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윤리에 관한 고찰
1. 환경문제의 발생원인
환경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유형 ‧ 무형의 모든 자연을 뜻한다. 그 구성요소인 공기, 물, 당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평형상태를 유지하면서 완만하게 변화해 왔다. 모든 생물은 환경에 잘 적응할 때 진화하고 번영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할 때 퇴화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불리하고 험난한 자연도 보다 적합하고 안전한 환경으로 적극 개조해간다. 따라서 인간에게 환경은 단순한 생활기반에 그치지 않고 사회 ‧ 경제 ‧ 문화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히포크라테스는 의학, 에라토스테네스는 지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외모, 성격, 기질, 문화와 생활상이 각 지역의 기후 특성에 따라 크게 다른 점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신대륙을 발견한 후 기후에 편중되었던 관심은 점차 자연조건, 특히 지형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자연 환경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650년에 5억 5,000만 명이었던 인구는 1850년에 11억 7,000만 명이 되었다. 생활이 향상되고 의술이 발달하여 사망률은 낮아지고 출생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1999년에는 60억 명을 넘어섰고, 2050년 이전에 100억 명을 초과할 전망이다. 그리고 증가된 인구는 취업할 기회가 넓고 소득을 늘리기 쉬운 도시로 집중되었다. 또한 석탄과 철강, 시멘트처럼 생산지에 적합한 산업 이외에 자본과 기술, 노동력과 시장 등 생산과 유통에 편리한 도시에 공장이 집중되었다. 1893년에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석탄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석유가 사용되면서 산업혁명은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생활은 편리하고 풍요해졌지만 물신숭배(物神崇拜)의 풍조도 만연되었다. 기술이 향상됨으로써 끊임없이 확장된 이기적 욕구는 자연을 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서만 간주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소비 추세로는 납과 주석은 20여 년, 구리와 석유는 50여년, 석탄과 철광석은 200여 년까지만 사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환경은 어느 곳을 조금만 건드려도 곧 터질 듯한 고무풍선과 같은 심각한 생태학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환경 위기는 토양유실, 삼림지역 감소, 사막화 현상, 산성비, 오존층 파괴, 온실효과와 기상 이변, 대기오염, 생물 감소와 멸종, 인구급증 등의 실상을 밝힌 1990년 <지구환경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도 산업폐기물, 매연, 소음, 교통난, 생활 쓰레기 등으로 지구촌은 더 이상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무한히 확대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 진보주의는 결국 환상적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는 햄릿의 고뇌는 이제 인류전체의 생존문제와 직결되게 된 것이다.
2. 환경 윤리학의 세 가지 입장
환경 윤리학(environmental ethics) 혹은 생태윤리학(ecological ethics)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입장은 생태학이나 유기적 자연관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윤리, 즉 자연중심적인 윤리(ecocentrism)의 전개를 불가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보다 덜 극단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윤리, 즉 생태학적 방향 정의와 생태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종래의 도덕 공동체의 범위를 보다 확대한 규범 윤리 이를테면 동물 중심적이거나 생명 중심적인 윤리의 전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생태학적 연구가 중요하긴 하나 그로 인해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단지 우리의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권리에 대한 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인간중심적인 윤리(anthropocentrism)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1) 자연 중심적인 윤리(ecocentrism)
생태학이나 유기적 자연관은 인간 중심적인 윤리가 아닌 자연중심적인 근본적으로 새로운 윤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적으로 새로우면서도 비인간중심적인 윤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자연 속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적하며 따라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현상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며 인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에 대해서도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내세우는 자들은 대체로 그 입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거나 정당한 근거에 의해 옹호하기보다는 기존 윤리설의 한계를 지적하거나 새로운 윤리를 암시하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어떤 철학자도 아직 새로운 윤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거나 옹호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레오폴드(Aldo Leopold)는 우리가 자연의 모든 구성 요소를 도덕공동체에 포함시킴으로써 도덕공동체의 성원 자격을 확장하는 보존의 윤리, 대지의 윤리(Land Ethics)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 같은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①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
19세기 후반에 발전된 생태학은 개체론적 원자론에 입각한 생물학과는 다른 자연관을 제시하였다. 즉 지구에는 단세포 유기체에서 다세포 유기체, 생태계(ecosystem), 생물군계, 생물권으로 계속 창조적으로 발생한 고등 단계의 유기체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자연은 그 부분들의 단순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앨튼(C. Elton)은 녹색 식물인 생산자, 초식 및 육식 동물인 소비자, 박테리아와 곰팡이인 분해자가 서로 먹이사슬의 체계에 따른 고유한 생태학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유기적으로 엮어져 있다고 본다.
