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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 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가 말하지 않을 때 시가 왔다

 

야구 시즌이 끝나고서야 잠자리가 사라진 걸 알았다.

 

인적 없는 공원. 불빛만이 맑게 새어나왔다.

 

내가 나를 피해 다녔으므로 바람 한 장도 햇살처럼 빛났다. 시를 쓰고 있었지만 시는 좀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언제나 나였고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가 쓸 시간이다.

 

볼륨을 줄인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내 숨결에 따라 소리가 변하는 변주곡.

 

대문에서 쉰다.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아닌, 그 때 골드베르크가 흘러나온다. 여기 대문 앞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미 문이 닫히고 길은 사라지고 없다. 저기 까맣게 타는 불빛이 길이 되는 건 아닐까.

 

커피를 붓는다. 밤에 쓰는 편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둠이 커피향처럼 퍼져나간다. 덜컹거리는 창문에 마음을 놓는다. 당선 소식을 받고 산책을 나간다. 눈발이 반갑다. 밀감장수가 파는 귤이 보인다. 귤보다 귤빛이 만져지는 시를 쓰고 싶다. 먹지 않아도 따스한 그 귤빛을 맛보고 싶다.

 

우선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정배, 윤미, 의주, 재호, 석진, 많은 힘이 되어준 성우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채규판 교수님과 정영길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강연호 교수님, 열심히 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실 거죠?

 

 

 

 

 

 

[심사평] 거친 행간 오늘보다 내일에 더 기대

 

시를 읽고 쓰지 않아도 시간은 잘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경제는 미세하게나마 성장한다. 시하고 상관없이 삶은 잘도 돌아간다. 그리 시적인 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놀라운 일이다. 이 땅을 마지막 시의 나라라고 불러도 지구인 중에 시비를 걸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시의 풍요와 다양성을 이번 심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 열여섯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이 중에서 류성훈, 강윤미, 김희정, 최설, 손현승, 이길상씨의 작품을 1차로 골랐다. 모두들 중요한 패를 하나씩은 움켜쥐고 있었다. 심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당선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논의했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갱신할 뒷심이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손현승씨의 시들은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시에 가한 바느질 솜씨를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선배 시인의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점도 지적되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 최설씨의 시는 시적 대상을 해석하려는 끈질긴 탐구심이 볼만했다.

 

그러나 사유를 서술하는 방식이 일방적이어서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길상씨의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는 때때로 거친 어휘와 난해한 이미지가 날것으로 드러나 있으나 속에서 올라온 어떤 찐한 것이 스며 있는 시이다. 자아가 세계를 통과할 때의 단절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일상 속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점을 좋게 읽었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것보다는 불안하고 거친 것을, 오늘의 시보다는 내일의 시를 택한 결과다. 축하한다. 이제 좋은 시인으로서 그가 응답할 차례다.

 

심사위원 황지우(왼쪽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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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변 / 이길상


역사엔 톱밥난로가 홀로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다
저탄장 탄가루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아침을 여는 길은 객지를 떠돈다
막장에 들어가는 반딧불들, 날개를 떨구면
검은 산엔 절망의 삽날이 꽂힐 뿐이다
등록금 낼 때쯤이면 아이들은 학교가 불 꺼진 빈집 같다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잠 못 이루며 출렁이는 삶이 거품으로 올라올 때
그 빈 공간 메우자고 떠난 아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 소식 궁금할 때마다 강물은 말이 없고
고요와 적막에 남은 논밭마저 드러눕는다
갈대처럼 함께 모여 살던 이웃들은 흔들리고 있는가
갈기 선 바람이 불자 희망의 불이 꺼진
길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
떡잎 같던 시간이 뿌리를 거둔다
시린 눈발에 하늘도 허기진 달을 내건다
달처럼 텅텅 울리는 마음은 철로로 놓여 먼 길 떠났을까
거죽만 남은 풍경은 주저앉아 빈 밭을 키우고
세간은 더 야위어 간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좌판에 햇살 가득 찰 날이 올까
아버지가 오실 길에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
겨울 그놈의 겨울이 또 눈과 바람을 데리고
무쇠처럼 달려오고 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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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전반적인 수준향상 우열가리기 힘들어 응모한 작품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시기일수록 문학은 그 결핍에 대한 보상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심사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수준의 향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사는 괴로우면서도 즐거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장창영, 김정미, 이승은, 이영옥, 이길상의 시편들이었다. 장창영의 작품은 시적 연륜이 만만치 않아 보였고 표현들 역시 안정되어 있었다. 특히 ‘황태덕장’ 같은 작품에서 “하늘 물어뜯으며 말라가는 수천의 목어떼” 같은 구절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 오히려 아쉬웠다. 이점은 김정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제부도’나 ‘밤의 장례식’ 등은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어서 도전의식이 부족해 보였다. 이승은의 작품들 중에서 ‘다림질을 하다가’는 생활 속에서 얻어진 소재를 뛰어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추상적인 표현들이 거슬렸고 거기다가 동봉한 작품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영옥과 이길상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이영옥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묵호항 여인숙’은 선자들이 놓치기 아까웠다. “내가 언제나 먼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묵호항이 아름다웠다는 부분이나, “형광들 불빛이 / 서로의 감정을 빤히 들여다보고” 같은 구절은 훌륭한 시적 표현이 단순히 능숙한 비유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시행이 너무 길게 늘어져 호흡에 문제가 있었다. 문장들을 적절히 끊을 수 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길상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거론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편차가 적어 믿음직스러웠고 섬세한 표현들 속에 삶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령 ‘연’에서 “한지 대신 벌판을 뼈대에 붙인들 어떠랴” 같은 표현이나, ‘철로변’에서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같은 구절은 수사의 익숙함을 뛰어넘는 따뜻한 시선이 드러나 있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새롭지 않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막상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선자들 사이에 이의는 없었다.

 

당선자를 포함하여 응모하신 분들의 계속적인 정진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김남곤, 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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