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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 움찔할 때 외 4편 / 안성군  

이른 아침 무에 들었던 

거무스름한 살얼음 


점퍼를 덮고 잠든 사람 

그 사람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푸릇한 발을 한참 바라본 적이 있다. 


햇살 들 때까지만 바라봐야지 

햇살에 무가 움찔할 때까지만 

바라보아야지 하며 

지켜본 적이 있다. 


동사(凍死), 제 계절에 죽지 못한 

철없는 주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는 구덩이에 묻혀 

노란 싹을 뚫는 봄을 기다리고 

생채기 많던 손을 골라내고 

흙 묻은 신발을 골라내던 

아무리 끌어 덮어도 

모자란 겨울밤이 있다. 


마치 웅크린 몸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나와 있던 

무의 파란 웃통을 본 적이 있다. 




집이 운다


한파주의보에도 

잠잠한 집 

바짝 웅크린 잠 같은 집 위로 

흰 눈이 내렸다. 


 그 사이 짬을 내어 풀린 한파 

웅크렸던 집이 

훌쩍훌쩍 

똑똑 운다. 

지붕 밑 주림을 

지붕 끝이 안다는 듯이 

적요하게 집이 운다. 


우는 집은 고아 같다 

어쩌다 화목한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망연하게 서서 울던 집 

을씨년스러운 집은 모두 단란(團欒)의 유품 같다. 

집 마당에서 떨고 있는 개 

개를 만져주는 푸르뎅뎅한 손 

두 귀가 한껏 넘어 간다. 


무럭무럭 조난신호 같은 연통 

그 난로 속으로 

한 토막 넣어 주고 싶은 

소주 반 병 

울던 집도 뚝 그치고 

유일한 소일엔 바람이 빠져 있다. 


하루의 끝자락은 

꾸덕꾸덕 힘이 세다. 






총체적인 총체 


엄마는 자주 

총체(總體)로 나를 때리곤 했다. 


엄마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화근인 나를 화풀이처럼 털어내곤 했다. 

나는 총체적 난국인 셈이다. 


엄마의 주특기는 

총체로 온 집 안 구석구석을 털어내는 일. 

나는 집안의 어디쯤에 

웅크리고 있는 구석일까 


엄마와 나는 서로의 근심 

 근심이 구석이라고 생각했다. 


총체는 구석만 만나면 

먼지만 만나면 

춤추는 듯 즐겁게 

분란을 일으켰다. 


먼지들의 대장도 못 되는 나는 

어느 꼬리를 닮은 털이범은 더욱 못 된다. 


엄마의 취미는 창문을 열고 

분란을 밖으로 털어내는 일 

분란이 다 빠져나간 내 방은 또 

을씨년스럽다. 







털신


그 집을 지나치다 

털이 수북한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언젠가 노인 한 분이 

저 털이 수북한 신발을 신고 

자꾸 나를 돌아보던 생각이 났다. 


불시에 사람과 맞닥뜨린 짐승이 

어둑한 저녁 쪽으로  사라지던 그 풍경 

사람과 짐승의 경계도 아직은 

살 만하다는 듯이 

저녁이면 불이 켜지고 

아침이면 밭은 기침 소리가 들리곤 했다. 


네 발과 두 발을 두고 

고민하는 듯 

한 사람의 생애가 기울어지고 

때로는 하늘이 넘치곤 했다. 


천천히 발부터 

짐승으로 변해가는 그 집의 노인 

어떤 걸음을 택할지 

고민하듯 천천히 걷고 있는 

털이 수북한  발이 자꾸 생각나는 것이다 








노는 땅 


우리 동네에는 노는 땅이 많다. 

생전의 할머니가 가끔 다녀오시던 

노구를 짜내어 흥겹게 춤추던 

관광버스 풍경처럼 노는 땅 많다. 

그런 노는 땅을 찾아내서 

같이 놀던 할머니 


노는 땅들은 바쁘다. 

종자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풀들 

온갖 곤충들부터 고양이까지 

누군가 버리고 간 가전제품 

환삼덩굴 줄기를 타고 신나게 논다 


논다. 라는 말엔 

감출 수 없는 흥겨움과 한적함이 동시에 있다. 

그런 노는 땅과 놀던 할머니 

지금은, 밑으로부터 여섯 칸 

우로 네 번째에서 무료하시다. 


비가 내리는 날 

질퍽질퍽 땅들은 잘도 논다 

찡그리거나 구겨지다 슬금슬금 펴지는 것들 

호미, 낫, 지팡이, 수레 

각종 농기구를 가지고 논다. 


노는 땅들은 오늘도 

우거지고 가지런해진다. 









[당선소감] 


  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시까지 끌고 가거나 끌고 와야 될 관계들과의 소통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름의 방식이라는 것이 있어 그 얄팍한 방식을 고집한 끝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한쪽 방향으로만 쏟아지는 밤, 새벽 틈새 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잠깐의 단잠에 들겠습니다. 어릴적부터 꿈꾸었던 것이 이렇게 부풀어 시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해 주신 심사 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믿고 기다려 주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부모님, 감사합니다. 다시 새로운 계획 앞에 선 성희에게도 힘내라는 말 전합니다. 넌 할 수 있다고 매일매일 응원해 준 준섭아, 고맙다. 그리고 같이 등단하자고 다독여 주고 어설픈 글들 많이 봐줬던 형석이 형, 형의 친절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시의 기초에 대해, 인간의 품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 임동확 교수님께 존경의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직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도 배워야 하고 써야 할게 너무 많은 저에게 시는 슬쩍 구석 한 편에 감춰두고 싶은 소중한 보물 상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 시를 가르치는 위치에 설 수 있다면, 이 진행중인 감정들을 나직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심사평] 


 올해 《실천문학》신인상에는 총 198명이 응모했으며, 예심을 거친 6명의 작품이 본심에서 논의되었다. 이번 신인상 심사를 통해 얻은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많은 응모자들이 이미 언어의 조탁자로서 뛰어난 시적 기술을 발휘했지만 과도한 외국어 및 외래어 사용, 지나친 관념어 남용, 관념적 사변 취향은 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고, 심사위원들을 다소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하루 씨의 작품들은 개성 있는 상상력과 담대한 시의 전개가 인상적인데,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구구절절한 문장들을 통해 오히려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핵심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조시현 씨는 미학적인 서사를 시에서 구현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이지만, 응모한 작품들 모두가 산문적일 뿐 아니라 비슷한 구조와 어조를 반복하고 있어 지루해질 우려가 있다. 장안아 씨의 시는 일상을 재발견하는 시선을 담고 있으며 리듬감 있게 읽히는 맛이 있다. 그러나 글쓴이의 신성한 착상을 시의 몸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좀 더 끈질긴 싸움이 필요할 것이다. 장주영 씨는 어떤 거대한 세계 앞에서도 훼손 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냈다. 그러나 역시 시 속에 너무 많은 '할 말'들을 욱여 넣음으로써 시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석범진 씨는 다체로운 주제와 소재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끌어올려 심사 위원들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전해 주었다. 다만 시의 주제의식을 더욱 집요하게 끝까지 펼쳐낸다면 더 큰 가능성을 가진 문청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안성군 씨의 시는 화려하지도 발랄하지도 않다. 하지만 편편의 시가 서정성을 갖고 자기만의 시선과 호흡을 견지하고 있다는 데서 남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는 근래에 우리 시단이 얼마나 소통 가능한 시에 목말라 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에 와 닿는 시는 어떤 것인가, 생활이 있고, 육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각성과 성찰을 가져다 주는 시를 기다린 심사 위원들에게 이 젊은 당선자의 시는 한겨울에 "삐죽 빠져나운 푸릇한 발"(무가 움찔할 때)처럼 선명하게 우리를 각성하게 했다.  

