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에 대한 연구
1. 중국불교의 수용과정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후한(後漢) 명제(明帝, A.D. 58~75)시대에 중앙아시아의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부터 가섭마등과 축법란에 의해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금인강정설(金人降庭說)에 따르면 후한 명제가 영평 10년(A.D. 67)어느 날 밤 금인(金人)이 서방으로부터 큰 빛을 내며 궁궐 뜨락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고서 신하에게 물으니 서방에 불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에 서역으로 사신들을 보내어 불교를 구해오게 하자 사신들은 중도에서 백마에 불상을 싣고 동행하던 가섭마등과 축란법을 만나 함께 돌아왔다.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낙양 성문 밖에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머무르도록 하였다. 이때 들어온 경전이 《사십이장경》이다. 그런데 당시 명제의 물음에 신하들이 이미 불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이전부터 불교가 중국에 알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임계유(任繼愈)는 《중국불교사》에서 기원전 2세기 경 전한(前漢) 애제(哀帝) 원년에 불교가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오랫동안 중국인들이 이를 수용하고 신앙한 흔적은 없다. 중국불교의 실질적인 시작은 가섭마등보다 약 80년 후(A.D. 147) 서역에서 온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에 의한 경전 번역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영가의 난(永嘉─亂)1) 후에 즉위한 동진의 원제(元帝, 재위:317~322) 이후였다. 불교가 전래되고 3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이다.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중국인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에 관심이 많았다. 윤회설에 의하면 인생은 현재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무한한 전세(前世)가 있었고, 사후에도 무한하게 펼쳐지는 후세(後世)가 있으며 더욱이 이 삼세(三世)가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인과응보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세밖에 몰랐던 육조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그들의 인생관을 바꾸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육조 후반기인 남북조시대에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교리의 연구도 한층 진보하였다. 반야경(般若經)을 중심으로 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사상, 열반경(涅槃經)을 중심으로 하는 열반 사상 등은 중국불교의 발전에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중요하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4~5세기가 지난 수당시대(隋唐時代)에 와서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국가경제 역시 발달하였기 때문에 불교 역시 여러 학설들 중에서 서로 통하는 점을 찾아 종합해 나가는 추세에 있었으니 몇 가지 새로운 종파를 형성하였다. 이들 종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이다.
2. 중국불교의 특징
(1) 경전의 한역과 격의불교
중국에서 불교 경전의 번역은 후한(後漢) 환제(桓帝) 건화 2년(148)에 안세고(安世高)에서 비롯하여 송(宋) 신종(神宗) 원풍 원년(1078)에 이르기까지 900여 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것은 중국불교 역사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긴 시간으로 범어 불전의 철저한 한역을 기초로 불경을 이해하고 해석한 주체적 불교수용의 자취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번역가인 안세고는 안식국(安息國)의 태자였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2)의 소승불교가 왕성했던 안식 출신의 그는 선관(禪觀)과 아함(阿含)에 전통해 있었다. 그가 낙양에 들어와 역경과 교화를 폈던 당시에는 환제가 궁중에서 노자와 부처를 함께 모시기도 하고 노자가 서방으로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 주창되던 때였다. 따라서 선관(禪觀)을 행하고 관련 경전을 번역하던 그를 당시 사람들은 도교의 불로장생술(不老長生術)이나 태식법(胎息法)3)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다. 대표적인 번역으로는 《안반수의경》이 있다.
후한 환제 말(166)에는 대월지국 출신의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낙영에 와서 《도행반야경》,《수능엄경》,《반주삼매경》등을 번역하였다. 그는 아함과 소승불교에 주력했던 안세고와는 달리 주로 대승반야계통에 관심이 많았다. 한 제국이 멸망 후 삼국시대에 낙양과 장안의 한족이 남하하여 이룬 오(吳)나라의 역경가로 지겸(支謙)이 있었다. 대월지국 출신의 그는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유마힐경》,《대아미타경》등을 번역하여 낙양의 지루가참과 함께 반야 계통의 현학적 불교를 유행시켰다.
