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블라디보스톡행 후 / 조수일
아직 단단한 이름을 갖지 못했나요
물 밖 세상은 꿈꾸지도 못하는 수조 안의 삶인가요
바다 건너 창공을 꿈꿔보세요
구름 깃털 속에 지친 부리를 묻고
퇴화한 날개를 펼치고
푸른 창공을 한번 마음껏 날아보세요
용기가 없다구요
늘 닻처럼 발 묶인 하루하루일 뿐이라고요
지금 구름의 속살을 날고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세 아이 고3 엄마와 각기 달리 불리는 호칭들
각진 구석으로 몰려다니다 얼든 사과 한 알
훌쩍 지천명을 넘는 내가 보였어요
기다렸다는 듯 몸이 수신호를 보내 왔어요
과부하 걸린 듯 소리를 내는 관절들,
냉대와 열대의 극지점을 오르내리는 체온은
숨겨지지 않는 생의 복병이었어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하룻밤은?
아무르 강가에서 커피 한 잔은?
거절할 수 없는 생의 첫 유혹은 감미로웠어요
손발 움직임과 토막 영어로 통용되는 세상이
거기 있더라니까요
서두를 줄 모르는 느긋한 걸음에 실린 생의 의미가
돋음체로 읽혔다니까요
발밑에 몸담고 살던 세상이 가까와져요
집, 건물, 산과 강이 장난감 같아요
구물구물 기어가는 까만 개미 떼 같아요
수국 같은 웃음의 스튜어디스가 커피 한 잔을 건네와요
스키니 청바지를 입고 배낭을 메고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이제는, 나들이하듯
날아 볼래요
땅만 보고 먹이를 나르느라 하루가 저문 줄도 모르는 개미떼가
문득, 아파와요
단단한 이름을 가질 준비 되셨나요? 당신,
[우수상] 항공여행 / 박덕은
여행 책자에서 가르랑거리던 음절이
한순간 등받이로 몰리는 추억에 휘말려든다
비스듬히 쏠리는 오후 여섯 시의 기울기에서
남루한 어휘들이 빠져나가
하늘 강가에 뭉텅이째 떨어진다
별빛은
가느다란 수초 사이로 파문 일으키지만
저녁은 말이 없다
시트에 목베개를 고정시켜 준 당신처럼
책날개 같은 하늘이 마냥 좋다
가만히 귀 대어 보면
쿵쿵 가슴 뛰는 둥근 창,
아직도 그 파닥거림을 기억하나
기내식의 두근거림을 먹다가
눈동자 속에서 바라보았던 노을이
반짝이는 낱말들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휘파람 분다
무수한 책갈피의 입술들이
허밍으로 따라하며 깔깔거린다
흐릿한 바람이
손등에 얹혀져 있던 노래 물고 날아간다
불안한 발이 머무는 좌석의 무릎공간은
점점 좁아져 자간마저 사라진다
향기 잃은 박자는 행간을 넘다가
차가운 여울물에 닿아 파르스름히 몸 떨고
어긋난 음표는 기슭으로 자꾸 떠밀려 간다
창문 가림막을 올리니
쓰디쓴 고음 한 문장의 폭우가 그치고 맑다
이젠 더이상 궁금하지 않은 마지막 페이지
어순에 맞게 엔진은 힘차게 돌며
흰구름 건너 공항으로 향한다
여명 자락에 슬쩍 끼워 두웠던
풍경이 흘러나와 지평선이 새붉다
저항은 늘 있지만
짙푸른 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
비행기의 발목이 눈부시게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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