 또한 '조난 신호'같은 연통이 있고, '훌쩍훌쩍' 울기도 하는 집이지만 "하루의 끝자락은/꾸덕꾸덕 힘이 세다"(집이 울다)라는 표현을 통해 이 시인이 가진 결기,'꾸덕꾸덕'버티며 세상과 맞서는 복서와 같은 자세를 심사 위원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안성군 씨가 그려낸 시 속 주인공은 대개 반백수거나 노동자거나 노인이다. 안성군 씨는 그들을 응시하고 발견함으로써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끈끈한 동류의식을 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람이요, 어떤 위협앞에서도 자신의 서정과 역사를 수호하고자 하는 '문지기'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안성군 당선자의 새로 출발을 축하하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잇는 시인으로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신인상에 응모해 주신 많은 분들에겓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 심사위원 : 김은경, 이승하, 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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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식 식당 / 김은지


여자는 일본 가정식을 먹고

나는 여자의 먹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는 친절한 사람일까?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자는 표현이 서툰 사람이다

최근에 힘든 일을 잘 이겨냈다


아니 여자는 어떻지도 않고

나는 여자에 대해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수사자처럼

초목과 코끼리의 습도에 감응하는 모든 방식을

바꿔가고 있다

귓불을 누르며

삭제!


그릇에 오늘치의 온기가 나왔다

옆에 않은 사람은

온기를 빨리 먹고 나갔다


국그릇에 연보라색 꽃이 그러져 있고

나는 그 꽃의 이름을 모른다

꽃이 무엇인지 찾아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앉았을 때

내가 있는 그대로 대한 사람이

한 명 늘어났다







망고


학원은 다음날 폐업을 결정했다

오학년 승원이를 못 본다면 서운할 것이다

승원이가 공부하는 미국독립혁명은 1775년 부터 1783년 까지다

토머스 제퍼슨 옆에 앉은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만든 그 프랭클린일 줄은

승원이는 머리카락을 뽑는다

정수리에 피가 난 것을 본 것은 지난 가을이었는데 지금은 동전 크기만큼 두피가 보인다


오월이다

수학여행 소풍 죄다 취소되어 애들이 학원으로 온다

지금쯤이면 제주도 공항에 도착했을 텐데

아냐 이미 도착했지 바보야 일출봉 갔겠지

이런 거로 언성을 높이며 오 분만 놀게 해달라고 오 분 동안 재잘거린다


놀게 해줬더니 놀지는않고

사망자와 실종자와 구조자의 수를 외운다며 말을 시킨다

꿈에서 삼 층만 파도를 봤단

다화장실 문에 끼는 꿈을 꿨단다


올 들어 망고가 자주 보인다

크기가 작아서 산 적은 없었는데 트럭에 놓인 망고가 꽤 크다

조금만 더 자란다면 저 보드라운 껍질 속에 싱그러운 여름을 담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망고라니

가슴이 아파서 망고는 먹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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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 김해선


 내 팔목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나뭇가지 위에는 올빼미가 눈을 뜨고 앉아 있어요 올빼미는 몸에 새겨진 나뭇가지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줘요 문을 지나야 신에게 갈 수 있어요 그 나무가 없으면 절벽 밑으로 밀어버려요 나는 나무에 새겨진 이야기를 믿으며 뿌리마다 짙은 녹색을 새기고 있어요


 안에는 날카로운 모서리와 각이 너무 많아요, 밖이 좋아요 안에서 이미 자리 잡은 입술들의 소리


 나무도 종말을 믿는다고 해요 수십 개의 목을 흔들며 신의 소리를 흉내 내며 선명해지는 흉터를 돌아봐요


 내게 뻗어와요 가슴을 지나 목을 움켜쥐고 서서히 몸을 빨아들여요 올빼미가 노란 불을 켜고 구석구석 비추고 있어요 더 많은 나무들을 불러줘요 등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비겁해요


 지워지길 기다리며 문이 굴러가요 시간을 놓치고 붉은 독 안에서 숨어 있는 씨앗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색상을 따라 바다가 짙어가요 며칠째 죽어 있다 일어났어요
신들이 녹아요







일몰


  눈동자 속으로 밤과 낮이 들락거려요 틈을 밀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채우고 파도 소리를 끼워보고 얼어붙은 길바닥을 비춰봐요 어둠속을 뚫고 내려가면 일몰의 빛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그 빛을 잡고 있는 손자국들이 쌓여 무엇을 말하는지 놓쳐버린 기차 시간이 손자국 아래서 내려오고 있어요 가까이 갈 수 없어요 만지면 이글거려요 불꽃으로 가득 찬 구멍들 목이 없는 동그라미 안으로 빨려들어 가요 산 자와 죽은 자의 소리가 모두 친근해요 날카롭지 않아요


  눈동자는 어디에 있나요...... 가시처럼 뾰족한 꽃들이 말을 걸어요 남아 있는 김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실크 코끼리를 만들고 있어요 붉은 천으로 코끼리 긴 코를 감고 네 개의 다리에는 초록 천으로 신발은 은박으로 씌울 거예요 우리는 가고 있어요 깊은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땅을 밟고 신맛이 돌아요







이미테이션 게임*


  스무 살이 되기 며칠 전 거짓말처럼 나를 낳았다는 남자가 말을 해요 내가 울 때마다 작은 발을 간질이면 ‘사과 견디기 사과 견디기’ 이상한 소리를 하며 계속 웃었다고 해요


  남자는 어린 나에게 매일 ‘사과 던지기 게임’을 보여주고 가르쳤어요 나의 작은 손과 발이 마구마구 사과 던지기 판을 두드렸다고 해요 게임은 무럭무럭 자라나 사과 속에서 싹을 틔우고 기지개를 켜며 사과 향기로 누구를 낳을까 망설이다 ‘사과 견디기’ 오타가 났다고 해요


  나는 스무 살이 되기 며칠 전 긴 머리카락을 사과처럼 돌돌 말아, 사과로 태어난 듯 머리 던지기를 반복했어요 구름 위에 누워 거짓말 단검을 어디에 놔둘까** 고민하다 친구들이 지루하다고 모두 가버렸어요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않아요 나는 지나가요 눈을 감고 있는 눈꺼풀 속에서 작은 심장들이 굴러 나와요 물방울 같아요 서로 부딪쳐요 보이지 않아요 바람이 분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 영화 제목.
** 파블로 네루다의 시.






