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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 박성현

 

 

버스가 서울역사발물관 앞에 멈췄다. 된장국 냄새가 솔깃하다. 골목을 돌고, 다시 골목 끝으로 가면, 저편에 집 한 채 기우뚱 있다. 영산홍이 피고, 떨어졌다가 다시 피는 5월에도 그 집은 비스듬히 서 있다.

 

녹슨 파란색 철제 대문을 지나면 텃밭 같은 마당에 큰 개 한 마리 햇볕을 쬐고 있다. 몇몇 노송이 한세월 돌아가면서 입고 다녔던 장삼처럼 곱게 펴져 있다. 시멘트 담 가까이 돋아난 풀잎이 흔들린다. 허기진 마음이 풀잎을 따라 바닥으로 잠긴다. 풍경 소리가 난 듯했으나 바람이 항아리를 울리고 간 소리다. 항아리에는 된장이 익어간다. 대청마루에 모시 적삼을 입은 노부부가 나란히 세모잠을 잔다. 수백 년 전의 기억은 모조리 잊히지만 한낮에는 늘 되살아났다.

 

우체부 김 씨가 등기소포를 가지고 초인종을 누른다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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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나는 더욱 낮아지고 치열할 것이다

 

문밖에 햇빛이 울창하다. 햇빛의 비늘을 들추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을 만졌으나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람과 어긋난 것이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다. 저 문을 들고 나는 것은 바람뿐일까. 그것이 궁금하여 신문을 접고 밖으로 나간다. 바람은 온갖 모양으로 거리를 떠다닌다. 살구나무에서 꽃이 피고 질 때도 바람은 제 속살을 들이밀고, 녹슬어가는 자전거에도 바람은 있다. 그 바람을 보는 내내 눈이 아프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승의 온갖 냄새를 맡는다. 도처에 냄새가 있다. 냄새는 바람 속에서 길을 내고,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냄새의 끝에 가만히 손을 댄다.

 

또한 소리도 있다. 고추가 붉게 말라가는 소리, 나무그늘이 펼쳐지는 소리, 감자가 주춤주춤 꽃을 밀어내는 소리. 나는 소란스러워진다. 많은 소리가 한꺼번에 멈출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귓속에 담아두었던 두툼한 소리의 책들을 꺼낸다.

 

시가 되지 못하는 말은 없고, 시가 아닌 말도 없으므로 세상은 시로 가득하다. 내 안에 길을 내고 나를 관통했던, 모든 이름들을 하나씩 부를 것이다. 그 이름들이 형상을 가지고 불쑥불쑥 자라도록, 나는 더욱 낮아지고, 치열할 것이다.

 

늘 내 등의 밭을 가꾸시는 부모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람과 냄새, 소리가 시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김영철 선생님, 말이 익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 고창운 선생님과 김진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글과 삶을 나눈 건대 글꾼 친구들과 이안 형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이문재 선생님과 장석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시에서 났으니, 나는 시에서 피고 질 것이다. 오늘은 나의 아내, 변영수에게 희고 눈부신 꽃을 바쳐야겠다.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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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내공 엿보인 작품세계 펄떡이는 자기 색깔 키우길

 

신인들의 작품을 앞에 놓고 있으면, 회를 뜨기 위해 펄펄 뛰는 생선을 도마에 올려놓은 기분이 되곤 한다. 벅찬 의욕에 덤비고는 있으나 쉽게 어찌 해볼 수 없는 경우다(끝내 생선회를 뜨는 사람은 아니므로 오해 마시길!). 난감할지언정 싱싱한 비린내는 정신적 활기를 북돋우는 농염한 매력이므로 문제는 늘 생선의 선도에 있게 마련이다.

 

본심에 올라온 시들에 대한 첫인상은 한꺼번에 막 출하된 양식 생선들 같다는 의견이었다. 미리 수요를 예측하고 있는 듯한, 적당히 시류에 맞춘 패턴이 눈에 거슬렸다. 제각기 자라온 작품들, 가두리의 흔적이 없는 자연산 활어가 점점 드물어진다고 진단했다. 거듭 살피는 과정에서 오래 아가미가 멈추지 않는 시들이 남았다. 이해강, 박성현 두 분의 시였다. 이해강 씨의 장점이 박성현 씨에게는 없었고 박성현 씨의 장점이 이해강 씨에게는 없어서 선뜻 택일하기가 어려웠다.

 

이해강 씨는 응모작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 문제의식도 건강했고 대상을 장악하는 힘과 언어 감각도 기성 시인 못지않았다. 그런데 지나치게 안정적이라는 것이 흠결로 지적되었다. “바람의 마찰음이 신음소리를 내며 조여진다 엎질러진 담쟁이 넝쿨을 끊으며 흰 점이 맹렬하게 뚫리고 있다”(‘터널’)와 같은 수사의 과잉도 단점이었다. 신인은 도약대를 밟고 뛰는 존재이므로 그만큼의 새로운 높이가 필요함을 새겨주시길 바란다.

 

반면 박성현 씨는 지나치게 다양했다. ‘소행성 B1023'과 같은 SF적 요소에서부터 봉화 가는 길같은 전통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소품에서부터 장시에 가까운 호흡까지 보여주고 있어 잡식성 어류의 왕성한 소화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습작기가 매우 성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편편마다 내구력도 뛰어났다. 지면에 발표되는 두 작품이 얼핏 서정 소품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박 씨가 갖고 있는 시적 역량이 의심되진 않았다. 이번 당선이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 대부분이 최근의 시적 유행에 편승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가두리를 스스로 어떻게 벗어나는가에 집중해야 하며, 과연 벗어났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밝혀둔다. 모여서 길러지는 가두리는 결코 바다가 아니다. 넓고, 깊고, 큰 바다는 가두리 밖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해강 씨의 응모작을 최종적으로 내려놓을 때 매우 안타까웠다는 사실을 밝히며, 권혁진, 정수연 씨에게도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이문재,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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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장의 내력 / 임경섭

 

누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아침, 샴푸 퉁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졸음 있는 힘껏 짜낸

김 대리를 네모반듯하게 건물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마다 김 대리의 자리는 한 블록씩 깊어진다

