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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복숭아 신부 / 이미순


허공에 보름달 환히 켠 나무의 향이 번진다

가지들 휘청휘청 단내 흐드러지는

복숭아 마을, 햇살 꽃무늬 원삼을 입고

바람 족두리 쓴 새색시의 웃음으로 밝다.

달콤한 향기로 열매 맺은 저 신부,

어떤 이름으로 불려지는지.

연지곤지 찍은 얼굴 아름다운 그녀

촉촉한 빗방울 당도를 품은 입술로

다소곳이 신방으로 들어간다, 비 온 뒤

며칠 동안 그 방의 습한 공기를

몰아내던 바람, 창호지 얇은 꽃문에

작은 구멍을 몰래 뚫는 그때, 문짝을 활짝

열어젖히고 훤칠한 신랑이 신방으로 들어간다.

틈 사이로 복숭아 신부를 힐끔거리던

새소리가 나무그늘 안쪽에 붉은 노을로 물들고

신랑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황홀한 밤,

주례자 햇살이 흘리고 간 그 꽃종이에 쓴

신부의 이름은 황도복숭아,

푸른 나뭇잎 한 잎 한 잎 무늬를 품은

꽃문에 보름 달빛이 환하게 번진다.






[최우수상] 복숭아를 읽다 / 김태일


하늘에 창을 내지 않아도 물큰 붉은 달이 만져지는 때가 있다.


내가 복숭아에서 연어의 몸짓을 본 건 새털구름 속에 은둔하던 바람이 잠시 나와 복숭아 곁에 머물 때였다. 바람에 살결이 닿은 섬모가 잠시 휘청이는 사이 찰랑 팔랑 수백만의 흰 물결 디디며 여름을 건너온 나무의 발자국이 보이고 발자국 속에 뙤약볕 쓸어 담는 가지의 질긴 힘줄 도드라진다. 나무가 무릎에서 무지개를 꺼내 하늘에 던지면 둥글, 달이 되는 복숭아 한 알. 젖을 열어 수액 방울방울 떨어뜨리면 아기 새처럼 입 벌려 쑥쑥 크는 아이들, 발그스름한 볼에 복사꽃 닿으면 남극처럼 맑아지는 눈동자들, 올망졸망 나무의 물관 속에는 연어의 아가미를 단 엄마, 발자국 퍼덕이며 거꾸로 헤엄쳐 오르고 아이들은 박수를 치고 박수소리는 장대비처럼 자라가고.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연어의 붉은 살 함부로 베어 물진 못할 거야. 아이들은 연어 속 엄마의 살을 먹고 자랐으므로, 복숭아의 하늘은 연어 살보다 붉을 것이므로.


들리지 않는가, 복숭아 옷깃 살짝 들면 지금도 우리 엄마 뙤약볕 돌돌 말아 머리에 이고 여름의 발자국 지우는 소리.






[우수상] 복숭아나무의 두레박질 / 박광희


한밤중, 두레박질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매미 울음소리 달아올랐던 복숭아밭에서

누군가 그릇 가득 물을 채우는 소리

뿌리에서 우듬지 끝으로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저 끝없는 복숭아나무의 눈 시린 노동

어디 쭈글쭈글한 곳은 없는지

둥글고 팽팽한 얼굴 하나 만들기 위한

물 긷는 소리로 복숭아밭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리하여, 아침이면

나무들의 둘레가 어제보다 환해져 있다

달디 단 과즙으로 벌떼와 진딧물을 불러 모으듯

모두 깊이 잠든 밤에도 나무들은 뜬눈이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눈빛 까만 아이들과 착한 아내를 위하여