더빙


  점점 어두워져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나는 나무 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말을 해요 나무속으로 새들이 내려오면 몇 번이나 인사를 해야 하나요 예절을 알고 싶어요 나무 안에서 작은 사람이 빠져나와요 우리는 멈추지 않아요 거울이 되든지 애벌레로 변하든지 상관없어요 반딧불처럼 깜박거리며 농구대 밑에는 아직도 눈이 얼어 있어요 아이들이 신문지에 불을 붙여 겨울 놀이를 해요 서로에게 불을 던지며 여자가 되고 형이 되고 군산을 찾아요 검은 나무에게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려요 그 소리를 입고 싶어요 길을 놓치고 건널목을 몇 개나 지나왔는지 신호를 못 봤어요 우리는 눈 밑에 쌓여 있어요 지금도 자고 있나요 삼킬 수 없어요 어디가 시작인가요 마른 바람 위에 군산을 덧입히는 소리 납작해지지 않아요 등도 달아나지 않아요







가리옷 유다의 변명


  그것은 너의 말이다, 마지막 빵조각을 입에 넣는 나를 보고 느닷없이 말하는 너, 혀 밑으로 숨긴 말 목젖 아래로 밀어 넣는 나의 배반을 알아차린 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그 거짓말 뒤에 숨어 있다 입술 위에 검은 점 하나 붙이고 새 옷으로 바꿔 입는다 오지 않는 너 사라진 너를 찾기 위해 매일 옷깃을 세우고 창문을 닦는다 이 또한 거짓말이다 머리는 빗지 않고 창문엔 먼지가 쌓여 있다 나는 너를 태워서 화장시켰다 흰 단지에 담긴 너를 목젖 밑으로 밀어 넣는다 매일매일 밥을 삼키며 새 옷을 입고 새 옷을 찢어버리는 시간을 밀어 넣는다 나무들도 창문을 뚫고 들어오고 싶어 한다 불빛과 함께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많이 놀 수 있다


  봐, 봐, 나였던 너는 어디에 있는 거니*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팔목에 그림을 그리는 너 생전에는 무덤을 파는 사람, 꿈속에서 팔지를 주워 담는다 천으로 문지를수록 작은 소리가 난다 새들이 박혀 있는 팔지를 옮겨 그린다 너의 팔목은 수시로 나타난다 나를 감는다


  늪이 버려진다


  식탁 위에 가득 쌓인다


* 파블로 네루다의 시.






[당선소감]


  6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길었다. 밤 열 시가 지나도 저녁 빛이 남아 있는 스페인 산골을 걷고, 먹고, 자고 그다음 날 새벽부터 걷고, 먹고, 자고 반복하는 40여 일 산티아고 여정이 나에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뙤약볕을 걸으면서 나를 버리기, 내 안의 것을 비우기 위해 이 길을 걷는다는 소망들이 탁탁 찍는 스틱 소리와 함께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나의 이 글에 대한 절망과 대면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없는 나의 글,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나의 글쓰기와 동행하며 걷고 싶었다.
  어느 날 이름이 긴 스페인 산골 마을 가게에서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나오다 큰 나무 뒤에 있는 낡은 성당과 마주쳤다. 문을 열고 기웃거리다 슬그머니 들어갔다. 금이 간 천장에 흰 회(灰)가 칠해져 있었고 낡은 의자와 습기 찬 바닥에 찬기가 돌았다. 반백의 노수사님과 파란 눈의 젊은 수사님이 알 수 없는 기도문을 반복해서 바치고 있었다. 깊은 산골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일하고...... 저녁 기도를 매일 바치는 수도자들처럼, 나의 글쓰기도 남들이 내 글을 읽어주든 안 읽어주든 그런 관심사에서 벗어나 자유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바나나 두 개, 청사과 한 알, 생수병이 든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오후 아홉 시 삼십오 분, 긴 해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실천문학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아이들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서운함도 절망도 모두 녹아서 하얗게 변한 한 조각 밀떡의 형상이 나의 왼 손바닥 안에 멈춰 있었다. 계속 걷기만 하는 단순함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절망의 끝자락에서 만난 작은 조각 혀에 닿으면 핏방울이 될 것 같은 형상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이해해주시고 끝없이 기다려주시고 용기를 주신 이원 선생님과 이승하 선생님, 최정례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내 친구 안희연, 김기형, 서기원 신부님과 까미노 위에서 만난 토론토 조지환 베드로 학사님께도 깊이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너는 늦었어, 이제 그만해’ 내 안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나를 영원히 지지해주는 가족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심사평] 


  ‘실천문학’ 시와 ‘신인상’ 시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다른 질문들을 끄집어낸다. 실천문학의 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한국 시의 영토 어떤 부분을 개척하고 탐사했는가. 또한 실천문학 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아니 어떤 모습일 필요가 있는가. 이와 같은 고민이 2015 실천문학 신인상 시를 선정하는 데 고려되기를 기대하며 투고작들과 마주했다.
 170여 분이 보내준 원고가 모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렸으나 대개의 시 안에는 저마다 다른 개성이 담겨 있었다. 시의 말들은 성향에 따라 그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었다. 쉽고 편해 보이는 말은 없었다. 선자들은 선정 과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데에 먼저 합의했다.
  집중적으로 논의한 원고는 세 분의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공> 외 9편, <장화홍련뎐> 외 9편, <문신> 외 10편. 이들 원고에는 허투루 쓴 말이 없었으며 따라서 쉽게 지나칠 말이 없었다. 심사자들의 뜻이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견해가 달라서가 아니었다. 세 분에 대한 시각은 비슷했다. 문제는 시 세계가 모두 다르고 그것들이 각자 귀 기울일 만한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데에 있었다.
  어렵게 한 분의 시편들에 대한 논의를 멈추었다. <피할 수 없는 공> 외 9편은 감각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언어가 이룬 세계는 정교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런데 그 세계와 다른 세계의 통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실천문학의 시가 필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 아닐까.
  <장화홍련뎐> 외 9편에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간혹 들렸다. 그러나 다양한 체험과 유연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넓히려 한 점이 돋보였다. <문신> 외 10편에서는 ‘시적인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단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집요한 내면의 탐사와 미지를 향한 모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심사자들은 고민했다. 상반된 개성을 지닌 두 세계 중 어느 하나를 쉽게 선택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둘 다 실천문학이 선보여야 하는 세계 아닌가. 두 분 모두를 선정했다.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근. 김종훈.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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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뎐 / 안은숙


  빵틀 없이도 구울 수 있는 빵은
  삼단으로 나뉘어 땋은 할라빵


  권선징악은 틀이 아니라 맛의 미담(美談)이므로 선과 악은 발효의 차이다. 미지근한 물에 밀가루와 이스트로 스펀지 반죽을 하면 장화가 부풀고 첨가물이 필요한 넌 아직 홍련.


  한 어머니가 두 딸의 머리를 땋고 있다. 머리를 엉켜놓는다. 엉킨 머리카락은 발효된 반죽 같다. 숨죽인 장화와 홍련은 아빠가 오길 기다린다.


  털이 있는 곳마다 부푼다.


  여섯 갈래 반죽이 된 친절과 성숙은 여섯 갈래 밧줄처럼 갈라진다. 가운데 머리를 잡고 오른편 머리채를 왼편으로 넘기면 왼편 머리채는 오른쪽으로 넘어간다. 이불 속에선 다리 잘린 쥐가 꼬리를 찾고.