아래층 이 과장은 한 박스 서류뭉치로 처분되었다지

누군가 음료수를 뽑아 마실 때마다 덜컹 내려앉는 일과

버려질 것을 아는 이들도 사방으로 설계된 빌딩 속으로

차례대로 몸을 누인다

모든 가게의 비밀은 진열장에 숨어 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녀야 할 것들을 가득 담아 놓은 과일바구니

모인 것들은 축축한 바닥에 한 번 튕겨보지도 못하고

뿌연 먼지로 내려지는 셔터를 기다려

어둠 속으로 무른 멍 자국을 감춘다

바닥에 떨어지거나 모서리에 부딪쳐 생긴 것보다

서로에게 짓이겨 생긴 멍 자국에서 과일은

더 지족한 향기를 뿜는다

곯은 사람들로 붐비는 퇴근길은 진한 매연 냄새를 풍기고

김 대리는 살구를 고른다 먼지 닦아가며 고르다가 떨어뜨린

살구 한 알 탱탱하게 굴러가는 것을 본다

짓무르지 않은 것들은 저렇게 꿋꿋이 굴러다니는데

쌓여 있어 한 쪽으로 절뚝이는 것들아

살구를 주우러 가는 김 대리의 발자국에 통증처럼

저녁이 배고 높은 허공으로 신음처럼 새가 난다

곧지도 않고 함부로 꺾이지도 않는 길을 가는 새의 둥근 비행

그 아래서 김 대리는 둥글게 몸을 말아 살구를 줍는다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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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꿈에 그리던 별 따다가 내 방에 걸어”

 

그림자는 아무도 기대지 않은 벽에서 몰려와 잡풀 무성한 골목 안에 슬며시 몸을 풀어 놓고 갔다. 그런 날 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친구의 고층 아파트를 찾아가곤 했다. 나를 달로 화성으로 북극성으로 날라다 줄 것 같던 사각의 방. 한 번도 눌러 보지 못한 비밀의 버튼은 꽤나 높은 곳에 매달려 반짝였다. 별을 딸 수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올라탈 수 있던 공중의 꿈들.

그런 반짝이는 꿈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당선 통보로 즐거운 나의 일상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별 하나 따다가 내 방에 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낙선을 반복할 때마다 시 쓰기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유언에 있었다. 어머니와 마지막 순간 꼭 좋은 시인이 되겠다고 약속한 지 7년 만에 당신과의 약속을 절반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쁠 따름이다. 하늘에서 얼마나 흐뭇해하고 계실지, 그 미소가 오늘 밤 계속 아른거린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아직 너무도 부족한 나에게 시 쓰는 것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끝까지 살아남는 시인이 되리라는 약속과 함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이토록 반짝이는 언어의 빛들을 처음 알려주신 양승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게으른 나를 항상 뜨겁게 채찍질하시며 시에게 목숨 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박주택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열심히 쓰라고 언제나 따뜻하게 격려해 주신 김재홍, 김종회 선생님과 이문재 선생님, 그리고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최상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끝까지 함께 시 쓰기를 약속한 재범·은기·규진·진명·은지·현진을 비롯한 여러 경희문예창작단 선후배 여러분과 문학도로서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 준 현대문학연구회의 선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하늘새재 선후배들을 비롯해 따뜻이 관심 가져준 국문과 선후배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밖에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너무도 많지만, 지면이 작은 것을 핑계 삼아 차후에 일일이 감사함을 전하겠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임채순님을 비롯한 온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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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을 보는 시선 삶 전체로 향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을 하게 되어 있다. 낙선한 한 사람으로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최소한 유심히 읽을 만한 사람은 그 낙선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심사소감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실은 심사소감처럼 상투적이고 설득력 없는 글도 없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이 바뀌어도, 심지어는 응모된 작품들의 경향이 그렇게나 변해도 예나 지금이나 초지일관 심사소감은 새롭지 않다거나 아니면 유행을 탄다거나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시를 쓰라는 말씀인가! 대안의 예를 제시해 주시든지….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심사위원 당사자들의 시나 글을 새삼 떠올리면서, 지적사항에 가장 많이 해당하는 자가 바로 당신이지 않은가! 그 원성이 들려온다(맞다! 모두가 선후에 서서 고투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심사평을 계속해서 늘어놓자면, 그럼 왜 그럴까. 새롭다고 느껴졌던 시가 바로 낡아지는 것을 볼 때가 흔하다. 유행을 타는 시다.

평론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시인이 고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 소치이다. 젊은 문학도의 조급증은 눈앞의 물결을 수평선으로 착각하는 셈이다.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온 낡디낡은 주문이 있다. 과연 스스로에게 시는 진실(眞實)과 진심(眞心)의 뗏목인가에 대한 되물음이다. ‘우선’ 그것이 아니어서야, 그것이 느껴지지 않아서야 이 하찮은 ‘언어 상태’는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 되물음이 깊고 익어서 ‘방법’을 낳고 ‘파괴’를 낳고 다시 익을 때 ‘개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엄밀히 신인에게 개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진실한 발성인가가 그 가능성의 초점일 수밖에 없다.

잘 쓴 분들로 삼십여 분이 넘어왔다. 그중 어렵지 않게 세 사람으로 압축이 되었는데 임경섭·조율·이우성 제씨가 그들이다. 모두 삶을 감싸 안으려는 생각의 두께가 다른 응모작들보다 치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율 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에 있는 풍경들을 촘촘히 살피고 선명하게 내면화하는 매혹이 있었다. ‘골목의 무릎’이며 ‘빨래방’ ‘세탁기’ 등의 제목이 말해주듯 거창하지 않은 세목들이 거뜬히 시가 되었는데 일정한 패턴화가 단점이었다. 이에 비해 이우성 씨의 시들은 훨씬 언어미학적으로 경쾌한 맛이 있었다. ‘어쩜 풍경이 멈춰 있다고 생각했을까’ ‘평생 먹을 수 있는 잎사귀가 정해져 있다면’ 같은 시는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이미지의 돌출이 걸리긴 해도 삶의 풍경을 파악하는 감각이 새롭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전체 응모작이 한 작품을 잘라 나열한 것이라 해도 될 만큼 각 작품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았고 뒤쪽에 배열한 소품들은 서툴렀다. 가령 ‘오후의 냄새를 떠올리는 내일의 분주함’같은 구절은 치명적이다.