서진(西晋, 265~316)시대에는 위(魏)대에 일어난 노장학과 청담사상 등 유교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 조류가 계속되었다. 이때 유명한 역경가로 축법호(竺法護)가 있다. 그는 월국지사 사람으로 선조 때부터 돈황에 거주하였다. 그는 돈황뿐만 아니라 주천, 장안, 낙양 등 여러 곳에서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가 번역한 경전 가운데 《정법화경》10권은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 경전인 《법화경》을 처음 중국에 전한 것으로 그에 의하여 수많은 《법화경》연구가를 배출하게 되었고, 아울러《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한 관음신앙이 보급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북방 흉노족에 의하여 서진이 멸망하자 지식인이나 관료, 학식 있는 승려들이 남하하여 건강(健康)에 정착하면서 동진(東晋, 317~420)을 세웠다. 이때 유행한 것은 상류층 중심의 사대부 불교이며 그 성격은 노장사상과 융합되어 격의적(格義的) 경향이 강했다. 격의란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문헌의 표현을 빌려오는 것이다. 그들은 노장사상은 불교와 근본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도가에서는 무(無)를, 불교에서는 공(空)을 그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역법가로는 축법아(竺法雅), 강법랑(康法朗), 도안(道安) 등이 있다. 그들은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 강설하면서 여러 의심거리들을 해석하여 경의 뜻을 드러내었고, 《노자》등 중국고전의 말을 매개로 불전(佛典)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격의는 비합리적이고 현학적이며 원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후진(後秦, 384~417)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을 들 수 있다. 그는 당(唐)의 현장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2대 역성(譯聖)으로 꼽힌다. 그는 구자국(龜玆國)사람으로 일곱 살 때 출가하여 모친과 함께 서역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승과 대승불교를 모두 배워 그 명성이 일찍부터 서역과 중국에 널리 퍼졌다. 전진(前秦)의 부견왕은 그를 초빙하고자 여광(呂光)에게 구자국을 거쳐서 그를 모셔올 것을 명하였으나 여광이 돌아올 무렵에는 전진이 망하고 후진이 일어났다. 이에 여광은 도중에서 후량국(後凉國)을 세워 구마라집도 그곳에서 약 16년간 머무르다 후진의 요흥왕이 홍시 3년(410)에 후량을 토벌하여 그를 장안으로 모셔오게 된다. 그 후로 12년 동안 오로지 역경과 강설에 주력하여 문하에 3,0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를 두었다. 가가 번역한 경론은 74부 384권에 이르는데, 특히 반야계 대승경전과 용수와 제바 계통의 중관 논서의 번역에 힘을 기울였다. 《중론》,《십이문론》,《백론》,《대지도론》,《성실론》등의 대승 논서는 그에 의하여 이때 처음으로 중국에 전래된 것이다.
당(唐)의 현장(玄奘, 600~664)은 출가 후 《열반경》,《섭대승론》과 아비담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배웠으나 인도의 원전에 바탕하여 불교를 연구하려는 뜻을 세워 인도로 멀고 험한 구법의 길에 올랐다. 마침내 인도의 나란타사에 도착한 현장은 계현(戒賢) 논사에게 유가유식의 깊은 뜻과 이치를 배우고 인도의 여러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나서 육로를 통하여 17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자은사(慈恩寺)의 번역원(飜譯院)에서 역경에 종사하여 서역과 인도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약 20년간 75부, 1,335권에 이르는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는데 《대반야경》,《해밀심경》,《유가사지론》,《섭대승론》,《대비바사론》,《성유식론》,《구사론》,《순정리론》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의 번역은 일구의 빠뜨림이 없이 엄밀하게 번역하여 경전 번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리하여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의 역을 신역(新譯)이라 부르게 되었다.
(2) 교판상석과 종파불교
동진시대 이후에는 번역된 경전이 어느 정도 쌓이자 계속되는 역경작업과 더불어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풍토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각 경론에 담긴 내용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남북조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계속되어 마침내 13개에 이르는 종파(宗派)4)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종파 중심의 불교는 인도불교와는 다른 가장 중국적인 불교의 형태이다.
이들 종파 형성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요구되었던 것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교상판석이란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가름하여 부처님의 본뜻을 바르게 해석하고 밝히려는 시도로서 한마디로 불교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에서의 경전 성립 순서와는 무관하게 전래된 각종 경전을 마주하게 된 중국인들에게는 불가피한 방법론이었다. 실제로 종파가 형성되기 이전인 남북조시대부터 다양한 설법내용을 담은 경전들에 대하여 그 설법시기, 대상, 목적, 방법 그리고 사상의 깊고 얕음을 가름하여 경전을 분류하고 그 서열을 정하는 이러한 해석법이 행해져 왔다. 천태 지의(天台 智顗, 538~597)가 그의 교판을 말하기에 앞서 당시 행해지던 남북조의 교판을 남삼북칠(南三北七)의 열 가지로 요약한 것에서도 당시의 교판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의 모든 교상판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천태의 오시팔교판(五時八敎判)과 화엄의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이다.
오시팔교판에서 오시(五時)란 대소승의 모든 경전을 부처님의 설법시기에 따라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의 다섯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팔교(八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화 형식과 교화 내용에 따라 각각 넷으로 분류한 것이다. 앞의 것은 화의사교(化儀四敎)로서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를 말하며, 뒤의 것은 화법(化法)사교(四敎)로서 장교(藏敎), 통교(通敎), 벌교(別敎), 원교(圓敎)이다.
