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복숭아의 꿈 / 하채연
어머니의 구부린 무릎이 복숭아를 닮아간다
풋내 나던 세월은 하얀 껍질 속에서 익고
낡아 해진 치마폭 사이로 비치는 살결은
여생을 다하느라 과도가 되어 까슬해진다
매끈한 가지를 엮는 은빛 주름 밑으로
흰 무릎에 곳곳이 파고든 숙성의 흔적
여름의 기억이 시린 관절을 따라 번지고 있다
신문지가 싸고도는 활자들의 달콤한 세상을
따스한 볕으로 무르익게 한 어머니
잎사귀가 바람을 접는 한밤에는
잠시 복숭아를 달무리에 담아두는데
밤이 계절만큼이나 긴 이불을 걷어내고
꿀샘를 펼쳐 열매가 말랑하게 익어간다
온종일 땡볕에 담금질한 속살을 식히며
복숭아를 따던 태몽을 되새기는 시간
과육을 치마폭에 주워 담다 놓치고
무른 무릎은 중력을 멍으로 머금지만
주홍으로 빛나는 과즙이 온 밭에 가득하다
나는 오래전 어머니가 따온 복숭아
밤마다 행성처럼 열리는 열매를 골라
한 입 베어 문 꿈이 오늘도 태어나고 있다
[최우수상] 넌 나의 복숭아나무 / 한영민
바다에 별똥별이 떨어지듯이
네가 퐁-하고 뱉은 씨 하나가
푸른 물결 일렁이며 나에게로 떨어졌지.
그리곤 단단한 심장 속에 자리 잡았어.
그러더니 어떤 날은
자꾸만 간지럼 태우는 너의 노래 소리에
내 맘 가득히 메아리로 퍼지더니
너로 촉촉이 스며드는 심장에
새싹 하나가 돋아나더라.
사월의 봄 향기에 취했는지 네게 취했는지
널 바라보기만 해도 배시시 웃음 지었고,
싱그러운 여름을 닮은 너의 미소 때문인지
파도가 몰아치듯 두근거렸지.
너의 뿌리가 내 심장을 더욱 움켜잡을수록
그렇게 걷잡을 수 없게
가지가 자라났고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라.
너를 향한 꽃들이 무수히 피었고,
내 붉은 마음을 닮은 수줍은 열매가 맺혔지.
온 몸 가득 단내 풍기는 내 마음이
그렇게 너에게로 닿기를
내 스무 살 심장에 자라난
복숭아나무 한그루.
베고 싶어도 베어낼 수 없는
깊은 내 첫사랑.
[우수상] 복사꽃 그녀 / 김수진
봄이 피운 복사 향에 밤잠을 설칠 때가 있다
전화가 불통이던 허구헌 날,
누군가는 밤을 껴안고 잠들기도 했다
동네 사내들의 달콤한 말에
황급히 손으로 두 뺨을 가리던 그녀는, 베트남 여자이다
종종걸음으로 나이 많은 남편의 그림자를 뒤따른 날엔
그녀의 뒤꿈치가 붉게도 갈라터졌다
웃자란 꽃잎들이 모국어로 모여 울던 날,
그녀가 도망쳐 나온 자리에는
복사나무 몇 그루가 환하게 출렁거렸다
배곯은 바람에 엮여 온 부모님 목소리가
와락 쏟아져 내린다, 나뒹군다
여자는 말없이 능소화빛 하늘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여자는 말수가 줄어든 것일까
하루 한 끼의 느슨한 시간은 어쩌자고 이렇게 긴지,
위태롭게 흔들리던 여자의 연애담이 폭삭 주저앉는다
한 줌 고요가 비좁은 밤을 둘러싼다
비칠비칠, 여자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복사향이 묻어난다
여자의 하얀 살갗이 분홍빛으로 부풀어 오른다
여자의 꿈자리에 별이 한 송이씩 피어날 것만 같다
[우수상] 복숭아의 마지막 생육점 / 노점섭
내가 사는 세상
한 해가 짧아 울고 싶어도 거울이 없는 얼굴표정
쌓인 과거가 없는 내 몸은 너무 밋밋해
어쩌다 바람은 밀어를 흉내 낸 악성 코드로 남아
상처는 다시 건너오지 못할 강이었지만
그래도 잎들의 놀이터는 햇살을 빨아 나를 키운다
낮과 밤의 온도 따라 어른이 되는
더 둥그러지고 더 무거워지는
푸른 옷에서 선분홍으로 화장하는 여인이 되고
행복지수는 100도로 끓는다
달콤한 언덕을 넘는 계절은 여인의 입술 같은 거
지금 어느 시점의 달력이 내 몸을 더듬고 있는지
햇살을 반죽하는 두뇌는 오직 단맛의 생각
음지와 양지가 생을 나누어 당도의 질을 높이는 것
바람은 배달부처럼 맛있는 소식을 전한다
여름은 복숭아 향이 부르는 소리
시집 갈 종착역, 기다림에 더욱 얼굴 붉어지고
문을 두드리는 손길
팔려가는 사랑에 나무는 빈손으로 서 있고
마지막 생육점의 끝 표시 어디쯤
내년에도 이 주소로 맛있는 소식 안고
복사꽃 편지가 또 오겠지
[우수상] 햇살의 거미줄 / 윤영규
햇살은 거미줄이 되어
많은 곳에 그물을 놓았다
윗말 김씨네 농장 복숭아는
촘촘하게 햇살이 거미줄을 쳤다
뿌리도 햇살의 자국이 되어
단물을 물관으로 올려 보냈다
수밀도(水蜜桃)의 그윽한 단내가
날벌레 날짐승까지 몸살을 앓게 한다
모두 햇살의 거미줄에 걸린 탓이다
아내는 한그루 복숭아나무 아래서
햇살의 무늬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해를 훔쳐 주었다
[심사평]
올해도 복숭아문학상에 응모해주신 응모자 여러분들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해마다 심사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의 수준도 높아져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숭아문학상의 지명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문화적 관심과 수준 또한 높아졌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수준 높은 작품을 심사하기에 앞서 몇 가지 심사 기준을 정했습니다. 첫째, 시는 기본적으로 운율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참신한 시상(詩想) 전개와 이미지의 결합입니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사항을 전체적으로 얼마나 완성도 있게 연결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이런 기준에 의해 최종 입선작들을 선정하였습니다. 예선에서 탈락된 작품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앞서 지적한 대로 너무 이야기에 치중한 나머지 시적 리듬을 살리지 못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산문에 가까운 작품들은 선외로 하였습니다.
특히 장원으로 뽑힌 <복숭아의 꿈>은 리듬이나 시적 표현, 그리고 ‘어머니의 무픞’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시적 전개가 매우 참신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전체적인 시적 완성도에서도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수작이라 평하고 싶습니다.
또한 차상으로 뽑힌 <넌 나의 복숭아나무>도 참신한 시적 발상이 맘에 들었습니다. 1,2행의 “별똥별이 떨어지듯이/ 네가 퐁-하고 뱉은 씨 하나가”로 시작되는 ‘복숭아씨’를 통한 ‘너’와 ‘나’의 정서적 두근거림을 복숭아의 성장 과정과 연결시킨 시적 전개가 깜찍하고 상큼한 공감을 높여주고 있는 점에 좋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입상자 여러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더욱 분발하여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길 기원하겠습니다.
박영우(시인, 경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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