임경섭 씨가 당선자가 되었다. 잘 썼다. 응모한 여섯 편의 시가 모두 고르다는 데 우선 점수가 주어졌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점을 잃지 않고 삶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말이 세련되지 않은 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진지하고 끈덕진 면으로 보면 장점이고 필요 이상 시가 길어져서 여운을 빼앗는 점에서 단점이다. ‘잘 썼다’는 것은 오래 습작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뜻인데 그것이 자신을 묶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 주길 바란다. 이, 외진 오솔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한다.

위 언급한 외에 유병록·김상혁·남민영·이해강 씨의 시들이 아까웠으며 더불어 결심에 오른 모든 작품은 심사위원이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좋은 시들임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심사위원=나희덕·장석남 예심 강정·김선우·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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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개방 / 방수진

 

 

1

선전물이 붙는다 오늘 하루뿐이라는 창고개방

준비 없는 행인의 주머니를 들썩이게 만든다 간혹

마음 급한 지폐들이 앞사람 발뒤꿈치를 따라 가고 몇몇은

아예 선전물처럼 벽에 붙어버린다

떨어진 상표딱지, 올 풀린 스웨터, 뜯어진 주머니, 비뚤거리는 바느질까지

다들 제 몸에 상처 하나씩 지닌 것들이다

습기 찬 창고에서 울먹이는 소리는 여간해선 지상으로 들리지 않는 법

 

2  

조금은 잦은 듯한 창고개방이 우리집에도 열린다

일 년에 다섯 번 혹은 예닐곱으로 늘어나기도 하는 그날엔

아버지 몸에서 하나 둘씩 튀어나오는 물건들을 받아내느라 힘들다

하지만 나는

집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냄비며 플라스틱 용기들이

조금씩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때론, 손끝에서 퍼진 그 울먹임이 아내의 머리를 찢고

다리에 멍울을 남기고 깨진 도자기에 발을 베게 만들지만

아버지의 창고 그곳에서

누구도 딸 수 없었던 창고의 자물쇠가 서서히 부서지고,

서로 쓰다듬을 수 없어 곪아버린 물집들이

밤이면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제 심장소리에도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3  

아직, 연고 한 번 바르지 못한 상처들로 창고가 북적거린다

창고의 문을 열어두는 이유는

더는 그것들을 보관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서로 다리 한 쪽씩 걸치고 있는

우리들의 절름발이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몇 번의 딱지가 생기고 떨어졌어도

한번 베인 자리는 쳐다보기만 해도 울컥하는 법이지

그래서 창고 개방하는 날

거리에는 저마다의 창고에서 빠져나온

우리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을 치며 쌓여가고 있었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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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곪아 터져가는 모든 것을 가슴에 품겠다

 

무작정 밤길을 거닌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이름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기지개를 켜는 그곳에서, 상처 입은 것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곧 물러터질 것들과 이미 썩어 문드러진 것들의 변주 교향악. 제멋대로 음계를 오르락내리락,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가고 나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지요. 조금씩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에서 제가 얼핏 본 것이 당신이었나요.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어 나오는 진물을 봅니다. 상처 입은 것들의 요람을 찾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을 등에 업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내 언어가 그곳까지 닿아 조용히 잠들 수 있기를 바라왔습니다. 교향악 악보에 하나씩 그려지는 내 언어의 음표들은 누구를 부르고 있나요.

 

갑작스레 받은 당선소식도 이 오선지위로 떨어지는 그들의 눈물 같은 것이겠지요. 손꼽아 봅니다. 그들의 상처 덮어줄 이파리를 찾아 길을 나선 밤들을.

 

아직 많이 부족한 제 시를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묵묵히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군 생활 열심히 하고 있는 동생 성현이, 뜨거운 시를 쓰자고 약속했던 은지, 현진이를 비롯한 문예창작단 학우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선후배님들, 현아, 부산 죽마고우 그리고 정신적 나침반이 돼 주었던 진아, 은지, 유나, 가연, 신정, 미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진흙에서 손수 저를 캐내주신 박주택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영이, 김원경 시인 두 분 모두 건필하시기를. 지금도 서울에 대학 간 손녀 자랑이 삶의 힘이라고 하시는 할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해여중 서욱성 선생님 아직도 시와 함께 길을 걸으시나요. 뵙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어 주신 한종수 님을 비롯한 이 넓은 중국 땅에서 만난 멋진 인연들 모두, 감사합니다.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온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가 뱉어낸 언어들이 저마다 길거리를 활보하며 춤추는 밤입니다. 세상 모든 상처 받은 것들의 울음을 거두어가는 일, 그것들을 빼곡히 오선지에 그려가는 일이 제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울음과 절규로 시를 쓰겠습니다. 제가 빚어낸 언어들이 조용히 잠들 수 있도록 세상 모든 곪아 터져가는 것들을 가슴에 품겠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따귀를 때리고 갑니다

 

그래도, 웃고 싶은 오늘입니다.

 

 

 

 

한때 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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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대상 장악하는 힘 뛰어나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30명이었다.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보통 본심에는 10명 안팎이 오른다. 예심 심사위원들은 좋은 작품이 많아서 행복했는지 모르지만, 본심 위원들은 고통스러웠다. 30명의 개성이 아니라 4~5개의 유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응모작들은 차이보다는 유사성이 먼저 눈에 띄었다.

 

우선 작품의 길이와 형태가 거의 같았다. 행을 구분한 시의 경우, 대부분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다. 또 산문시가 압도적이었다. 어떤 응모자는 응모작 7편이 모두 산문시였다. 시의 길이와 형태에 대한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많이 겹쳤다. 흔들리는 가족, 이주 노동자에 대한 연민, 외국 여행(주로 유럽) 체험, 신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해석 등이 자주 노출되었다. 두 응모자가 노르웨이 숲이란 같은 제목을 달기도 했다.