  머리채 어디에 저렇게 봉긋 솟은 발효가 들어 있었을까. 치렁치렁한 머리채가 부푸는 나이, 엇갈린 정리에 연못이 자라고 있다.

 

  홍련과 장화는 꿈의 자매,
  쥐가 머리채를 타고 오르내린다.


  할라빵이 끊임없이 구워져 나오는 연못, 미지근한 물살에 누군가
  알람을 던지면 묶여 있는 머리채가 파문으로 풀어진다.


  권선징악, 동화는 노릇하게 구워진다.
  흉담은 겉장을 찢고 나오고 미담은 여전히 책 속에 있다.








별지


  얇은 별지 한 장,


  어디에 붙일까 고민하는 동안 날짜는 고정되어가
  주소들은 고딕체가 되어가지


  처음에 생기는 감정은 어느 곳에건 붙일 수 있는 감정, 쉽게 뜯어질 수도 쉽게 구겨질 수도 있는 감정

 

  점력(粘力)은 감정의 별지다
  그러므로
  굳이 본문의 눈을 피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골라낸 말들로 멋을 낸
  꼬리 잘린 연애의 문장들


  본문의 글자들을 피해 만들어낸 글자들로 읽을 것, 한 번도 지은적 없는 표정으로 읽을 것

 

  별도의 감정은 재질부터 다르다
  제일 먼저 물드는 잎은 별지이고,
  가장 늦게 물드는 잎도 별지다
  두 장 이상이면 넘기는 침이 묻는다


  뒤가 생긴다
  뒤가 생긴다는 것은 비밀을 뒤에 둔다는 것이고
  눈속임을 두어 장 더 끼워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별지의 답장은 별지이고
  숨어서 가는 한때이다.








빨간 서재


  가지런히 벗어놓은 옷들보다 헝클어진 일기가 좋아. 황급한 방, 서재의 책들을 파르륵 넘기다 떨어진 몇 개의 글자들로 야설의 제목을 정해도 좋아. 빈방이지만 두근거리는 거주가 있어 좋아.


  우리는 설레는 촌수. 언니의 방향은 남남이고 어느 방향은 부정이 되는 관계. 아무도 모르는 촌수.

 

  누군가 훔쳐보고 간 제목들. 겉장의 빗장을 열어두고 가는 내용들엔 꼴깍, 침이 넘어가는 대목이 참 많아 한 며칠 그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설령, 접혀 있는 페이지가 많은 책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등장인물로 갇히고도 싶은 책.

 

  책갈피에 숨겨둔 사진, 질투에 여러 권의 책에 꽂기도 해. 나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빨간 다리의 바깥 여자. 짧은 은밀함과 긴 귀가로 비틀거리는 거짓을 연출하기도 하는 당신의 촌수.


  어느 집이건 빨간 촌수는 있고


  문 안쪽이 바깥이 되는 바깥의 방, 밧장은 안쪽이 되고 자물쇠는 바깥이 되는 곳. 언니를 지나면 열리는 빨간 서재.








바람은 가르마를 잘 타지


바람은 가르마를 능숙하게 잘 타지
풀밭 가르마를 타는 바람


나는 풀밭의 태생
나는 가르마를 잘 못 타는
엄마의 딸
당신의 결정을 한 번도 머리에 얹은 적 없지


머리카락의 경도
바람이 머리를 잘 땋는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
밀반죽 여섯 갈래를 땋고 있는 빵집 주인
할라빵을 내어놓고 있지
머리카락은 언제나 발효되어 있지


나의 유희는 나누어진 중간에 있지
나는 뛰면서 나의 반을 확인해
중심에서 기우뚱거리려 노력해, 나는
바람은 중심을 알려주지


우리는 나누어진 사이를 반드시 만들려고 하지
이것은 가장 안락한 형태
당신은 나의 찡그린 한쪽으로 들어와
그 후로 당신은 나를 늘 찡그리게 만들었지
당신이 반으로 갈라지고 싶거든
바람에게 청탁해


우리 동네 미장원 언니 가르마를 잘 타지만 이혼을 했지
바람이 안 생기는 가르마가 두피를 버리고
머릿속으로 숨어버렸지


아이들은 가르마에서 태어나지
정확하게 반이 나뉘어져 있나요?
내가 처음으로 들은 엄마의 말이었지.









인형양초 공장 아가씨


  성탄절을 떠올리거나 촛대를 떠올리는 옷차림의 아가씨가 있었어요. 흔한 일은 아니죠. 해가 기울면 목을 심지처럼 세우고 골목을 지나 양초 공장으로 출근을 했죠. 앞모습은 밝고 뒤태는 흔들거렸죠. 계집아이들은 인형양초의 틀이 되고 싶어 했죠.

 

  설레는 심지는 불꽃을 흔들며 타오르죠. 아가씨의 발밑은 늘 주름치마처럼 흘러내린 촛농으로 가득했어요. 갈래갈래 흘린 웃음으로 바닥이 미끄러웠죠. 오빠들은 저녁 무렵이 되면 안달이 났어요. 성냥불처럼 들떴지요

 

  정전이 잦은 변두리 동네, 그런 날이면 그녀는 더욱 불꽃을 살랑거렸죠. 원래 소문은 흔들리며 타는 촛불 같겠죠. 우리는 그 소문을 흠모했지요. 뜨거운 체온의 아가씨가 노크를 하면 자취방 문이 열리고, 남자들은 녹아 사라진다는 빨간 표지를 한 얇은 소문.

 

  아가씨가 사라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오빠들. 골목은 아가씨가 녹인 흔적으로 미끄러웠지요. 가연성 아가씨, 인형양초처럼 녹아내리고 싶던 아가씨. 말랑말랑한 마음을 굳힌 파라핀 같은 남자가 있었지만 소문은 너무 발화성이 짙고. 달이 반쯤 녹은 날, 순식간에 불에 타고 말았지요. 아가씨가 심지처럼 그 속에서 같이 타고 있었을까요?

 

  흘러내리는 방식으로 아름다웠던 아가씨, 양초는 불빛이 꺼져도 흔적은 남아 있지요. 지금은 마을마저도 흔적만 남았지만요.









[당선소감]


  내겐 내 편의 엄마가 없다. 계모들에겐 미워서 더 예쁜 딸들이 있고 그 둘은 한편이지만 미워하는 엄마도 예뻐하는 엄마도 없는 나는 옹호받는 생이 아니다. 권선징악, 선한 것들은 혼자이고 죽을힘을 다해 죽지 않고 살아난다.

  장화는 오래전에 버린 내 편. 언제부터인지 혼자인 장화보다는 내 편이 많은 악인이 더 좋았다.

  제대로 갖춘 것이 없어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나는 비평과 비판이 넘치는 창작실 출신, 한낱 소아병적 시를 썼던 기능공에 불과했다. 혐오의 문장들을 지적받고 비판받는 합평이 시를 앙다물게 했다. 모두 버리라고 했던 악역들이 결국, 내 편이 되어주었다.

  열어젖히고 나가면 언제나 변방이었다. 자주 주춤거렸고 주춤거려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갖고 싶은 것들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놓아버리는 것이라는 말이 더 달콤했다.