롤스톤(H. Polston)은 생태학을 토대로 전체론적(holistic) 환경 윤리를 개척하였다. 모든 유기체는 그 종의 좋음(good of its kind)을 갖고, 자신의 종을 좋은 것으로 유지한다. 그에 의하면 종의 좋음을 지닌 모든 유기체는 좋은 것이며, 그에 따라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그 종의 좋음을 유지하는 터전인 생태계도 마치 그림조각 맞추기처럼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이 모든 것이 가치를 갖는 것은 자연이 발생의 원천으로서 가치를 투영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가치는 인간이 사물을 평가하며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 평가하면 자연은 도구적 가치를 갖는다. 롤스톤은 이러한 견해를 뒤집어서 인간과 무관하게 애초부터 자연이 내재적 가치를 가지며, 인간은 단지 그와 같은 가치를 인식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롤스톤의 전체론적인 내재적 가치론을 이해하려면 성경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6일째 되는 날 창조된다. 이전까지 창조주는 그 종류별로 만드시고, 하늘과 땅, 바다를 나누셨으며, 식물과 동물을 그 종류별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좋음은 가치의 대표자다. 따라서 자연과 자연적 존재는 인간의 평가와는 무관한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단지 차이는 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창조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롤스톤의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는 종과 생태계가 그림 조각 맞추기의 조각처럼 이어져 있으며 자연이 개별 유기체에 앞서 내재적 가치를 갖기 때문에 전체론적이다. 동시에 개체론적 특성도 포함한다. 자연의 내재적 가치는 자연적 존재에 투영되어 개별 유기체도 내재적 가치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종과 생태계도 내재적 가치를 갖게 됨으로써 멸종에 처한 종이나 생태계도 도덕적으로 또한 법률적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가능하다.
그러나 롤스톤의 이론에는 진화론의 입장에서 내재적 가치를 논하는 것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자연과 자연적 과정이 원인이며 이 자연이 의식 주체인 인간을 낳았다고 하면서 인간이 내재적 가치를 갖기 때문에 당연히 자연도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은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를 범한 것이다. 이는 물이 젖었다고 해서 물을 이루는 산소와 수소가 젖었다고 잘못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째, 그는 명시적으로 주객 이분법을 거부하지만 그 구분에 따른 가치와 사실의 틀 속에서 주체를 넘어 그 대응자로서 사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대상 쪽에 여전히 가치를 설정하여 주객 이분법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많은 환경 윤리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객 이분법이 자연을 대상화한 나머지 그것을 도구화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 가치가 의식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객관적 가치론도 엄격히 말해서 데카르트적인 유산일 뿐이다. 즉 서양의 환경윤리가 전체론적 접근법을 취해도 내재적 가치론에 근거하는 한 환경 문제를 야기 시킨 주객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② 기 중심적 환경윤리
기 중심적 환경 윤리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어 지배하는 착취 관계가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생(相生)관계로 파악한 전체론적 자연관이 환경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환경 철학이라고 본다. 특히《주역(周易)》의 음양(陰陽)체계를 존중한 유학과 노장사상에 공통적인 기학(氣學)에 근거한 동양의 전통 의학에 주목한다. 즉 동양의학은 인체를 오장육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개체적 부위에 집중하는 서양 의학과 구분되며, 이러한 전체론적 인식은 오늘날 생태학의 통찰과 일치함으로써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학이란 우주만물의 원인인 도(道)가 자신을 드러내는 형태로 자연에 흐르는 것이다. 따라서 인체에 흐르는 기도 자연에 흐르는 기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동양 의학은 인체를 치료하거나 기를 보강하는 약재로 자연 약재나 자연 음식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자연의 기가 신체의 기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전재로 한 것이다.