 

응모자들은 저마다 뛰어난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초점이나 색채, 구도, 즉 미장센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그 대상을 왜 촬영하는 것인지, 또 그렇게 촬영하고 편집한 화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감독이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가 있으니까 찍는 것처럼 보였다. 예비 시인들은 시는 오로지 이미지의 배열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시에서 이미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시가 되기 어렵다. 이미지 과잉은 곧 메시지(의미)의 결핍이다. 시에서(삶에서도 그렇지만), 과잉과 결핍은 결코 미덕일 수가 없다. 시 역시 타인에게 말걸기라면, 이미지 과잉으로는 독자에게 말을 걸 수가 없다. 더구나 저 독자가 시대와 문명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하루빨리 자폐적인 시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셋이었다. 김학중씨의 저니 맨’, 박은지씨의 열쇠, 도장’ , 그리고 방수진씨의 창고대()개방’. 김학중씨의 저니 맨은 삶의 한 국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선이 돋보였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해 아쉬웠다.

 

박은지씨의 열쇠, 도장과 방수진씨의 창고대개방두 작품 중에서 당선작을 골라야 했다. 문장은 박씨가 세련되었으나,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힘이나 시의 구성에서 방씨가 조금 앞서 있었다. ‘조금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시길 바란다.

 

김학중·박은지씨는 조만간 다른 경로를 통해 시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부디 등단 시기나 절차에 과민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는 데뷔가 아니고, 데뷔 이후다. 시인이 된 이후, 어떤 시를 쓰느냐가 문제다. 당선자 방수진씨는 오늘 아침 활자화된 당선소감(초심!)을 평생 잊지 말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문재·장석남(대표집필 이문재) / 예심 강정·이장욱·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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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저녁 / 이해미

 

 

내가 밑줄 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어느새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저물어가는 모든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너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은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꼭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 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 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 디디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들이 집요하게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 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들어와 붉게 흐르고 나 역시도 이름 버린 것들의 누이가 되고 말 것 같은데

 

나에게 진한 붉음으로 표식을 남긴 저물녘을 건너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 세계는 자꾸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려 하고 잘려진 너의 탯줄에 다시 뿌리가 내리면, 너는 저물며 빛을 키우고 빛이 저물며 어둠을 잉태하고 어둠은 다시 너를 산란한다. 그 속에서 나도 세상과 함께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던 것인데, 처음으로 돌아가려던 것인데, 내 속의 실뿌리들이 흔들리며 누이야 누이야, 내가 버리고 온 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거라. 물관으로 흐르는 맑은 피는 양수가 되고…… 체관으로 흐르는 진득한 피가 세계에 지천으로 꽃을 피워내는데…… 아아, 네가 오더구나.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 네가 오더구나.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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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길 잃은 언어들의 대리모 되고 싶어`

 

어릴 적의 나는 오래 묵은 옷장 속에 숨어있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천 년 내내 그대로 깊은 잠을 잤던가, 살짝 깨어 보니 천지가 온통 캄캄 어둠 속이던 거라, 문득 무섬증이 솟아 옷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던 날, 그날에, 겁에 질린 내 눈을 콕 쏘던 그 햇빛이 눈물나리마치 선연하고 또 흐릿해서, 내 온몸이 곧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보게 된 햇살에 눈물이 나듯, 참 벅차게 눈부신 오늘입니다. 눈을 감아도 화안히 감은 눈꺼풀 속에서 온갖 빛살들이 아롱지며 색색의 춤을 추고, 빛 같은 행복이구나, 당신 같은 부피로 다가오는 벅참이구나, 하며. 그대로 눈 뜨고 싶지 않은 오늘입니다.

 

부족하고 부족한 글에 눈 마주쳐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뜨겁게 시를 품는 마음으로 평생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든든한 후원자이신 어머니.아버지, 친구로 시작해 이제는 문우가 된 9년 지기 친구 민정, 어둠 속 등불 같던 안양예술고등학교의 선생님과 문우들, 그리고 윤창석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건국대 학우들과 H.J.K.S그밖에 바람 잦은 시절 내내 힘이 되어 주던 많은 사람에게, 혹여 나의 무심(無心)이 독이었어도 용서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인에서 텃밭을 일구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몸소 시()를 살고 계시는 할머니께 한없이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내 안에 자욱하게 눈물 머금은 것들을 하나하나 종이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겠지요. 지나간 것을 흩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못하고 손금처럼 주름처럼 안으로 새기는 습관 때문에, 그것들을 붙잡아 각인이라도 하듯 시를 써 왔습니다. 나를 스치며 사유의 무늬를 그리는 수천의 활자들과 언어들이 있어 더없이 행복합니다. 습기 어린 음절들이 누군가의 심장으로 스며들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이름이 소진될는지. 언어에 잠식당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시를 써야겠습니다. 시로서 어머니가 되어야겠습니다. 길 잃은 언어들의 대리모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붙잡은 것이 시였듯이.

 

 

 

 

뜻밖의 바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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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1920년대 이상화 시인의 운율 느껴져`

 

핵과(核果)가 여무는 기다림의 가을 초입에 신인을 찾는 마음은 추억과 즐거움을 준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에서 한 편의 시를 선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준을 세우고 심사하였다. 주류 현상에 몸 섞어 흘러가는 시가 아닌, 자기 주술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름이 아닌 심저(心底)에서 직접 시의 무늬를 건져 올리는 시인이기를 바란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강미라('국수나무가 열리는 계절' ) 이산('글자를 씻다' ) 김혜정('나무의 애인' ) 백상웅('코끼리 무덤' ) 씨의 작품들은 자기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부분 부분 형상의 방심이 드러나고 상이 지나치게 뚜렷하여 이미지가 손상되는 범상성과 작품 수준의 격차가 눈에 띄었다.

 

아침 저쪽의 어두운 저녁을 유려한 시행으로 끌고 간 자정(自淨)의 리듬을 높이 사서 이혜미씨의 '침몰하는 저녁'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새로운 역할의 시는 근대성에 가까이 있는 것에만 있지 않고 먼 곳이나 소외된 것들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외가 있다. 당선작은 분주하고 잡다하지 않은 순진한 사색으로 ''''를 동일성 속에서 비춰보는 작품이다.

