하나의 형상이 혁명처럼

오래도록 펄럭거리고 있다.

 

달콤 새콤 한 잎 물고

하늘 바라보면

푸근한 어머니 같고

달덩이처럼 고운 누이가

하늘에 떠 있네요

복숭아 꽃잎 환하게

밝히던 봄날의 기억도

아슴아슴한 그리움으로

내 가슴 붉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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