기가 흐르는 통로에 이상이 있으면 중풍이 들고, 기의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특정 장기가 허해서 신체가 허약해지며 풍습한 등 사기(邪氣)가 습격해오면 관절염이 걸린다. 오늘날 환경문제도 이와 흡사하게 진행된다. 생태계에 생기가 제대로 흐르지 않으면 종의 다양성이 약화되고, 그 과정에서 일부 동식물은 죽어 한 종의 개체수가 감소하며, 사기가 들끓게 되면 그것 생태계에 거주하는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이 병들고 죽어가게 된다. 자연과 생태계가 병들고 죽어가는 현실에서 동양 의학의 진단과 처방은 환경 문제에도 동형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래서 기 중심적 환경 윤리는 자연 혹은 생태계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를 생태학적 기로 규정하고 그 흐름을 존중한다.
자연과 인체에 흐르는 기는 근원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는 생명 에너지이다. 온갖 자연적 존재가 자신의 터전에서 고유한 생물학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생태학적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유지하는 한 자연뿐만 아니라 자연적 존재도 자체로 평형과 건강을 유지하는 온 가치를 갖는다. 이 온 가치는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자연적 존재 간의 관계와 그물 속에 있는 자연적 존재가 갖는 생명 가치이므로 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전체로서의 지구의 내재적 가치 또는 관계와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연적 존재가 갖는 단순한 생명의 내재적 가치와 다르다. 또한 온 가치는 상호 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분법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생태 중심주의의 내재적 가치와도 다르다.
온갖 생명체는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번성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마땅히 자연에 흐르는 기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자연의 기를 원활히 흐르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기 중심적 환경론에서 환경 보전은 자연에 생기가 흐르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생명을 건강하게 보전하며 새로운 생명이 자연스럽게 탄생하는 터전을 조성하는 것이다.
기 중심적 환경론은 동양 의학이 신체를 경락체계에 따라 전체론적으로 진단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과 생태계를 진단하므로 일차적으로 기의 원활한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기의 흐름이 약화되거나 단절될 위험이 있다면 생태학적으로 세심하고도 분별 있는 노력으로 기의 흐름이 원활하도록 복원시킨다는 점에서 막연한 생태계 보전주의와 구분된다.
그리고 기 중심적 환경론은 기의 흐름을 중시하는 한편 개체론적 특성을 띤 과학기술에 의한 인조 환경의 확장을 수용한다. 즉 과학기술이 자연의 자체 정화력을 넘어서는 오염 물질의 배출을 추가로 정화함으로써 기의 흐름을 잇도록 할 수 있는 한 도시와 공단의 건설과 개발을 허용한다. 물론 환경 영향 평가를 통해 과학 기술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어떠한 개발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환경 친화적이다. 요컨대 전체론적 기의 흐름과 개체론적 과학기술의 상보 관계를 적극 반영하는 점에서 다른 환경론과 명확히 차이가 있다.