 

1920년대 이상화 시인의 호흡과 운율을 턱 빌려온 듯한 시법이 오히려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밑줄 친 황혼 사이로 오는' 너를 맞이하는 ''는 성()의 비밀과 출생을 바다의 침몰 위에 올려놓고 밑줄을 친다. 타인의 품에 안겨 있는 자아의 영아를 대상화하여 초경혈 같은 떨림의 언어로 그려냈다.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온다'는 미적 환시(幻視)가 그것이다. 또 우리 시에서 사라진 '누이'가 새롭게 호명된 점도 심미적 충동을 새롭게 한 특이성이다. 여성 화자가 부르는 누이가 낯설지만 그들의 사랑이 어둠 속 바다로 사라졌다가 재생되는 사실에 화자는 눈뜨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오염시킨 자궁을 복원하려는, 우리를 향한 시의 반성적 저항이다.

 

리듬을 놓지 않고 저 너머의 핏놀빛 아침을 보게 한 것 자체가 경이이다.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는 여성이며, 타자들은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를 부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사라졌지만 기억 속에 있는 우리 시의 한 언어이자 핵과 같은 운명이다. 10대 후반의 시인으로서 두려워하지 말고 깊은 곳으로 몸을 낮춰 영혼을 깎는 시를 쓰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명인.고형렬(대표집필 고형렬) /예심 나희덕.홍용희.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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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주세요 / 박연준

 

 

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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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내 여윈 손가락 닮은 그런 시 쓰겠다 다짐"

 

이른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아이처럼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누군가 날 두드려 주길, 날 꺼내가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렇게 빨리 밖으로 나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눈곱도 못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숨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저를 오래도록 뱃속에 품고 기르다, 예쁘게 낳아주신 김사인 선생님, 제 시의 뿌리, 존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옥동의 한 아이'처럼 씩씩하게 걸어갈게요.) "너는 차오르는 달이다. 시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울컥! 쏟아져 나올 때까지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붙잡아 주신 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쟁이로서의 삶을 직접 보여주신 이만희 선생님, 하일지 선생님, 조병무 선생님, 귀한 가르침들 정말 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특히 아무렇게나 흩어지던 아버지, 눈썹부터 꼼꼼히 늙어가던 아버지, 감사합니다. 멀리 미국에서 응원해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그동안 습작했던 노트들을 꺼내어 보니 결코 가볍지 않은 낙서 형태의 글들이 만져집니다. "내겐 연필이 아닌 손가락 하나만 있어, 나는 여윈 손가락을 닮은 시를 쓸 거야. 내 시가, 내 덜 익은 김치 같은 날것의 시가 세상을 비출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손가락을 부지런히 깎고, 깎을 테야!" 능력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목숨만 질겼던 저의 ''에게 키스를 보냅니다. 눈물을 흘리며 했던 이 다짐을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시인들과 '부도 난 눈물공장'에서 아직 눈도 못 뜬 '아기 시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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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발랄하고 생생한 시어 매력적 경험·상상 아우른 솜씨 뛰어나

 

이 가을에 신인들이 쓴 새로운 시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골방에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와 삶의 현장들이 반응하는 시적 사유를 개진하고, 한국어의 새로운 울림에 골몰하는 신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뿌듯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인문학상은 한 사람의 신인만을 골라내야 한다. 전체적으로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고 나서 본심 위원들이 개진한 의견들은 공통되었다.

 

우선 시를 많이 써본 경험이 풍부한 응모작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작품일수록 편안하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생산해온 시의 틀, 어조, 수사를 그대로 답습한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를 쓴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이 쓴 시의 어디에 숨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반면에 패기만만하게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개발해본 응모작들의 경우엔 어법에 맞지 않는 오문과 생경한 관념의 직접 노출이 지적되었다. 왜 그런 내용을 유독 시라는 장르를 선택해 써야만 했을까 하는 장르에 대한 자의식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주영중의 작품들은 병치적 언술과 공간에 대한 사유가 새로웠다. 행인들이 스쳐지나가는 찰나적 공간을 볼록하기도 하고, 오목하기도 한 렌즈로 낯설게 하여 탐구하는 그의 시적 전개 방식도 새로웠다. '푸른 알을 낳는 거위' 등에서 구축한 공간은 하나의 회화 작품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구축된 공간에서 암시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미약했다.

 

반대로 강호승의 작품들은 시간을 탐구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처한 인간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이처럼 세밀하게 발굴해내는 시구들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과 나열, 과다한 비유, 설명적 어투 등은 개선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영동의 시들은 얼핏 보면 밋밋하고 단순하지만 그 속에 나름대로 촌철살인의 지혜를 감추고 있었다. 더구나 단순한 시구들 속에 감춰진 슬픔의 정서는 시를 읽고난 여운을 길게 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소품이 아닌 작품들을 읽고 싶었다. 소품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작은 세밀묘사 속에도 커다란 규모가 숨쉴 수 있는 것이 시라는 장르가 품은 특징이기 때문이다.

 

박연준의 시들은 생동하고 자연스럽다. 다른 신인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그 어조와 언술 내용이 훨씬 생생했다. 자신의 내밀한 직접 경험과 욕망의 상처를 드러내는 상상적 경험을 결합하는 솜씨도 뛰어났다. 상투적이지 않고, 발랄했다. 자연스럽게 툭툭 던지는 말속에 생의 비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시를 써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극적인 말들의 생산이라는 또 다른 타성에 젖을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박연준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즐거운 심사 과정을 거쳤다. 새로운 시인의 새 목소리의 탄생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혜순. 이시영(대표집필:김혜순) / 예심 고형렬. 김경미.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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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히아 / 김재홍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공화 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섰다(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타기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비쩍 마른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작았고 액정 화면에 잡힌 그의 헬멧에는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만 코를 벌름거리며 박혀 있었다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출신의 운수 좋은 메이저리거들도 타석에 서면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꼭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다

 