  어디쯤, 얼마만큼, 어느 언저리에 서 있는 걸까. 나는 늘 나를 의심했다. 그래서 쓴다. 나의 심장이 어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내 안에 갇혀 있던 이 팽팽한 긴장과 무수한 언어의 속성들이 휴경(休耕)에서 벗어나 밖으로 튀어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기다린다. 독사과를 들고 찾아올 왕비를, 구멍 난 독에 하루 종일 물을 붓게 할 계모를, 부엌 아궁이 앞에서 일만 해야 나를 인정해줄 새엄마를. 그러나 내겐 아직 씻지 않은 발을 찾아올 왕자도, 유리 구두도 없다.

  실천문학사와 김근, 김종훈, 황규관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글을 쓰는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존경하는 스승님들, 함께 창작 활동을 했던 승희 님과 두두팀, 혜순, 순영, 금화, 미선, 해정에게 고마운 마음을, 마지막으로 성현 님을 비롯한 건대 대학원 친구들, 고대 CarPe Diem 멤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딸들, 하영이와 하린이, 장화 같은 하은이와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의 악역을 맡은 김상근 씨, Good luck! 나는 악역들을 사랑했고 사랑하려 한다.







[심사평] 


  ‘실천문학’ 시와 ‘신인상’ 시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다른 질문들을 끄집어낸다. 실천문학의 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한국 시의 영토 어떤 부분을 개척하고 탐사했는가. 또한 실천문학 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아니 어떤 모습일 필요가 있는가. 이와 같은 고민이 2015 실천문학 신인상 시를 선정하는 데 고려되기를 기대하며 투고작들과 마주했다.
 170여 분이 보내준 원고가 모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렸으나 대개의 시 안에는 저마다 다른 개성이 담겨 있었다. 시의 말들은 성향에 따라 그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었다. 쉽고 편해 보이는 말은 없었다. 선자들은 선정 과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데에 먼저 합의했다.
  집중적으로 논의한 원고는 세 분의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공> 외 9편, <장화홍련뎐> 외 9편, <문신> 외 10편. 이들 원고에는 허투루 쓴 말이 없었으며 따라서 쉽게 지나칠 말이 없었다. 심사자들의 뜻이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견해가 달라서가 아니었다. 세 분에 대한 시각은 비슷했다. 문제는 시 세계가 모두 다르고 그것들이 각자 귀 기울일 만한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데에 있었다.
  어렵게 한 분의 시편들에 대한 논의를 멈추었다. <피할 수 없는 공> 외 9편은 감각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언어가 이룬 세계는 정교하면서도 섬세했다. 그런데 그 세계와 다른 세계의 통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실천문학의 시가 필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 아닐까.
  <장화홍련뎐> 외 9편에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간혹 들렸다. 그러나 다양한 체험과 유연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넓히려 한 점이 돋보였다. <문신> 외 10편에서는 ‘시적인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단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집요한 내면의 탐사와 미지를 향한 모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심사자들은 고민했다. 상반된 개성을 지닌 두 세계 중 어느 하나를 쉽게 선택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둘 다 실천문학이 선보여야 하는 세계 아닌가. 두 분 모두를 선정했다.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근. 김종훈.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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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테나 외 4편 / 전욱진

 

   지금껏 옥상에서 살았는데 녹슨 손잡이가 달린 그림자가 가끔 뛰쳐나왔다. 지구의 출근 제도는 아마 태양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아침엔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너는 오랫동안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다. 뼈가 수신한 채널 하나를 종일 보았다. 누가 보든 상관없이 방영되는 비정규 채널 아랫집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잠은 간단한 음소거였다. 너는 리모컨을 찾으러 갔다 돌아오지 않는다. 뼈가 구겨질 때마다 분명한 악몽을 꿨다. 이 세상 모든 옥상의 흐린 내일에 관하여 뼈는 지금 공중을 수신하고 있다. 그림자가 도시와 한 몸이 되자 바쁘게 혈관을 통과하는 자동차 불빛. 내일이면 장기(臟器)들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이다. 내 그림자에서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철거해야 하는 감정들이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옥상의 구식 안테나에 새들이 착륙했다. 이곳이 경유지인 것을 너무 늦게 눈치챈다.

 

 




 

 

  줄 타는 옷

 

   엄마는 마당을 가로질러 줄을 매고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옷가지들이 줄을 탔다.

 

   맑게 갠 날을 잡아당기면 검고 긴 줄이 팽팽했다. 나는 그 줄을 밟고 옷가지들의 그림자 위에서 무등을 타고 놀았는데 눈을 뜨니 나는 객지(客地) 위였다. 그때부터 자오선을 마음으로 가졌다. 칼자국을 밟고 놀았던 발로 줄을 탔다. 칼의 주인은 기우뚱거리는 중심, 몸을 흔들 뿐이었다.

 

   어쩌다 집에 들르면 엄마는 객지를 빨아 또다시 긴 줄 위에 널었다. 실패한 어름사니는 빨랫줄만 봐도 현기증을 느낀다. 상의와 하의는 이미 경지에 오른 듯 편해 보이지만 그건 내가 나의 관객일 때다. 툭툭 털어 옷을 걷으면 발목 근처나 소매가 파리하다.

 

   두 개의 극. 양쪽에 묶인 것들은 흔들린다. 줄을 타는 해. 그림자가 섞이는 줄 위 곡예사들이 마른다. 밥처럼 차가운 날씨다. 몸이 다 마를 때까지 망중한 없던 바람. 텅 빈 빨랫줄에 근황을 널어놓는다. 기시감은 펄럭거리면서 말라간다.

 

   그림자가 없는 날은 공연하기가 꺼려진다. 미신은 늘 미끄럽다. 그런 날은 모든 줄이 외줄이 되었다. 줄을 탈 때 바닥에 허우적대는 내 그림자를 동경했다. 무수한 균형들을 털어낸 몸이 마른 광대가 될 수 있었다. 곧 얼음 위를 걷는 계절.

 

   빗방울 떨어지고 객지에서 내가 나를 갠다.

 

 





 

왜소행성 134340

  

이 겨울의 상상도에는 적설량이 없다

회색을 세 들인 집에게 녹지말자녹지말자 속삭인다.

퇴출당한 아버지와 나는 명왕성 아니,

왜소행성 134340으로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

 

집은 ㄱ을 돌아 ㄴ에 닿기 전 네 번째 달 아래에 끼여 있다.

지나친 구멍가게의 남은 유통기한을 계산할 즈음

안개가 ㄱㄴ을 채우면 명왕성의 밥에선 소독약 맛이 난다.

충동들이 문득 남산타워를 볼 때

유령이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검버섯 대신 눈꽃이 핀 할머니는 벽에다 하얀 점을 그리곤 태양이라 하셨다.

모퉁이들이 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고

창문들이 생겨났다.

 

네 개의 달이 일시에 소등하고 의혹은 태양과 더 멀어진다.

입김과 한 방을 썼다.

대기권에는 여전히 연탄가스 냄새가 날 거라고 동생은 믿고 있고

목 없는 여자와 짧은 연애를 했다

같이 있어만 줘 고백은 지구의 궤도를 닮아 완전히 둥글었다.

