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봄이런가 / 이찬영
안, 우리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지구에서 제일 따듯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어
세계지도를 장만했지
지도의 생김새는 각국마다 다르다는 걸 알았다
서로가 가운데 있었으니까
우리는 도시 외곽의 허름한 모텔에서 하루를 보낸 적 있다
그날이 이별여행이 될 줄도 모르고
안녕
안녕
*
아침부터 고속버스에 올랐지 각자 예매한 자리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었는데, 바라보면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에는 누가 묻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덤 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
잡초를 핥고 있는 뜨거운 햇살
우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선 이내 잠에 들었다
어떤 꿈을 꿨던 것 같은데
*
우치동물원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펠리컨 앞에 서 있었어 한과 연이는 내 뒤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 너와 펠리컨이 닮았어 누가 우리에 갇혀 있는지 모를 정도야 우리는 한참 웃었다 웃다 보면 노을이 가라앉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울려 퍼지는 새 울음소리
펠리컨을 곧잘 따라했지 날개를 일제히 펼치는 자세를 펠리컨의 울음소리를 우리에 갇혀 있는 펠리컨의 모습을
폐장할 때까지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
그날 밤, 허름한 모텔 방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해서 할 말이 없었는데, 창밖으로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멀찍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우리 유년시절을 이야기하자. 각자 학대를 당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고백했다. 모두 자기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내 아빠는 죽었어. 우리 엄마는 집에서 도망갔어. 정말? 정말 바람피우는 걸 직접 보기도 했어
벽지를 뜯었지
뜯을수록 벗겨지는 속마음이 있으니깐
우리는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걸까
가정의 가운데에서 멀어져
본 것들은
무덤, 우리에 갇힌 펠리컨, 서로의 얼굴들
유년시절을 무슨 자랑처럼 말하고 있었는데
안, 그래서 너는 유년시절을 봄으로 정의하자고 했잖아
웃으면서 말할 수 있으면 따듯한 거라고
우리의 유년시절은 너무나 비슷해서 서로가 될 수도 있는데
박수쳤어 울고 싶지 않아서 박수만 쳤어
내 유년시절을 따듯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안녕
안녕
먼지 낀 창가 위로 그믐이 가라앉고 있었다
따듯하게 살자는 말만 하염없이 하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각자의 가정으로 흩어져
다시는 서로를 생각하지 않기로 해요
*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무덤이 연속적으로 보인다
눈 감으면
그날 꿨던 꿈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
페인트 통을 엎지르고 부르는 모순적인 봄
*
갈기갈기 찢은 세계지도가 흩어져 있다
방 안으로 반쪽짜리 햇빛이 든다
서늘하게
지구 가운데에 있는 그 5평짜리 허름한 모텔1)
우리가 함께 있던 그곳이 봄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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