또한 화엄사상을 집대성한 법장(法藏, 643~712)이 체계화한 오교십종판에서 오교(五敎)는 소승교(小乘敎), 대승시교(大乘始敎), 대승종교(大乘終敎), 돈교(頓敎), 원교(圓敎)이다. 그리고 십종판(十宗判)은 경전에 담긴 종취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으로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형통가실종(現通假實宗),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이 있다.
이와 같이 각 종파에서는 자신이 소의로 하는 경론이 부처님의 참뜻을 가장 잘 표명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경전의 우열과 깊이를 논하여 교판을 세워 왔다.
1) 영가의 난(永嘉─亂) 중국 서진(西晉) 말기인 회제(懷帝)의 영가 연간(307∼312)에 흉노(匈奴)가 일으킨 큰 반란. 산시성[山西省] 일대에 이주하고 있던 흉노부족이 중심세력으로, 그 족장(族長) 유연(劉淵)은 팔왕(八王)의 난(300) 뒤의 중원(中原)이 혼란함을 틈타 독립할 결심을 굳히고 304년 국호를 한(漢:후에 趙)이라 칭하였다. 유연이 죽은 뒤 아들 유총(劉聰)은 거병하여 뤄양[洛陽]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자신들의 근거지인 평양(平陽:山西省)으로 잡아다가 죽이고, 서진의 군사 10여만 명도 학살함으로써 뤄양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진은 망하고 왕족인 사마씨(司馬氏)는 강남(江南)으로 피하여 난징[南京]에 도읍하고 동진(東晉)을 세우자, 그때부터 5호 16국(五胡十六國)시대가 시작되어 화북(華北)은 오랫동안 5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소승불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발휘하던 종파 중의 하나이다.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 의해 일체의 법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며(法體恒有), 그 법은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고 하였다. 또한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일신의 정진, 덕목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 수행의 단계를 세분하였을 뿐 아니라 열반(涅槃)을 유여(有餘) ·무여(無餘) 열반으로 이분하여 수행의 궁극적 목적에 도달한 아라한(阿羅漢)도 유여열반에 이를 뿐이라 하였다.
3) 태식법이란 예전에, 도가(道家)에서 행하던 호흡법의 하나로 잡념을 없애고 가만가만 숨을 쉬어서 기운이 배꼽 아래에 미치게 하는 수양방법을 말한다. 이를 되풀이하면 오래 산다고 한다.
4) 중국에는 크게 13개의 종파가 있다. 비담종(毘曇宗), 성실종(成實宗), 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0,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율종(律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진언종(眞言宗)이 그것이다.
정토종(淨土宗)
불교 수행법 중에서 대중들이 지금까지 가장 넓고 깊게 행하고 있는 것은 염불행(念佛行)이다. 본격적인 염불 사상의 대두는 초기 대승불교 시대에 여러 가지 정토계 경전이 성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 등은 중국 정토종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이들을 포함한 갖가지 정토계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남북조 초기에는 석가불(釋迦佛) 신앙이 일반적이었으나 점차 미륵 신앙이 확대되고, 나아가 남북조 말기에 이르러 북조에서는 관음신앙1)이 그 두 신앙을 능가하게 되었다. 반면 정토종의 핵심인 아미타불 신앙2)은 아직 큰 두각을 나타내지 않다가 동진 불교계의 지도자 여산 혜원(廬山 慧遠, 334~416)이 일으킨 백련사를 계기로 집단적으로 전파되었다.
혜원을 중심으로 하는 결사에서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선정을 통하여 아미타불을 염하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였으며 실제 혹은 꿈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산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간 사회로 나오지 않았던 혜원의 정토신앙 운동은 그의 입적 후 더 이상 대중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혜원의 인품과 엄격한 수행규범은 이후 정토종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를 정토종의 초조(初祖)로 받들게 된다.
혜원 이후 정토의 교리와 수행법을 사회적으로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한 이는 담란(曇鸞, 476~542)이다. 그는 일찍이 도교의 불로장생술에 관심이 많았으나 보리류지(菩提流支)로부터 정토종(淨土宗)의 근본경전인 삼부경(三部經)의 한 책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전수받고서 530년 무렵 개종한 이후 오로지 정토 교리를 전파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특히 그는 용수(龍樹, 150?~250?)의 《십주비사론》에 근거하여 정토교를 ‘이행도’(易行道)로 규정하였다. 이행도란 아미타불을 믿고 그의 원력(願力)에 의해 서방정토에서 왕생하는 타력적(他力的) 방법이다. 이것은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자력적인 수행법인 ‘난행도’(難行道)에 대비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중들에게 칭명염불(稱名念佛)하기를 적극 권장하였다.