머리 아픈 숫자와 기호들로 변명을 만들고

소행성의 유형 기간은 줄지 않았다

현실계와 59억 킬로미터 바깥에서 달이 되는 꿈을 꾸다 글썽이는 해안에서 멀어지면

그제야 내가 달이 아닌 썰물임을 깨닫는다.

 

담벼락의 추문처럼 적중하는,

ㄱㄴ들이 모여 모퉁이가 되는 이 야윈 행성의 경사진 종점에서 제일 밝은 별을 꼬집는다.

밤에 목이 말라 창문을 핥을 때

흩날리는 궤도 속에서 하나둘 명왕성을 센다.  

 

 





 

  어우야담 

 

   보낸 편지는 자꾸만 되돌아왔다.

   깨어나면 다시 잠들 수 없는 지병을 가진 당신,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헤어진 애인들이 침대 밑을 기어 나오기 전에

   당신의 그림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당신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소지를 잊은 편지가 되는 것

   불안을 심장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홉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키우는 중년의 남자부터 기침약 공장에서 일하지만 늘 기침을 달고 사는 소녀 슬퍼하는 개를 닮은 수습 수의사 요즘 면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노인 잃어버린 발뒤꿈치를 찾아 배회하는 아가씨 가로등에 붙은 청테이프를 매미라고 우기는 꼬마까지 모두 같은 노래를 흥얼거린다.

 

   여러 개의 쇠구슬이 일정하게 부딪히는 심장 소리

   어쩌면 이미 뜯어진 무언가를 봉합하는 재봉틀 소리

   아침은 고장 난 자전거라는 듯

   지붕 위 암탉을 꺾어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종족의 축제엔 금속을 먹는 풍습이 있다.

 

   토끼 우리 반대편 당신이 사는 집

   그림자는 당신을 기다리다 먼저 잠들었다.

   달은 떠나고 달빛만 남아 있다 토끼들이 전부 사라졌다.

   마을의 풍향계는 오후의 바람과 맞바꿨다.

   당신은 지금껏 깨어난 적 없다.

 

 




 

중국 속담

- 부족한 한 개의 손가락과 남겨진 귀

  

여섯 개의 귀로 저녁이 드나든다.

태양의 뒷덜미가 점점 늘어나고 천막 꼭대기에서 지는 해

선잠에선 불타는 동쪽을 꿈으로 꾼다.

내 시간은 늘 앞에 있다.

괴상한 꽃으로 머릴 반쯤 덮은

말이 문득 여섯 갈래로 나뉘는 장면들 그리고

탄성과 조소, 혐오를 가지고

저글링을 하는 여덟 시.

 

손가락들을 따라 마을을 떠도는 나는

귀가 많은 지붕

배고픈 날 뛰어가는 푸른 구름을 잡아서 빨아먹거나

내겐 있지도 않은 이름을 만들어 먹었다.

해를 따라 지는 꽃의 꽃말로

일요일의 악담을 만들었다.

 

마을은 뒤통수들이 살고 있다.

전날 모아놓은 손가락들 뜯어 먹었다.

그러다 잠에 들면 속담처럼 눈을 뜬 새벽 비가

내 옆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쇠약한 몸을 반기는 귀와 손가락

젖은 몸을 채 말리기도 전 천막을 나온다.

땅거미에 쫓기던 달팽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가고

착각한 바람과 이정표가 울렁거린다.

여덟 번의 종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여섯 개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해를 따라 꽃이 진다는, 누군가가 중국 속담을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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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법칙 / 채길우

  

아버지는 내게서 빌려간 사만 삼천 원을 오만 원으로 갚아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만 원을 되돌려주고

그는 내게 오천 원을 다시 주고

나는 그에게 삼천 원을 내준다

 

우리는 조금씩 더 관대하게

너무 산술적이지 않도록

서로에게 모른 척을 해준다

에누리 없이 다가가

손 없이 건네는 잔돈들로

언젠가는 이 놀이가 지겨워지겠지

더 작은 것으로 나뉘지 않는

당연하고 지루한 사칙연산으로

지난날의 총합들이 우리를 계산해준다면

평균이 영일 때

우리는 겹쳐 있을까

아예 몰랐던 사이보다 멀어져 있을까

 

아버지는 영이 될 수 없는 분모

나는 그 위에 올라선다

 

아버지가 커지면 전체가 작아지고

내가 커지면 흔들거리는 생활 속에서

최대 최소의 공약수와 공배수를 따져가며

나이를 먹는 동안

우리는 닮고 닳은 각자의 수식들을

피부로 만든 연습장에 기록하고 쪽수를 넘겨왔다

 

서로가 약분되어

더 작은 것을 가지지 못할 때

내게 아이가 생기겠지

아버지와 아이 사이가 한없는 점들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분을 긋고

나는 아버지에게서 내려온다

그리고 영은 될 수 없는 분모가 된다

 

아버지는 이제 허리가 휘고

흔적뿐인 분자가 비어

값은 거의 영에 가깝다

아버지에게 아이를 업히면

연약한 체중에도 휘청한다

아이는 계속 자랄 것이고

무용해진 지폐를 찢듯

얇고 가벼운 몸의 몫을 거스르며

삶도 나머지를 살아가게 된다

 

열 명의 인물이 모여

다른 한 위인의 동일한 가치가 되는

그런 수학은 잘해본 적 없지만

아이 열을 합해선 왜 한 아버지가 될 수 없는지

열 명의 아이를 원해도

어째서 아버지 열 명은 가질 수 없는지

내가 정말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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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긂은 / 허은실


 아이 가진 여자는 둥글다 젖가슴은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 알은 둥글다

살구는 둥글다 살구의 씨는 둥글다 씨방은 둥글다 밥알은 둥글다 별은

둥글다 물은 둥글다 '응'은 둥글다 그 밤 당신이 헤엄쳐 들어간 난자는

둥글다


멀리까지 굴러가기 위해

굴러가서 먹이기 위해


내가 사랑, 이라고 발음할 때

굴러가려고 둥글게 말린 혀가

입천장을 차고 나간다

나가서 너에게 굴러간다


둥긂은 입 맞추고 싶고 둥긂은 안고 뒹굴고 싶고 둥긂은

들어가 눕고 싶다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사랑이 된다

종내는 무덤의 둥긂으로

우리는 다른 씨앗이 된다

0이 된다


제 속을 다 파내버린 후에

다른 것을 퍼내는

누런 바가지

부엌 한구석에 엎디어 쉬고 있는 엉덩이는

둥글다









물이 올 때 / 허은실



풀벌레들 바람에 숨을 참는다


물이 부푼다
달이 큰 숨을 부려놓는다


눈썹까지 차오르는 웅얼거림
물은 홀릴 듯 고요하다


울렁이는 물금 따라 고둥들이 기어오를 때
새들은 저녁으로 가나
남겨진 날개를 따라가는 구름 지워지고
물은 나를 데려 어디로 가려는가

 
물이 물을 들이는 저녁의 멀미
저 물이 나를 삼킨다
자다 깬 아이가 운다


이런 종류의 멀미를 기억한다
지상의 소리들 먼 곳으로 가고
나무들 제 속의 어둠을 마당에 홀릴 때
불리운 듯 마루에 나와 앉아 울던
물금이 처음 생긴 저녁