(2) 동물 중심적 ‧ 생명 중심적인 윤리(biocentrism)
자연 중심적인 윤리보다는 덜 극단적인 두 번째 입장은 비록 생태학적 연구가 새로운 윤리, 즉 생태학적인 정위와 인식을 가지고 종래의 도덕공동체의 범위를 보다 확대한 규범윤리, 이를테면 동물 중심적이거나 생명 중심적인 윤리(biocentrism)의 전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윤리이론들을 개조하고 수정함으로써 특히 생태학적인 가치들과 의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규범윤리를 발전시키자는 견해를 제시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감정을 가진 특정한 동물들도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거나 유기체나 일부 자연 현상에도 법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 때때로 전혀 별다른 생태윤리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통윤리학이 일부 동물들에게는 도덕적 권리를, 다른 일부 유기체에게는 법적인 권리를 부여해야 하며 생태학적인 가치관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보다 덜 극단적인 입장이 전개되기도 한다.
① 동물 해방론
싱어(P. Singer)는 흑인 해방과 여성 해방의 연장선상에서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종차별주의(racism)나 성차별주의(sexism)가 인종이나 성에 근거하여 평등한 도덕적 지위를 부인하는 것이 잘못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차별주의(speciesism)도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의란 같은 것을 같게 대우하는 것이므로 능력이 다른 인간과 자연적 존재를 차별하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평등은 지능 지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즉 도덕적 평등은 사실적 평등과 다르기 때문에 지능이 높은 사람이 지능이 낟은 사람이나 자연적 존재를 차별하거나 착취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싱어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었던 편협한 공리주의를 물리침으로써 동물에 대한 도구적 가치를 일축하고 도덕적 고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공리주의는 선과 악을 쾌락(pleasure)과 고통(pain)으로 정의한다. 다수의 고통을 줄이고 즐거움을 늘리는 시도는 도덕적 의무이다. 그렇다면 공리주의가 설정한 도덕 공동체에 들어올 자격조건은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자격 조건은인간만이 지녔다고 간주한 합리성이었다. 그는 그릇된 자격 조건을 바로 잡음으로써 평등의 영역에 동물을 포함시켰다.
고통과 즐거움을 겪을 수 있음, 즉 감응(sentience)할 수 있음은 이해 관심에 앞서 만족되어야 할 조건이다. 길가의 돌은 고통이나 즐거움을 당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이해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나 즐거움을 겪을 수 있음은 어떤 존재자가 가능한 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이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충분조건이다. 결국 이해 관심을 갖는 감응할 수 있는 존재만 도덕적 지위(moral standing)를 갖는다. 이때 싱어는 감응할 수 있는 동물이 도덕적 지위를 갖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간이 도덕적 의무를 지는 것이지, 동물이 도덕적 권리를 갖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동물에게 도덕적 의무를 이행한다면 즉 단지 인간의 편리함이나 유용성을 위해 묵인되었던 동물 학대를 제약한다면 실험하고, 스포츠로 사냥하고, 모피를 입기 위해 남획하는 등 동물을 대우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많은 양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그는 감상적 동물 보호론자가 아니라 실천적 동물 해방론자로서 자신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육식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② 동물권리론
싱어의 동물 해방론은 동물에 대한 차별 대우가 선(善)을 가능한 한 최대화하여 산출하는 공리주의의 목표에 위배됨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동물에 대한 대우가 정당화될 수 있는 소지를 남길 뿐이다. 왜냐하면 비록 인간에게 편중되는 형태이지만 동물과 인간의 평등한 이해 관심을 동등하게 고려하면서, 동물을 집단적으로 사육하고 실험실에서 고통을 주는 것이 이와 다른 방식으로 대우하는 것에 비해 더 많은 만족을 주는 결과로 만족의 총량은 더 큰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간(T. Regan)은 의무론의 입장에서 동물의 복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인간 각자는 다른 삶의 생명과 자유를 존중할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이러한 의무의 근거는 인간 각자가 다른 사람에 의해 침해당할 수 없는 생명과 자유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데 있다. 그것은 인간 각자가 타인에 의해 도구로 간주되지 않고 목적으로 대우받을 내재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재적 가치(inherent value)의 최종적 근거는 인간 각자가 침해당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을 갖는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레간은 동물도 삶의 주체(subject of life)라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도출한다. 정상적인 포유류도 삶의 주체로서 요구되는 특성들 가령 지각과 기억, 믿음, 의도, 예감 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동물도 칸트의 말과 같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을 내재적 가치를 가지며 인간에 의해 존중받을 생명과 자유에 대한 평등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레간은 개체의 권리도 경우에 따라 제약받을 수 있음을 승인한다. 그러나 그 경우는 정당한 근거가 제시될 때다. 그렇지 않는 한 그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다만 동물은 침해당한 자신의 권리를 시위하거나 탄원하여 되찾을 힘이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동물에 대한 의무가 약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성인이 아동을 적극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이 동물을 보호할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일 뿐이다.