* 메히아 : 국내 프로야구팀 '한화이글스'의 외국인 선수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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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그제는 제가 자란 울산 장생포에 갔습니다.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제가 살던 집은 무너진 채 골조만 남아 있었습니다. 흥청대던 고래잡이 항구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제가 난 강원도 태백, 거기 살던 집은 납석 광산이 되어 있습니다. 저의 살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강원도 산막에 내리던 별빛만 있어도 좋겠다. 장생포 바다 은빛 물너울만 있어도 좋겠다. 지나온 자취를 모두 담아둘 수는 없지만, 거기 싱싱하게 살아 있는 은밀한 목소리를 기억해야겠다. 그래서 우리 삶의 뜨거운 메시지를 찾아내야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서정춘 선생님께서는 어버이처럼 자상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고형렬 선생님께서는 시로 가는 길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김영산 시인은 저에게 친형제와 같은 분입니다. 아니 친형제 이상의 혈육의 정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함께 시의 길을 걸으며 밤새워 어깨를 부대낀 김태수 시인.정일근 시인을 비롯한 울산의 선배 시인들께 감사합니다. 모두가 제게는 박복한 속에 복 받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제 아버지 산소엘 다녀왔습니다. 새벽 1시의 시립공원묘지는 후텁지근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내음과도 같은 산그림자와 더불어 한참 있다 왔습니다.

 

 

 

 

주름, 펼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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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홍삼득의 '생각 2'는 반복적 율동에 의지한 조금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른바 시를 만들 줄 아는 솜씨가 빛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약점은 그 변화의 추이에만 모든 감각과 시선을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상상력이 그만 "나는 생각들 속에서/생각을 호흡하며산다" 는 식으로 사유의 단순구조에 사로잡힌 것에 유의하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심사자들은 '연두색 벌레'를 비롯해 그의 다른 작품도 모두 시를 향해 섬세하게 열려 있음에 주목했다.

 

응모작 중 사유의 복잡다기함과 변환에 능한 작품은 이호준의 '상징들'이었다. 그의 시는 선행시(先行詩)인 조정권의 '산정묘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낡은, 죽음이 가득한 세계를 가장 다채로운 언어로 은유하면서 우리를 상상의 한 극점까지 몰고 간다. 이 거침없는 언어를 보라.

 

"나는 낮은 하현(下弦)/사령(死靈)들의 윤무(輪舞), 혀 달린 메타포/생명의 초라한 환유/부질없는 맹세의 램프, 나는"

 

한자어를 돌올하게 내세우는 것이 좀 거슬리지만-역으로 그것도 그의 시의 특장일 수 있겠으나-그리고 어느 외국 번역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그침을 모르는 바람처럼 몰아치면서 이 '가짜 항성''회색 여행자''일그러진 외눈'으로 이 시대의 모든 불모의 징후를 명징하게 읽어낸다.

 

그리하여 이 여행자의 시선에 돋을새김된 세계는 "바람이 불기 전에/떠날 채비를 하는 모래의 영혼과/비 내리기 전에 잠드는 불의 영혼"들이 이글거리는, "죽음의 고요함"이 끓어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명하고 멈출 줄 모르며 언어의 두려움을 너무 모르는 넘치는 재기 앞에서 심사자들은 한편으로 감응하면서도 곳곳에 과장된 감정의 덩어리들이 제어되지 않은 채 노출돼 작품의 균일한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김재홍의 '메히아'는 일견 평범한 시다. 아니 앞의 '상징들'과 비교하면 비유도 좀 어눌해 보이고 언어도 매끄럽지 못해 평범의 극치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번·세번 소리내 읽다보면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는, 유머와 기지를 속으로 감추고 있는 시다. 이호준의 시가 정색을 하고 쓴 시라면 '메히아'는 짐짓 아닌 척하면서 허술한 표정으로, 그러나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앞의 시와는 시적 전략이 다른, 평범을 가장한 시다.

 

첫 구절부터 보라.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출신 시민이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였던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서게 된 경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사실 묘사부터가 벌써 웃음과 연민을 동시 유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 시는 시종일관 이 웃음과 연민의 이중 기조를 잃지 않으면서 '메히아'라는 머리통이 매우 작고, 2루타를 날린 적이 있으며, 비쩍 마른 눈의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그리고 늘 타석에 서면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 인물을 살아 있는 시적 형상으로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사자들은 숙고 끝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동시에 그의 다른 작품인 '평상(平床)' 등에서 확인된, 이 땅의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한 한편으로 미더운 시적 기량이 너무 손쉽게 민중주의적인 인물형상의 탐구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즉 오늘의 도시민의 피로한 일상 또한 간파할 줄 아는, 산뜻한 현대 시인으로서의 세련된 미적 근대성 또한 갖추게 되기를 특별히 당부하기로 했다. 그 길만이 오늘날 도처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민중적 정서가 건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독자적(주관적)인 나머지 "소리를 반사하는 침묵이 선명하다"는 등의 객관적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전개가 전체적으로 모호하여 물의 형상을 통한 몸의 탐구라는 시적 주제가 효과적으로 살아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의 '메히아'를 압도할 만한 결정적인 새로움이 없었다. 한편 배호남의 '좋은 날'도 매우 아름다운 언어의 그늘을 드리운 작품이었으나 바로 그 '작품됨'이 너무 구투였음을 밝힌다. 응모자 여러분의 건투를 빌면서!

 

심사위원 김혜순·이시영 / 예심 고형렬·김경미·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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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움 / 장승리

 

 

무덤 속 시체들이 벌떡 벌떡 발기하는 동틀 녘

난 가끔씩 내 무덤에 알리움 한 송이 들고 찾아간다 (무덤에 다다르려면 낡은 나룻배를 타고 가야해

할머니 환한 주름 같은 서글픈 물결을 따라 강을 건너야 하지)

무덤에 다다르면 알리움 한 송이 무덤 앞에 내려놓고

내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 앞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눈물샘에서 헤엄치고 있던 잉어 한 마리 파드득 몸부림 칠 때

눈물샘에 동글동글한 파장이 생겨 그 모습에 또다시 코끝이 찡해져 올 때

그제야 난 눈을 뜬다

나를 태우고 왔던 나룻배마냥

무덤도 강물 따라 소리 없이 흘러가고

내 몸에서 여문 꽃잎 하나씩 따다 무덤 위로 떨어뜨리니

꽃잎을 밟고 가는 무덤의 발자국 소리가 내 얼굴을 밟고 간다

강물 위를 떠돌던 하얀 물새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무덤은 붉은 열매처럼 빛나는데

내 집 담장 너머를 기웃거린 죄

한참을 서성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냅다 도망친 죄

나보다 더 큰 내 원죄를 임신한 저 무덤이 내 얼굴을 밟고 간다

 

* 알리움 '끝없는 슬픔'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 이름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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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견딜 수 없던 그런 것들이 시를 쓰게 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E M 시오랑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늘 강조하셨다.