 
물금을 새로 그으며
어린 고둥을 기르는 것은
자신의 수위를 견디는 일

 
숭어가 솟는 저녁이다
골목에서 사람들은 제 이름을 살다 가고
꼬리를 늘어뜨린 짐승들은 서성인다
하현을 닮은 둥근 발꿈치
맨발이 시리다
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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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d Bird / 박찬세

 

자라는 종양을 보며 웃는 짐승을 본 적 있나요
새들이 허공에서 벗어나려고 퍼득거립니다
물오리들은 얼룩진 강의 지퍼를 열고 동전을 꺼냅니다
꺼낸 동전을 꿀꺽 삼킵니다
내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꿈을 꾸면 새가 된다는 전설을 금방 지어내봅니다
얘,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꿈을 꾸면 새가 된대
저 소름 돋는 부리 좀 봐
유리창이 나뭇가지에 내 얼굴을 걸어놓습니다
걸린 얼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와 지저귑니다
이렇게 꼭 맞는 방은 처음입니다
문이 없는 방을 어떻게 나서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똑 똑 밖에 누구 없나요
얘야, 문은 언제나 너였단다
뒤통수를 관통한 칼이 문이 되다니!
젖을 먹이는 새의 전설을 금방 지어내 봅니다
얘, 젖을 먹이는 새가 있대
저 깃털 사이에 삐죽 나온 젖꼭지 좀 봐
부리로 쪼아 먹는 젖에선 피 냄새가 납니다
엄마는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립니다
북극곰이 물개를 물어뜯습니다
허연 하늘이 핏물로 더럽혀집니다
나는 그녀의 내부였단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밤의 나그네 / 박찬세

 

  호랑지빠귀가 운다


  휘-----------이
  부리 끝에서
  휘-----------이
  부리 끝으로
  밤이 그네를 탄다
  너의 부리에서 태어난 바람이 나의 부리에서 죽는다

 

   새의 울음 속에 갈피 된 편지를 펴 보는 밤이다


  산을 오르며 지내고 있어 산새에게 너의 안부를 묻곤해 미안, 돌팔매질을 했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초록이라는 말 미안,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은 아닌 걸 산에서 보았어


  밤에 그네를 타는 너의 울음 속에 초록이 돋고
  초록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부러진 발톱 속으로 명이 다한 별들이 몸을 숨긴다
  그믐달은 밤의 장단지에 찍힌 그네 자국이라고 너는 말한다
  기둥에 돌돌 말린 그네 아래서 그믐달이 제 그림자를 그린다


  이쪽과 저쪽으로 새들은 멀어져갔지만
  발자국은 부리 모양을 하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골목의 표정 / 박찬세

 

딱딱해요 툭, 툭 부러지는 골목은
열두 시의 그림자에서 다섯 시의 그림자로 기울어져 가요
아직까지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툭, 골목이 뱉어 낸 비둘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고
툭, 골목이 뱉어 낸 개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골목이 부러진 곳에서 사라져요
아직도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휴지조각들은 왜 잔뜩 찡그리고 벽 쪽으로 굴러가나요
발목이 부러진 소녀가 보는 하늘은 어제의 하늘
골목은 가끔씩 조용합니다
불행해지고 싶어요
골목이 숨긴 소리들은 간지러워서
어느 순간 빵! 하고 터집니다
창문들의 닫힌 입속으로 똑같은 풍경이 들어가고
커튼은 말이 없습니다
미칠 것 같아요
엄마는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뽑아 버리고 싶은 건 나였겠죠
골목은 왜 같은 표정인가요,
골목이 소녀를 보여 줍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잠깐 숨기는 동안.
소녀가 단 한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골목은 소녀 같은 표정이었을까요

 






 


냉장고 속 크레바스 / 박찬세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전화기를 만진다
누군가 울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송신되지 못하는 말들이 손끝에서 우둘두둘 돋아난다


아버지가 크레바스 속으로 사라지던 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어머니는 밤새 이불을 덮어 쓰고 울었다
크레바스는 왜 비명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들썩이는 이불더미 속에서 냉장고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며 크레바스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발명가들은 물건을 만들 때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습성을 답습한다는 데
당신을 오래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젖은 눈 속에 뒷모습을 담아두는 건
말을 배우기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풍습이다
냉장고를 들어 낼 때면 웅크린 모습으로 남아 있는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담뱃불도 촛불처럼 타오를 때가 있다
남극에서 날아 온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장이다
문장 안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의 깊이를 나는 아직 모른다
세상에 문장 하나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인간이지만
문장을 하나를 건너는 데 꼬박 한 생이 걸리는 것도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멸종 될 때까지 시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세상에 남겨진 문장들을 떠올린다
생의 크레바스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
한 문장을 건너가고 있는 인간이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
별들이 젖은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건
아무도 크레바스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남극은 있는 것이다
크레바스에 몸을 두고 빠져 나온 비명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남극에서 불어와서 남극으로 불어간다
치밀어 오르는 열과 기침처럼 생각나는 얼굴들은 바람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극을 위하여 낙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막을 걷고 아마존엔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남극에선 감기에 대한 농담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남극에 밤이 시작되면
암사자들은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어머니들은 이웃의 냉장고를 함부로 열어보지 말거라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지 말거라 가르친다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은 문장을 찾아가기 위해 밤마다 냉장고 우는 소리를 엿들으며 자란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냉장고를 열고 밥상을 차린다
눈보라치는 숟가락 속으로 뾰루퉁한 내가 거꾸로 담긴다
별들의 눈이 젖는다

 








[심사평]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 앞에 놓인 작품은 「때」외 5편,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 「손의 영정」외 9편, 「서쪽으로의 일출」외 9편, 「밤의 그네」외 19편이다.


 「때」외 5편의 응모작 중에서 주목받은 작품은 「몹쓸, 소나타」이다. 이외의 작품들과 함께 이 응모자가 공들인 것은 소재의 병치라는 기법을 활용하여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인데, 「몹쓸, 소나타」에는 그 단면의 실상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이 이 작품의 성취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문장이 불안하다는 점이 이 응모자의 결점이다. 문장이 불안할 때 시의 리듬도 소멸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물과 사건에 그것들의 잠재되고 은폐된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들이다. 시적 발견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그러나그 발견을 위한 언어들의 배치가 평이하다 보니 발견의 노력 자체가 설명적이다. 문제는 발견이 아니라 그 발견을 시적으로 가공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것이 언어를 공교하게 꾸미는 능력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발견된 시적 의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시의 구조로 용해되는가의 문제이다. 「손의 영정」외 9편은 무난한 작품들이다. 언어들이 자연스럽고 시상의 형상화에 무리가 없다. 이는 응모자의 시적 공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것이다. 그런데 한 편의 시가 최종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그 자연스러움 못지 않게 결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결기를 시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힘이 시의 언어들에 굴곡을 부여하면서 매듭을 맺어주는 것이다. 이 응모자에게는 그 힘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심사자들은 김은상 씨와 박찬세 씨를 함께 당선작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김은상 씨는 무엇보다도 시적안정과 완결성이, 박찬세 씨는 과감한 상상력이 장점이라고 판단되었다. 우선 김은상 씨는 안정적이고 미적인시상 전개와 아울러 결말부를 맺는 능력이 돋보였다 현실인식도 만만치 않다. 갈고 닦은 언어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경우인데, 다만 한 가지 시의 형식이 지나치게 단순해서 상상력을 한정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기로 한다. 박찬세 씨의 시는 정격과 파격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의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이것은 아직 자기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않은 신인이기 때문일 터인데, 전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못지않게 유행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용기야말로 박찬세 씨의 진정한독특성을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최근의 한국시단은 젊은 상상력의 활기와 소란 그리고 풍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듯 보인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일이야말로 흥미 있는 일인데, 신인의 출현을 경험하는 즐거움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신인들은 한국문학의 새 자리를 어떻게 채워나가게 될까? 실천문학이 내보이는, 크게 대비되는 두 명의 시인이 그 답을 채워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된 분들에게 축하를 보내면서 끝까지 고려 대상이 되었던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선우, 박수연,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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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외투 / 김은상