③ 생물 중심주의
싱어의 동물 해방론이나 레간의 동물 권리론은 동물에게 그릇되게 대해 온 인간의 잘못을 시정하고 생명을 존중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수 있거나 생활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척추동물과 포유류로 국한하여 도덕적 배려를 하는 것만으로는 자연보전을 효과적으로 기약할 수 없다. 식물과 인간에 관련된 또 다른 윤리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테일러(P. Taylor)는 동물과 식물을 포괄하는 생물에 대한 도덕적 존중을 주장한다. 즉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확장할 목적론적 생명 중심체(teleological center of life)로서 인간이나 다른 존재의 수단이 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 보전하고 촉진시키는 것을 좋은 것으로 수용하지만 생명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도덕의 근본 원리로서 역설한 슈바이처의 주장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생명 일반에 대해 무한한 외경심(畏敬心)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테일러는 살아 있는 모든 개체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구현하려고 애쓰는 자체적 좋음(good of its own)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생명 중심체라고 본다. 그의 생물 중심주의(biocentrism)는 식물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활동하며 자신의 욕망이나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이 인간이나 동물과 같지 않고 따라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더라도 환경의 변화에 다양하고 민감하게 감응한다는 사실을 첨단 과학이 밝혀냄으로써 상당한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결국 생물은 내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도덕적 관심과 도덕적 고려를 받을만한 자격을 지니며 동시에 인간은 생물의 좋음을 그 자체 목적으로서 보존하고 증진시킬 자명한 의무를 갖는다.
테일러는 이러한 생물 중심주의에서 자연 보전의 논거를 제시한다. 즉 인간은 하늘과 바다, 산과 강을 말고 깨끗하게 유지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호하고, 바다와 강에 사는 수중 생물을 존중하며 산이나 들에 뛰어노는 온갖 생명체의 살아 있음을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 바람, 물, 갯벌, 습지, 호수, 상 등과 같은 자연적 대상들은 직접적으로 도덕적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 감응도 못하고, 생활을 갖지도 않으며, 더구나 자체적 좋음을 갖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올바르게 또는 그르게 대우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3) 인간중심적인 윤리(anthropocentrism)
세 번째 입장은 생태학적 연구가 중요하기는 하나 그로 인해 윤리학의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단지 우리의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권리에 대한 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규범윤리학인 인간중심적인 윤리(anthropocentrism)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별다른 생태윤리학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자연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인 권리와 의무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적 윤리설에 의해서도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생태학이 윤리나 도덕에 깊은 의미를 갖는 까닭은 인간의 행위가 갖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지극히 중대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 종의 사멸, 자원의 고갈, 각종 오염, 급속한 인구증가 등 기술과 과학의 이용에서 오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해로우며 위험하고 재앙을 몰고 오는 현상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인간에 의해서 그리고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통제될 수 있고 예방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만이 그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현상들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중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증에 의거하여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직접적인 도덕적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① 인간이 인간 이외의 자연과 자연적 존재에 도덕적 의무를 지려면 자연과 자연적 존재는 인간에 대 해 도덕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
② 그런데 자연과 자연적 존재가 인간에 대해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③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 이외의 자연과 자연적 존재에 직접적인 의무를 갖지 않는다.
