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어미 복숭아의 태교일기 / 정하연
나는 하늘농원의 황도복숭아
햇살 한 알을 잉태하고 있어
내 몸을 덮은 부드러운 외피에선
달짝지근한 젖내가 나고,
나는 여름의 등허리에 기대 앉아
태교를 하는 중이야
아침 해가 짜내는 누런 즙을 받아먹으며
내가 조금 더 익어가는 걸 느낄 때
속에서 복사꽃 한 송이 피어나 듯
온 몸이 간지러워, 나뭇잎을 베고 누워
나이테를 더듬거려 보면
무릉도원의 계절을 만날 수 있어
내 몸에 새겨진 계절의 무늬를 바라보며
풀빛 들판을 뒹구는 꿈
너도 나와 같은 무늬를 새기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잎맥 따라 번져오는 미몽의 시간
이 나무의 수액은 당도가 얼마나 될까
나무뿌리는 나를 지탱하는 탯줄,
오늘도 힘껏 내 몸을 붙들고 있어
바람이 내 껍질을 핥고 가고
새들이 나를 위해 태교음악을 들려주는 오후
무른 과육 속의 집을 허물고 네가 피어나는 날
나는 누구보다 달콤한 어미가 될 거야
진통보다 성급한 밤이 찾아오고
내 머리 위로 뚝뚝
과즙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최우수상] 복숭아 / 이서연
붉은 노을 빛 한 겹 벗겨 내면
들리는 저녁 깊게 익어가는 소리
골목에 세워진 가로등이
노오란 복숭아 한 알 매단다
단내를 찾아 날아든 날벌레 쫓는
사내의 부채질이 잠잠해진다
반듯한 상자 대신 한 무리로 담긴 복숭아
봉긋한 복숭아 한 알 베어 물면
한 겹 한 겹 바람을 날라주던 흰나비의 날갯짓과
깨어나지 못한 애벌레의 악몽
늦가을을 기억하며 찰박이는 봄 햇빛
씨방에 가득 울리는 황조롱의 노랫소리가
입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고 무른 살점을 혀로 꾹 눌러본다
철지난 과일들을 팔던 사내의 더딘 사계와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던 어린 딸의 목소리
급하게 끊어 삼킨 한 그릇 식사
늑골을 들락거리던 폭염의 오후가
입 안으로 흘러든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환하다
저 커다란 복숭아 한 알
한 여름 밤 사내의 무른 잠이
혼몽하게 익어간다
[우수상] 꿈꾸는 복숭아나무 / 서재천
낭창낭창한 팔 초록머리 나풀거리며
가을 햇살에 붉은빛 감도는 한 광주리
싱싱한 꿈을 꾸고 있는 여자
햇빛 무지개 오색 잠자리날개 펄럭이며
파란하늘 궁전 새털구름마차 끌어당기다가
잉꼬 노래 선율타고 가지 사이사이 실바람
은빛 찬란한 모시나비 펑펑 쏟아 붓다가
자유로운 영혼이 깃든 닻별 눈이 반짝반짝하고
뽀얀 젖으로 씻은 어깨
하얀 솜털드레스 차려입은 아기천사와
손잡고 무궁한 하늘을 훨훨 춤추며 날다가
빨간 조개볼 위로 손을 펴 눈 받침하고
초록별 감치다 해찰하는 낮달을 슬쩍 훔쳐보다가
이따금 부드러운 입술 달콤한 미소 벙글어지는데
아찔한 사랑에 홀랑 빠져버린 심장 하나
콩 콩 콩, 백마 탄 왕자님을 껴안고 초원을 달리는지
분홍빛 얼굴 발그레 아롱다롱
시방
내 속이 다, 환하네
[우수상] 잘 익은 무늬 / 김유자
뿌리를 거슬러 올라
가장 먼 가지 끝에 맺히기 시작할 때
꽃잎 위로 꽃잎이 내려덮여
갇힌 벌이 잉잉거린다
나뭇가지에 걸린 별들이 머뭇거릴 때
닿을 곳 잃은 말(言)들은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떠난 이유도 말하지 않은 입술은
봄 마다 화르르 피고
나무 아래를 서성이던 발자국들이 동그랗게 쌓여
나뭇잎 눕는 방향으로 떠났다
햇빛의 주름 진 손이
주렁주렁 달린 기억을 쓸어주었다
살짝 누르기만 해도 무늬가 번지는, 살 냄새 나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오래 된 입맞춤이
입술 밖으로 흘러내린다
[우수상] 복숭아는 괜찮아요 / 윤소진
좁은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간들바람 눅눅한 방 안을 살피더니
할머니의 살결 위로 솜사탕처럼 녹아든다
읽히지 않는 책처럼 시간을 더듬는 손
나는 푸른 잎 한 장 덮어준다
달빛의 촉수마저 희미해진 밤
복숭아나무가 어제보다 더 자라난다
나는 가장 무거운 어둠 속에서 헤엄을 치며
별들이 갉아 먹은 과일을 찾아 헤매인다
양 손에 과일이 쥐어지면 나는 천천히 걷는다
해가 떠오르기 전 어둠을 닦아내며 걷는다
할머니 입 속의 하얀 성벽은
내 오랜 기억 속에서도 무너져 있었다
새색시의 붉은 뺨을 닮은 복숭아
그 둥근 본연의 모습은 잊으신 건지
궁둥이를 냉큼 치우라며 호통을 친다
나의 시간 속에 어린 할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열린 입 속으로 들어갈 하얀 속살들만
잘라내어도 복숭아는 괜찮아요
보송보송한 껍질은 뽀얀 솜털이 반질거리는
손녀인 여진이가 가장 좋아하니까요
나와 함께 자라나는 나무들은
나선형으로 둥글게 새겨지는 나이테 속에
할머니와 나의 시간이 겹쳐서 새겨진다
다시 찾아오는 밤
별들의 선한 공격을 받으며 잠든 할머니의 얼굴
나는 몇 번이고 그 얼굴을 읽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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