 

사내가 구름장을 끌어 덮는다
공중을 터뜨리며 쏟아지는 함박눈
고무로 동여맨 하반신을 쓸어안는다
가르랑거리는 숨을 밟고
지나가는 단단한 굽 소리들
사륜 널빤지 아래서
깨진 구름조각으로 출렁거린다
양손으로 바닥을 당길 때마다
한 뼘 한 뼘 기우는 지평선 위
민달팽이 긴 발자국이
살얼음 까는 잔물결로 술렁댄다
상자 속으로 동전이 떨어질 때
반짝 성에 낀 속눈썹 치키는 사내
팽팽하게 일어선 검은 주름이
애벌레 등피처럼 꿈틀거린다
모였다 흩어지는 게 몸이라는 듯
종아리에 쌓인 살갗 흘러내려
외투 안쪽 절반이 떨어져 간 길들
덜컥덜컥 사내의 몸통을 휘감는다
늑골 속 눈발이 뒤척이고 있다

 

 






저수지 / 김은상

 

아버지의 무릎에 물안개가 일렁거린다
손바닥을 대자 손톱에 담긴 달 잔물결에 빠져 현이 울렁댄다
물속에 머리채를 담그고 밤을 중얼거리는 수양버들처럼      
병상 위에 묶인 검은 맨발 고향 저수지를 서성 거린다
죽고 없는 친구들의 이야기 한참 허공에 풀어 놓다가도
댁은 뉘신지, 던진 말이 늑골 속 물수제비로 날아든다
낚고 싶은 기억 한 줄이 있어 내가 누구, 핏줄을 물어도
빈 잇몸으로 삐비꽃을 씹으며 젊었던 한때 둔덕을 헤맨다
몸속을 맴도는 나이테도 오래되면 멀미를 하는지
포르말린 향기 가득한 달의 요의 기저귀에 그려넣은 백발의 아기
엄마, 잠결에 흘러나온 가는 목소리 가랑잎 한 장으로 파문 속에 잠긴다
요강 같은 달무리 물의 지문을 지우고 수문 아래로 떠내려간다 

 

 




하늘로 흐르는 하지정맥류 / 김은상

 

  벚나무가 파릇해진 길을 하늘로 밀어 올린다
  간밤 소나기에 어깨를 걸고 재잘대던 양철 지붕들 모스부호로  초근목피를 간질였는지  가지마다  꽃망울이 돋아있다
  사내가 헐렁한 대문을 밀고 삐거덕삐거덕 걸어 나온다
  끈적거리는 그림자가 어깨를 당겨 기역자로 구부러진 등허리 납작 고개를 수그린 집들과 엉켜 젖은 바닥 위를 꿈틀댄다
  몇 겹 접힌 양복바지를 무릎까지 추켜 올리자 때묻은 소용돌이 종아리에 펼쳐진 검푸른 등고선을 흔든다
  벚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겨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복사뼈 밑 그늘이  밑동에 흥건하게 고인다
  영등포역을 지나가는 열차 소리 덜컹덜컹  정맥 속으로 스며들어 사내가 떠나온 길들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처마 밑 폐지를 등에 업은 손수레가 들개처럼 주저앉아 몸을 말리는 아침 골목의 하지정맥류가  비린 그늘들을 수혈한다
  사내가 벚나무에 등을 기댄다 흔들리는 꽃망울들 공중을 쓰다듬어 꽃받침 가득히 햇살을 채운다
  하늘로 파고드는 핏줄들 팽팽하다










[심사평]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 앞에 놓인 작품은 「때」외 5편,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 「손의 영정」외 9편, 「서쪽으로의 일출」외 9편, 「밤의 그네」외 19편이다.


 「때」외 5편의 응모작 중에서 주목받은 작품은 「몹쓸, 소나타」이다. 이외의 작품들과 함께 이 응모자가 공들인 것은 소재의 병치라는 기법을 활용하여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인데, 「몹쓸, 소나타」에는 그 단면의 실상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이 이 작품의 성취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문장이 불안하다는 점이 이 응모자의 결점이다. 문장이 불안할 때 시의 리듬도 소멸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늘을 살해하다」외 9편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물과 사건에 그것들의 잠재되고 은폐된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들이다. 시적 발견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셈이다. 그러나그 발견을 위한 언어들의 배치가 평이하다 보니 발견의 노력 자체가 설명적이다. 문제는 발견이 아니라 그 발견을 시적으로 가공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것이 언어를 공교하게 꾸미는 능력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발견된 시적 의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시의 구조로 용해되는가의 문제이다. 「손의 영정」외 9편은 무난한 작품들이다. 언어들이 자연스럽고 시상의 형상화에 무리가 없다. 이는 응모자의 시적 공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것이다. 그런데 한 편의 시가 최종적으로 완결되기 위해서는 그 자연스러움 못지 않게 결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결기를 시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힘이 시의 언어들에 굴곡을 부여하면서 매듭을 맺어주는 것이다. 이 응모자에게는 그 힘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심사자들은 김은상 씨와 박찬세 씨를 함께 당선작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김은상 씨는 무엇보다도 시적안정과 완결성이, 박찬세 씨는 과감한 상상력이 장점이라고 판단되었다. 우선 김은상 씨는 안정적이고 미적인시상 전개와 아울러 결말부를 맺는 능력이 돋보였다 현실인식도 만만치 않다. 갈고 닦은 언어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경우인데, 다만 한 가지 시의 형식이 지나치게 단순해서 상상력을 한정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기로 한다. 박찬세 씨의 시는 정격과 파격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상상의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이것은 아직 자기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않은 신인이기 때문일 터인데, 전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못지않게 유행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용기야말로 박찬세 씨의 진정한독특성을 만들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최근의 한국시단은 젊은 상상력의 활기와 소란 그리고 풍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듯 보인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일이야말로 흥미 있는 일인데, 신인의 출현을 경험하는 즐거움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신인들은 한국문학의 새 자리를 어떻게 채워나가게 될까? 실천문학이 내보이는, 크게 대비되는 두 명의 시인이 그 답을 채워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된 분들에게 축하를 보내면서 끝까지 고려 대상이 되었던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선우, 박수연,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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