여기서 ②는 문제가 없지만 ①은 명확히 거짓이다. 따라서 ③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가령 조깅을 하던 청년 A는 한적한 길에서 노상강도 B가 중년신사 C의 지갑을 강탈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A는 직접 B에 대항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C를 도울 의무가 있다. 그러나 C는 A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A가 C를 돕는 것은 옳지만 C는 그러한 도움을 A에게 받을 권리는 없다. A가 C를 돕지 않는다면 A는 도덕적 갈등을 겪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C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은 A가 아니며 B다. 즉 권리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의무를 지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자연이 도구적이지 않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면 인간은 자연에 대해 적절한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화이트(L. White)는 서양에서 이러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형성된 배경에는 유대교-기독교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지구를 오직 자원의 보고(寶庫), 즉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제한된 자원은 과학기술이 대체 물질을 창조할 수 있으며, 환경 재난도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환경 윤리는 인구증가에 맞추어 경제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자연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이유는 단지 인간이 건강하게 마시고 즐길 수 있기 위함이다. 환경 위기도 과학 기술을 통해 해결하려는 점에서 기술 중심주의(techno-centrism)로 부른다.
① 약한 인간 중심주의
약한 인간 중심주의는 기술 중심주의보다 덜 강한 형태로 미국 환경보호 운동을 선도한 핀코(G. Pinchot)가 대표적이다.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원리를 기초로 기술 개발의 속도를 조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최대 다수는 인간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인간 중심주의로 분류된다. 또한 약한 인간중심주의는 미래세대는 현세대가 누리는 만큼 안전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살 평등한 생존권을 가지므로 현세대는 자연의 자원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보존할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래세대에 대한 문제는 처음에는 자연 자원과 관련하여 논의가 전개되었다. 환경 폐해가 무분별한 개발의 결과라면 분별 있는 개발은 어떤 의미에서든 제한과 억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인 환경 윤리는 이와 같은 개발 억제를 정당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개발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합리적 동기를 제공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여전히 자원으로서 파악하면서도 자연 자원의 합리적 동기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전략은 세대 간 분배정의에 관한 논증으로 나타났다. 이 논증은 지구상에 거주할 미래 세대가 실존의 위험에 봉착할 정도로 우리가 자연 환경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 역시 도덕적으로 고랴할 수 있는 일차적 대상은 미래의 세대이지 결코 자연 자체가 아니다. 자연은 현재 세대와 미래세대의 복지의 관점에서 단지 이차적으로만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자연자원의 범위를 넘어서서 미래 세대를 논의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요나스(Jonas)이다. 그는 현대 과학기술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례 없는 도덕적 문제를 부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과학적 기술로 인하여 많은 열려진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가져오고, 종말론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래 인류에 대한 책임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다 나은 실천을 위한 그의 논의 기반이 여전히 인간 이익 관심과 인간성에 대한 의무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의 환경 윤리 또한 인간 중심주의적이다.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이론은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 위원회(WCED :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Development)의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개발’과 사회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세계 체제를 주창하고 있다. 즉 미래의 세계 체제는 바로 지속 가능한 것이어야만 하며, 이것은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속 가능한 개발은 고정된 안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의 개발, 투자의 성향, 기술 발전의 지향, 제도적 변화가 현대의 필요뿐만 아니라 미래의 필요와 일관되게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1. 이종훈․한면희 공저,『현대사회와 윤리』, 철학과현실사, 1999.
2. 황경식 지음『개방사회의 사회윤리』, 철학과현실사 2003.
3. 황경식 ,『과학시대의 윤리적 반성』, 과학과사상 제12호, 1995.
4. 추병완,『과학기술시대의 삶의 양식과 윤리문제』,울력, 2002.
5. 바루흐브로디 지음, 황격식 옮김,『응용윤리학』,철학과현실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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