과육 속으로 녹아들 햇살과 바람을 다스리는

이 밤 여울물 거슬러 오르는

나무들의 힘찬 좽이질, 무딘 손끝에

둥근 달과 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이다

이 여름 옹골차게 물을 긷고 있는 것이다






[우수상] 황도의 사랑학개론 / 한상림


심장에 새겨진 붉은 내력을 읽어 보세요

23.5도 갸우뚱 돌고 있는 작은 별에서 태어나

사방에 분홍꽃등 밝혔던 날

간지럽던 발가락 끝에 곰살곰살 뿌려주던 달빛,

그 달빛 품으며 사랑이 시작 되었어요

아기씨 하나 몰래 감추고

엄마가 되게 해 달라 매일 밤 기도 했지요

젖니를 깨물며 튼실해진 속살,

그 여린 속살 감추기 위해 까끌한 것이

햇살 탓만은 아니었어요, 바람은 때때로

험상궂은 소나기를 몰고 와 괴롭혔지만

잘 물러지려면 먼저 단단해져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자, 조심스럽게 벗겨 보실래요

달디단 속 살 한 입 살짝 베어 보세요

온 몸이 들큰해 질 거예요

황금빛 무른 속살을 설탕으로 잠재워볼까요

지난 밤 뒤척이며 흘리던 눈물도 섞어

쓰라린 상처와 잘 버무린 다음 팔팔 끓여주면

맨살 부비며 농익었던 지난여름 사랑이

서서히 녹아내릴거예요

말랑말랑 할수록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달콤한 맛을 내거든요, 잘 우러나거든

차갑게 식혀서 유리병에 담아 자장가도 불러주세요

잠시 단꿈에 빠져들 수 있게요

아참, 단단히 봉해야만 비밀이 보장 되어요






[우수상] 넉넉한 방房앞에서 / 한관식


저녁이 어제처럼 당도했네.

잘 익은 복숭아 물이 저녁을 염색하네.

애교 버무린 하늘이 닿을 듯 가깝네.

山이 된 산새는 날아가

山으로 피고지고 울음만 무성하네.

창가에 그 울음 앉아 땅거미처럼 앉아

누이야, 부르면 안개가 먹먹하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쌀뜨물 같은

그리움이 어깨를 움켜잡고 있네.

이제 식탁 주위에 복숭아로 촛불처럼 밝혀야하네.

나그네도 가던 걸음으로 멈춰

속 깊은 저녁 방 앞에 生을 내려놓네.

노을은 시들고 바깥은 둥둥 섬처럼 떠다니고

내 품은 오지게 여울로 구성지네.

한 입 배여 문 복숭아가 우울하고 따분한 일상에서

아침을 열고 있네.



 

 

 


[심사평]


  복숭아 문학상이 어언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복숭아가 해마다 풍성한 결실을 맺듯 복숭아문학상도 이제는 명실상부한 전국적 대회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에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총 응모 편수 387편 가운데 예선을 통과한 작품은 33편이었습니다. 결선에 오른 작품들은 나름대로 ‘복숭아’라는 제재를 자신의 시적 체험과 연결시켜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완성도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상작을 선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마련하여 심사에 임했습니다.


1. 주어진 제재와 자신의 시적 체험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가?

2. 시상 전개와 시적 표현들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신선한가?

3. 얼마나 자연스럽게 주제의식이나 시적 정감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등의 조건에 부합하는 작품을 심사하여 6편의 최종 입선작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미순의 <복숭아 신부>와 김태일의 <복숭아를 읽다>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미순의 작품은 시의 운율적 특성과 내용이 잘 어우러진 점에 점수를 주었고, 김태일의 작품에서는 제재를 읽어내는 깊이 있는 심미안과 참신한 이미지의 사용 등에 더 좋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산문시의 특성상 시적 표현에 비해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운율의 흐름이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들었던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전체적으로 ‘복숭아’라는 제재를 우리의 전통적 혼례 의식에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서 시적 완성도에서 앞선 이미순 씨의 작품을 장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입상을 축하드리며 더욱 정진하여 우리 문단을 이끌 훌륭한 문인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 박영우 (시인,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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