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외 2편 / 고순용
마당 한가운데 떡시루처럼 앉아 있는 연못
연못은 세상을 읽어내는 거울이다
바닥에 쌓인 세월을 딛고 선 무량수 한 그루
봄밤 같은 수면에 생가 지붕이 내려와 기지개를 켜고
처마끝 바람소리 하늘을 날아 오른다
마당 뒤편 생강나무가
연못으로 풍덩 - 뛰어 들면
바람이 수면 속 풍경화를 흔들어
별이 빛나는 밤*처럼 추상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천년 세월 삼라만상을 해학으로 담아내는 그 익살, 그 천진
천심이 피워내는 실레마을 이야기꽃
반야바라밀을 간직한 연못처럼
소리 없이 번지는 바람이 적막을 조율하듯
연못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없는 종소리에
봄밤이 큰 산을 흔들고 있다
* 晩年의 고흐가 요양원에서 그린 추상화 대표작
솥
연기에 그을린 얼굴 하나
아궁이 앞에 앉아 거친 숨 몰아 쉰다
아궁이 위에서 제 몸 벌겋게 달아오를 때
아버지의 땀방울과 함께 알곡이 익어간다
숱한 낮과 밤
들판을 뜨겁게 달구던 햇볕과 비바람,
땅속에서 길어 올린 흙의 기억들,
아버지의 땀과 눈물이
쇠죽 끓이는 솥에서 한데 끓었다
솥단지 켜켜이 삭아 내리듯 깊게 패인 아버지의 주름살
골짜기 같은 주름이 지도록 아버지 땀방울 먹고 자란 나는
아직 생각이 어리다
지게의 세월에 어깨가 무너져 내리고
새우등으로 굽은 아버지의 등허리
천근 돌덩이가 되어 내 가슴에 박힌다
아버지 떠나신 빈 들판
가마솥 같은 얼굴 하나 붉은 노을로 타 오른다
5월의 산골작이
금병산 동백꽃잎 울컥 지던 날
뿔 잘린 사슴이 된 나는 긴 목울음 삼킨다
죽어서도 다시 만나는 전생의 그 얼굴
산 그림자로 길게 내려와 나를 반긴다
당신은 어둠의 골짜기마다 큰 별로 떠서
열 길 스무 길 산길은 아득한데
골 깊던 실레마을은 당신 이름으로 환하다
꿈결에서 산길에서 당신 얼굴 만나고 온 날
안개 같은 전설이 생강나무 꽃가지 사이로
내 가슴 알싸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야기마을 실레마을이 당신 이름으로 출렁거리는 5월이면
나는 알싸하게 내가 아프다
[수상소감]
연일 찌는 듯한 폭염과 열대야로 가마솥 같은 여름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더위였지만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서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셨던 김유정 소설가의 시련에는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작품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표현들은 시작(詩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늦게 시작한 시 공부, 금병산 자락에 활짝 핀 동백꽃을 등대 삼아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힘찬 항해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졸시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더 정진하라는 가르침으로 새기겠습니다. 이영춘 선생님과 한림대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심사평]
■ 중등부=전래적인 이미지의 시제(詩題)가 적지 않음에도 그에 맞는 시상을 무리 없게 전개하고 가다듬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시적 구성의 통일성,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좀 더 세심하게 기울이기 바란다.
■ 고등부=시를 쓰면서 스스로 되돌아볼 점은 지나친 형상화나 상상의 비약을 조심해야 한다. 대상이 갖고 있는 그림자는 시를 쓰는 사람이 빛을 어떤 방향에서 조명하느냐에 달렸다.
■ 대학·일반부=이번에 응모한 시의 대부분은 시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시가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근본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들은 시로서의 기본적 요건을 갖추는 데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평을 전할 수 있다.
- 심사위원 최현순(중등부), 최계선(고등부), 박민수(대학·일반부)
창간 73주년을 맞은 강원일보와 (사)김유정기념사업회(이사장:김금분)가 공동으로 주최한 `25회 김유정 기억하기 전국문예작품 공모'에서 고순용(춘천·운문), 김지수(서강대 2·산문)씨가 대학·일반부 대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공모전 심사위원회는 지난 25일 김유정문학촌 낭만누리에서 열린 부문별 심사위원회를 통해 운문 중·고등부 대상에 권은하(안산 고잔고 3), 임동현(서울 개운중 3·이상 운문) 학생, 산문 중·고등부 대상에 최진아(유봉여고 3), 방성은(문산중 3·이상 산문) 학생을 선정하는 등 모두 30명의 입상자를 최종 결정했다.
이번 공모전에는 596명이 996편(운문 684편·산문 312편)의 작품을 응모했다. 한편 시상식은 `2018 김유정문학제' 기간인 10월14일 김유정문학촌 야외무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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