담란 사후 중국에서는 말법사상이 대두하였다. 즉 정법(正法) 500년, 상법(像法) 1000년, 말법(末法) 1만년이라 하여 부처님 입멸 1500년이 넘는 시기에 해당하는 550년 무렵인 당시를 말법시대로 규정하고 그에 대처하려는 자각과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말법사상은 이미 천태종의 남악 혜사(515~577)에 의해 비롯되었으나 집단적인 세력으로는 정토교와 삼계교(三界敎)3)가 있었다. 삼계교의 신행(信行, 540∼594)은 말법시대에 중요한 것은 오직 참된 믿음뿐이며 그 외에 어떠한 가치나 정부도 믿을 수 없다고 타종파나 정부까지 모두 적대시하여 결국은 왕권으로부터 탄압받게 된다.
이와는 달리 정토교의 지도자였던 도작(道綽, 562~645)은 이 시대야말로 모든 중생을 죄악으로부터 부패로부터 구원하겠다고 서원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모든 죄를 참회하여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는 염불을 쉽게 하기 위하여 콩으로 횟수를 세도록 하는 소두염불(小豆念佛)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세 현(縣)의 일곱 살 이상 남녀노소가 모두 염불을 하였으며 어떤 여자신도는 염불하면서 센 콩의 수가 57석이 되었고, 어떤 비구는 80석이나 되었다 한다. 이들의 수행은 왕실의 지지를 얻어 더욱 교세를 넓혀 나갈 수 있었다.
도작에 이어 정토종의 교의(敎義)를 체계화하여 종단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한 이는 선도(善導, 613~681)이다. 그는 서방변상도(西方變相圖)를 보고 정토의 문에 들어와 도작 문하에 들어갔다. 도작의 입적 후 그는 장안으로 나아가 《아미타경》을 수십 만 권 베껴 써서 배포하고 염불을 권장하는 등 정토교를 널리 알렸다. 그의 저술 가운데 《관무량수경소》는 종래의 《관무량수경》에 대한 해석을 일변시키는 것으로 정토종의 진수를 담고 있다. 《관무량수경소》에서 그는 서방정토로 왕생하는 직접적인 실천으로 염불 ‧ 독경 ‧ 일심으로 정토를 나타냄(觀)과 아미타불의 찬탄과 공양의 5가지를 들고, 다시 그 가운데 염불을 주된 행위로 삼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행위로 보았다. 그는 특히 염불뿐만 아니라 참회나 예배 등 나머지의 모든 선업을 긍정하였으며, 경전에 대해서도 정토 삼부경 외에 《법화경》,《금강경》,《열반경》,《반야경》 등도 극락왕생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독송하기를 적극 장려하였다.
선도 이후 중국에서는 새로운 정토교의 흐름이 생겨났다. 혜일(慧日, 680~748)과 법조(法照)로 이어지는 맥이 그것이다. 혜일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인도로 건너가 13년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설화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중국에 돌아와서는 경전의 번역이 아니라 정토 교리를 전파하는데 여생을 바쳐 그 공으로 사후에 현종으로부터 자민삼장(慈愍三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당시에 혜능의 가르침에 의거하는 선종이 점차 세력을 넓혀 가자 그는 계율과 경전을 경시하며 치우치게 선정을 행하는 선종의 경향을 비판하여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의 원만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선(禪)과 교(敎) 또는 염불과 선의 조화로운 수행을 강조하였으므로 그는 선정(禪淨)일치론 내지는 염불선의 원류라 불린다.
혜일의 맥을 이은 법조는 당시 장안에 불공금강이나 담연, 징관과 같은 다른 종류의 유명한 스님들이 있었으나 이러한 경쟁 속에서도 정토의 수행을 널리 유포시켜 ‘제2의 선도’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아미타불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5가지 곡조로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법(五會念佛)을 주창하여 염불을 대중 깊숙이 전파하였다. 그는 본래 천태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자민삼장과 같이 교리와 수행의 조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정토에 대한 개념과 수행은 경전이나 염불수행과 아물러 변상도(變相圖)를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해질 수 있었다. 우선 경전은 글자를 알아야 하며 또한 누구나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만 극락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움을 한눈에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변상도야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토의 개념을 단박에 각인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 정토신앙은 이후에도 선종과 더불어 유행하기는 하였으나 독립된 종파라기보다는 선(禪) ‧ 교(敎) ‧ 율(律)이 화합된 신앙형태로서의 결사염불이었다. 이후에 원(元)과 명(明)대를 지나 청대에 이르면 중국불교는 쇠퇴기를 맞게 된다. 아울러 교단도 변모하여 거사불교(居士佛敎)가 유행하면서 선종의 임제종을 재가에서도 여전히 행했으며 그보다 더욱 만연했던 것은 바로 염불신앙이었다. 아미타불과 관음신앙은 ‘집집마다 관세음, 곳곳마다 미타불’(家家觀世音 處處彌陀佛)이라고 할 정도로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을 신봉하는 불교의 신앙형태를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2)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한 것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은 모두 48원(願)이 있다.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 결 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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