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성장기 / 이숙희
가지마다 풍경들이 하나둘씩 매달려
계절의 나무에선 땡그랑땡그랑 소리가 난다
어린 햇귀를 발라 발갛게 익어가는 과실들
아삭 베어 문 입속으로 스며드는 달큼한 기억
녀석은 아까부터 거울 앞에서 씨름 중이다
몇 년 전부터 하나 둘씩 뽑아내던 턱수염이
제법 많아져 면도를 하고 있는 게다
여드름을 피해 요리조리 깎아 보지만
서툰 면도날이 팽팽한 감정을 건드렸는지
꽃잎 같은 살갗위로 핏방울이 뚝 떨어졌다
선홍빛 복사꽃에선 어린 별들이 쏟아졌다
한숨의 무게가 수풀을 짓누르던 어느 해,
생사경을 헤매다 낙과의 순간을 이겨내고
햇사레를 꿈꾸며 열매를 키우던 복숭아나무
햇살의 젖동냥을 마친 여린 잎들 다부숙한데
면도가 끝나고 화장실을 나오는 아들의 얼굴에
언제 달아놓았는지 복숭아 한 알 턱 밑에 달려있다
흠집 난 복숭아가 멋쩍게 웃고 있다
황도의 달콤한 기운이 방안 가득 차오른다.
[최우수상] 꿈결의 문을 열면 / 서종은
웅크려 잠이 든 엄마의 꿈결엔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네
설 잠 속에 좀 걷다보면 나오는 오래된 나무
엄마는 밤마다
복숭아 향긋한 내음이 난다던
할머니를 만나고 오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과육이 바람을 감싸고
검은 머리카락은 살랑 춤을 추네
며칠째 초승달만 뜨던 여름 밤
엄마의 눈꺼풀에도 달무리가 드리웠네
그간 시계바늘도 지쳐 업을 놓아버린
무더운 날들이 얼마나 지난 걸까
곧게 난 속눈썹 옆으로
엄마의 밤이 여러 갈래로 뿌리를 내렸네
눈 꼭 감았다 뜨면 겨울이 온다던 엄마는
여름 햇살을 치맛자락에 모아
한가득 자신의 주름 사이에 켜켜이 쌓아두고
엄마의 향기가 그대로 밴 꽃봉오리에
호호 햇살을 불어주었네
여름이 무르도록 익어
여기 저기 살갗이 패인 보름달이 드리우고
바짝 마른 가지 그 많던 꽃들은
탐스럽게 발그레 볼을 붉히네
엄마의 긴 열대야 처럼
옹이로 남은 나의 시간은
엄마나무 그림자를 따라
뽀얀 껍데기에 같은 길을 새기네
긴 여름밤을 맞으며
엄마의 밤처럼
내 꿈결의 문을 열 준비를 하네
[우수상] 천년의 꿈 / 임미리
붉은 야산 개간하여 과수원 주인을 꿈꾸었다.
연분홍 꽃잎, 나비처럼 휘날리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어린 복숭아나무 자식인 양 소중하게 다루었다.
부풀어 오르는 꿈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쳐도
과수원이란 이름을 얻으면 주인이 되는 줄 알았다.
나무에 종처럼 매여 더부살이 같이 살아온 긴 세월
나무는 이제 주인을 닮아 옹이진 고목이 되었다.
폐원을 하면 몇 푼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니
베어버리자고 설득하는 자식의 눈빛 속
붉은 욕심 뱀의 혀처럼 꿈틀거렸을까.
비록 고목이 되었지만 하나의 생명체란다.
붉은 꽃잎의 향기 실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가
인연의 고리처럼 연결된 복숭아들
자식들 밥 굶기지 않고 오늘을 살게 해 주었단다.
은인 같은 생명체를 포기할 수 없다고
늙은 나무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면서
‘천년을 빌려준다면’*을 주술처럼 흥얼거린다.
아버지는 그 천년을 다시 벌어도
나무에 매달려 아낌없이 살겠다는 듯 웃는다.
당신의 소중한 마음 나무는 읽었을까.
올봄 복사꽃 수줍은 듯 만발하더니
연분홍 복숭아 나뭇가지에서 주렁주렁하다.
* 박진석 노래 제목
[우수상] 복숭아나무 산부인과 / 곽남경
거미줄과 햇살을 엮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는 오후
드디어 완성된 연둣빛 배냇저고리
태아를 품은 복숭아의 자궁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나무는 임신 중
미지근한 바람이 왔다갔다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어느 날
실눈 뜬 초승달이
자리를 지킨다.
덩달아 잠을 못 잔 풀밭이
하품하는 새벽녘
복숭아나무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울음소리가 연달아 터진다.
매일 밤 모든 나뭇가지를 오므리고 기도하던
복숭아나무 부부가 드디어
털옷을 입은 열 쌍둥이를 낳았다.
청아한 햇빛이 땅을 밝게 물들이는 이른 아침
초여름을 알리는 물소리가 반짝거린다.
[우수상] 달빛 시집 / 김용신
쭉쭉 뻗어나가는 생각의 줄기에는
부드러운 종이로 운율을 뒤집는
바스락 울림이 있습니다.
느릿느릿 시간은 더디게 가지만
한 장 한 장 책장을 빠르게 넘깁니다.
바스락바스락.
둥그럽게 꺽이는 종이
그 속엔
아직 물이 오르지 않는 푸른 문맥이 있습니다.
솜털의 미세한 숨결까지도
생생하게 붙들고 있는 바스락거림은
공기 빠진 타이어처럼 정지되어 있는 흐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깁니다.
딱딱한 문맥이
튀밥처럼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상상의 꼭지점을
갉아먹는 벌레는 저 아래로 추락시키는가 하면
최고의 발화점을 새가 쪼아 부패시키기도 합니다.
무언정진의 잠시 침묵의 방으로 들어가
햇살과 빗물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 단련되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찌익익.
마침내 바이올린의 첫 음을 뚫고
뚝, 푸른 봉인이 개봉되는 환희의 순간입니다.
그 속엔
밝은 빛의 둥우리
어머니의 사랑이
달빛으로 출렁 가득 고여 있습니다.
껍질이 사락사락 벗겨지는
무른 힘이 혀끝에 감기며
달콤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에서
달빛 시집이 좌르르 쏟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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