"삶을 향유해라." 만져지지 않는 말이었다.

몸으로 감지되는 삶이란 내게 있어 향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강간범 같은 아침을 견디는 일이었다.

삶 앞에 무기력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내 자신을 견디는 일이었다.

며칠 전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디느냐고.

생각해보지 않은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난 의외로 쉽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견딜 수 없게 하는 것들이 날 견딜 수 있게 해준다고.

그렇다. 견딜 수 없게 하는 것들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날 살게 했다.

어머니. 아버지, 투병 중이신 고모를 비롯한 나를 나 되게 한 모든 인연들과

그 인연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당선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내 자신이 시작(詩作)의 열쇠임을 깨닫게 해주신 정호승 선생님과 문학학교 식구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귀를 기울여야겠다.

 

 

 

 

무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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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문학상을 통해 한 사람의 시인을 새로 선보인다는 것은, 세상에 한 사람의 시인을 더 보태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세상엔 시인이란 직함을 가지고 활자 매체에 시를 발표하는 시인들이 많고 많다. 모름지기 우리나라의 시단에 새 이름을 내거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이제까지 만들어왔던 시의 스펙트럼에 자기만이 내뿜을 수 있는 하나의 색깔을 빛낼 수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모국어의 지평을 넓히고, 뒤집고, 아름다이 하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심을 통과해 심사위원에게 전달된 작품들 대부분은 모두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었지만, 새로움의 면에 있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대부분이 기성 시인들의 발성법, 이미지 구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수사적 표현을 흉내내고 있었다. 더구나 문법을 이기려는 시적 표현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아예 틀린 표현들이 즐비한 시들을 읽을 때는 무척 괴로웠다.

 

우선, 예심을 통과한 신인 스무 명의 작품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토론하여 여섯 명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두 명의 작품들을 남겨 검토한 다음, 장시간의 토론을 통해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우선, 천서봉의 플라시보 당신 외 4편의 시들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 시를 많이 써본 사람의 솜씨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신인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비유적 표현들이 새롭게 읽히기보다는 장식적으로 읽힌다는 점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조은주의 서커스가 지나간다 외 4편의 시들은 세세한 일상의 순간적 현상들 속에 숨은 세상의 이치, 자신의 인식을 촌철살인으로 내보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진입할 때의 비약, 각 시편들의 단순성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김종훈의 태풍의 눈 외 5편의 시들 속엔 서로 상이한 두 가지 시 세계가 공존해 있었다. 추상적이고 산문적인 시들보다는 차분한 스케치, 언어로 그림을 그린 듯한 묘사시들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다.

 

이근화의 고등어 외 6편의 시들은 비유적 묘사보다는 현상을 직시한 다음, 그것을 단순하게 묘사하고, 그 묘사한 것들을 중첩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다른 세계가 현상 뒤에 숨어 있음을 밝히는 시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직접 개입할 때의 피상성의 노출 등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안숲의 새장에서 외 4편의 시는 응모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차분한 묘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나름대로 해석하는 작가적 역량이 돋보였다. 지속적이고 긴 시간을 짧은 순간에 압축하는 능력,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도 있었다. 더구나 "코끼리의 무덤처럼 길이 끝나는 곳, 후미진 곳에 가로수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가을에) 같은 문장들이 읽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와 아울러 상투적인 표현들이 더 많았다.

 

장승리의 알리움외 14편의 시들은 우선 표현들이 신선하고, 자신만의 일상적이고도 심리적인 경험과 접합된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언술들이 시선을 붙들었다.

 

15편의 시들 속엔 간혹 극적이고, 작위적인 상황을 노출하는 시들도 있었지만, 그러한 시들은 여성적 화자가 억압적 상황을 고발하고 타개하려는 지난한 몸짓으로 읽혀졌다. 그러나 이 시들 속에서 우리나라 여성 시인들이 이제까지 개척하고, 확대한 시적 언술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부인할 순 없었다. 자신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하리라.

 

안숲의 계단에서와 장승리의 알리움 중에서 알리움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계단에서 등등의 익숙함보다는 알리움을 비롯한 그 밖의 작품들 곳곳에서 번뜩이는 신선미를 선택하였다. 장시간에 걸친 토론이었지만 합의는 신속하고, 유쾌하게 이루어졌다.

 

심사위원 이시영.김혜순 / 예심 강형철.나희덕.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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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 서광일

 

 

비닐 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딛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사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꼇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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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낮에 아버지와 논에 나갔다. 추수를 앞두고 노릇노릇 익어야 할 벼들이 때 아닌 태풍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기저기 비바람에 쓰러진 벼를 보고 있자니 태풍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게 들녘에 나온 농부의 마음일텐데. 아버지는 한참을 비 속에 서 계시더니 물꼬만 보고 그냥 가신다.

그동안 시가 안써진다고 얼마나 나 자신을 함부로 했던가. 시간은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시켰다.

그나마 몇 알 여물지도 않은 내 작품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서울에서의 어설픈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여름내 여물기 위해 얼마나 더위와, 또 내 자신과 싸웠던지 작품을 보내고 며칠을 앓았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혓바늘이며, 몸살의 잠복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때서야 알았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자동차 배기통에 대고 호흡하는 듯 답답한 시간이었다.

올 추석 고향에 내려가면 이것 저것 물어오는 친지들에게 뭐라 대답해야 할까. 차라리 이 지독한 도시에 남아 며칠 꾹 참으면 되지 않을까, 하다가도 태생이 촌놈이라 그런지 물소리가 좋고 풀내음이 좋아 결국 내려와 침묵으로 며칠을 보냈다.

짓궂은 친구들. 늘 그 자리에서 날 반겨주기도 하고 대목이라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녀석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철이 들었는지 서로 어깨도 도닥거린다.

관계란 참 대단하다. 내 언어의 텃밭이 되어준 부모님 동생들, 오래 곰삭아 텃밭에 거름이 되어준 고향 친구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텃밭을 함께 일구는 동기들, 그리고 '원광문학회' 식구들 모두 고맙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텃밭에서 거둔 부족한 열매 몇 알을 맛 보아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내 오랜 문혈(文血) 현승이와 광대 희준, 내 안에서 질서가 되어준 이준에게 깊은 포옹을 건넨다.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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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복숭아'(서광일)는 일견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시적 진술로 시작된다. 사내가 자전거를 세우고 길바닥에 흩어진 복숭아들을 줍는 1연부터가 그러한데 특히 비닐봉지에서 흩어져 나온 복숭아들을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에 비유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평범의 시행들은 2연의 시적 비약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온축으로 보인다. 2연에 의하면 사내는 한쪽 다리가 짧으며 그래서 자전거 페달을 비스듬히 밟을 수밖에 없으며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식구들을 위해 '털이 보송보송한' 복숭아를 고를 줄 아는, 작지만 눈밝은 기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시인의 시선은 사내가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하는 데까지 머물면서 이 가난한 날의 삽화를 돌연 활력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런 시대에도 시를 쓰고 읽는 이유일 것이다. 즉 '복숭아'는 시의 기본 규칙을 잘 준수하면서 어떤 가난에 특별하고 의미있는 삶의 충만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비록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어느 스산함 속에서도 자전거 바퀴는 기쁨으로 땡땡할 수 있는 것이다.


 '복숭아'를 중앙신인문학상 영예의 당선작으로 밀면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 중에서 '성에'는 짧고 빛났으나 '소음동 삽화'같은 시들은 너무 시적 규범에 얽매인 나머지 안이한 감동만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예술가에게 있어 그 앞의 선행 규범이란 때로 과감히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도 이해했으면 한다.


 당선작과 이들 작품의 수준차는 그리 크지 않다. 다만 당선작인 '복숭아'에 들어 있는 어떤 시의 눈, 작품 전체에 돌연 생기를 불어 넣는 그 무엇이 이들 작품에는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저 예술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물에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숨결을 부여하는 행위 아닌가..더욱 분발하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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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술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더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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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별을 털며 집으로 가는 퇴근길은 아름다웠다.

지친 몸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연필부터 깎곤 했다. 연필심처럼 생각이 올라오면 그것을 공책에 옮겼다. 사내의 왼손엔 어김없이 담배가 들려 있었는데 온 몸을 태울 듯 빠르게 타 들어갔다.

아침에 사내의 방문을 슬쩍 열어 보면 사내의 목이 앉은뱅이 책상 위에 툭, 털어져 있을 때가 있었다. 등을 흔들어 밤새 무엇을 썼느냐고 묻기도 전에 사내는 담뱃재처럼 흩어지곤 했다.

원고를 보내 놓고 나는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지독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모든 감각이 진공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허공을 걷는 아찔한 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혓바늘이 입천장을 찔러 대는 통에 나는 양식을 아낄 수도 있었다.

그런 증세는 1주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몸살이 끝날 즈음 나는 일요일을 빌려 금강 하구의 갈대 숲에 접혀 있다가 돌아왔다.

혼자 콩나물국을 맵게 끓여 먹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얼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화기를 내리자마자 몹쓸 아버지가 울컥거려서 잠시 젖게 내버려두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눈물이 되곤 하는 어머니 김정자 여사, 지난해 성탄절 전야에 흙으로 돌아가신 존경하는 아버지, 묵묵히 지켜 봐준 사랑하는 핏줄들, 한시름 놓으셨죠?

큰형으로 느낄 때가 더 많았던 이상복.정영길.이혜성 교수님을 비롯한 문창과 교수님들, 어머니 같은 박라연 교수님, 그리고 내 생활의 지침서이신 정종환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호만형, 성민형, 문원을 비롯한 문우들과 시창작반 식구들, 절망할 때마다 다독거려 주던 동기생들, 출발점을 허락해 준 중앙일보와 출발신호를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잘못 든 길에서 지도를 만들어 나가게 하신 강연호 은사님! 앞으로도 저를 가파른 벼랑 끝에 세워 두실 거죠? 선생님, 거기로 나오세요. 오늘은 제가 소주 한잔 살랍니다.

 

 

 

 

웃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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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로는 예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정서적 탄력이나 신인다운 패기 또는 개성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심사의 자리란 때로는 곤혹스럽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이 주목했던 작품들은 김다솔.강성민.박승철.류남.박성우씨의 시편이었다.

김다솔씨의 응모 시에서 엿보이는 것은 섬세한 시어가 감당하는 풍경의 투명성이다. 관찰과 묘사에 기대고 있는 이 응모자의 시선은 드러나지 않는 삶의 굴곡과 파문들을 읽어내지만 정작 깊이나 높이로 확산되지 않아서 아쉬움을 주었다.

강성민씨는 환상과 이미지를 교직하는 매력적인 시상을 펼쳐 보이지만 그것들을 한 줄로 꿰보이는 맥락의 힘이 제대로 살펴지지 않는다. 응모 작품들이 유지하는 수준에는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겠다.

박승철씨의 작품은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거기에 걸맞은 시어의 선택도 선이 굵다. 그럼에도 행간과 행간 사이에 긴장과 탄력이 지탱되지 않는 까닭은 범상하고 익숙한 수사에 비약이 심한 시상을 걸쳐놓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류남씨의 시편들은 분방한 상상력을 감당하는 그 나름의 형식미가 재미있게 읽혔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확인하기에는 응모 편수가 너무 적었다. 군데군데 부적절하게 동원된 시어들도 막상 선자들을 망설이게 했다.

박성우씨의 '거미' 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습작의 연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응모작에서도 시적 상상에 스며드는 체험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하여 거의 제 솜씨로만 한 채 시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이 응모자의 오랜 단련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다만 사물 앞에서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려는 노력만이 앞으로 제 몫의 장인으로 자신을 세우는 길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김명인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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