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당선소감] 나의 詩는 제로… 100을 향해 달려간다
퇴근 준비를 하다가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내가 쓰던 작은 방을 망연히 걸레로 닦고 또 닦았다. 그러면서 대책도 없이 큰 일 저지르고 말았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詩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농사법이 서툰데다 게으름까지 겸비하고 있어 나의 수확은 늘 초라하여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시 농사를 다시 지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터다. 시는 제로(0)와 백(100)의 싸움이라고 한다. 백이 아니면 나머지는 다 제로여서 중간이 없는 장르가 시라고 나의 스승은 항상 말한다. 나는 백을 향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늘 2%가 부족하다. 하여, 아직은 나의 시는 제로다. 당선 소식이 백의 목표까지 꼭 달려가서 소음이 아닌 귀에 즐거운 경적을 울려보라고 교부해준 임시면허증을 받은 느낌이다. 한적한 곳에서 부단히 주행연습을 하여 당당하게 대로에 나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임을 안다. 많이 부족한 글을 뽑아준 심사위원들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詩作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아내와 어머니, 착한 아들 다빈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강릉원주대학교 시창작반 문우들, 악당들, 냉정한 평가를 아끼지 않던 무명 비평가, 큰 힘이 되어주었던 홍종화 시인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참신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아
금년도 응모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작품 수는 많았으나 특출한 작품이 없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과 신춘문예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
이번 심사에서는 오늘 이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시,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 그리고 신인다운 특성과 참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작품 중 오영애씨의 `흰 꽃이 지다'는 언어감각은 뛰어났지만 주제의식의 깊이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정솔씨의 `공룡능선'은 비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당선작인 김영삼씨의 `덩굴장미' 외 `初冬'은 뛰어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았다.
예를 들면 `덩굴장미'를 `차가운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또한 “자신이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라는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이었다. 주제의식 역시 보편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특히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상징성을 아이러니한 표현 기법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목숨 걸고 터를 사수하려는 사람들과 강제 철거로 문책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불길이 솟았다 강대병원 41병동 입원실에 누운 그녀의 마음도 이미 화염에 휩싸였다 산부인과 의사가 가랑이 사이 좁고 음습하게 숨어있는 그를 찾아내 명명한 것은 D25, 20년 동안 빈방을 먹고 몸집을 키워 집채로 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병실은 침묵의 선, 형광수족관 유리벽에 갇힌 여자는 영락없이 부레를 잃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넙치가 되었다 TV는 밤낮없이 용산 강제철거 참사를 알리고 별보다 많은 눈물과 촛불을 쏟아내고 있었다 강제철거는 내 깊은 동굴 속에서도 일어났다 마취 4시간 만에 피주머니에 고인 D25는 몇 날 며칠 창자를 지나 억울하다고 빈터에서 울었다 화염에 휩싸여 죽은 용산참사 가족들이 TV화면 속에서 실신했다 불을 낸 책임이 넙치라고 했다가 꽁치라고 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그녀의 몸이 점차 수족관이 되었다 밤마다 몸을 떠난 부레가 허공을 날고 납작하게 엎딘 시간들을 물고 사라지는 갈치 떼가 보였다 스산한 야광을 구경하는 관객은 네모난 아파트와 깜박이지 않는 붉은 십자가들뿐, 그런데 왜 십자가는 약자들의 빛이 되지 못할까 크레졸 안개가 어지러웠다 가끔 배를 쥐고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은 투명한 해파리촉수에 찔린 손을 높이 쳐들었다 의사는 여성을 잃은 대신 생명을 얻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D25를 죽이고 그녀가 산 수족관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가장더 잃고 터도 뺏긴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신문이 말했다 그들에겐 죽을지언정 터를 지켜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별보다 많은 눈물과 촛불은 물대포로도 꺼지지 않는다 허공을 얻은 몸은 이미 바다가 되었을 테니.
※ D25: 여성의 자궁 속에서 자라는 근종의 종류
[당선소감] 詩 안에서 살고 詩 안에서 죽어야
등단이란 관문은 시인다운 시인을 가려 시의 고삐를 채워주는 의식이다. 시 안에서 살고 시 안에서 죽어야 그 고삐가 풀릴 것을 알기에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살면서 고통당한다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나쁜 것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무의식이지만 고통은 의식의 연속, 인간의 내면을 죽음보다 더 두렵고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절박한 고통의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고 감내하는 마음으로 내면의 눈을 떠 세상을 보니 비로소 타인에 대한 고통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산부인과에서 여성성을 잃는 수술로 내 몸에 있던 생명의 요람이 철거되는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TV에선 용산참사 현장 화염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몸의 작은 기관 하나가 철거되는 순간에도 내 의지의 불꽃이 실존한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맹렬히 싸워야 할 실존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 시를 통해서 가진 자들이 만든 법이나 질서에 우선하는 생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미흡한 시를 뽑아 준 고명한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그분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할 생각이다. 사랑하는 가족 재휘와 새미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영광이 골고루 나누어지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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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작 대부분이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시의 형식적 요구는 만족시키고 있는 반면 상상력의 내면화나 깊이에는 미흡했다. 이는 언제부턴가 문화적 유행처럼 되어버린 시 쓰기 공부, 혹은 시인 만들기의 한 경향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 시단의 이슈였던 그로테스크 시와 환상적 상상력 혹은 가독성을 부인하는 시편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젊은 응모자의 새로움에 대한 시도와 함께 기존의 전통 서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생활고나 청년 실직자들의 좌절 등 현실과 세태를 반영하는 작품도 눈에 띄었고 함축의 어려움을 비켜가고자 하는 한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는 전반적으로 시가 길고 또 산문성이 짙은 경향을 보였다.
1,200여 편에 이르는 응모작 중 최종심의 대상은 신정남의 `인북천 피라미의 노래'를 비롯한 8편이었다. 그중 명순이의 `지각한 길'은 생을 조망하는 사유와 시각은 뛰어나나 다소 평이함에 머무른 감이 있고 김영삼의 `덩굴장미'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는 신선함이 돋보이는 반면 단정적인 표현과 상반되는 모호함의 혼재가 오히려 시의 진정성을 흐리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정남의 `인북천 피라미들의 노래'는 생태적 상상력과 형식 면에서의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관념성과 다소 교훈적이라는 측면에서 시의 리얼리티를 놓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 `산부인과 41 병동에서'는 개인의 고통과 사회적 병증을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와 상징성들을 융합하는 역량이 괄목상대할 만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빈다.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하다.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 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당선소감]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사람들은 수없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산다. 그 인연의 끈들 중에는 너무 오래돼 낡아서 끊어져 버린 끈도 있고, 벌써 끊어질 수도 있는 끈을 추억에 비끄러매어 잡고 있는 끈도 있다. 놓쳐버리면 삶이 무의미해지는 끈도 있고, 잡고 있을수록 힘을 주는 끈도 있다.내가 시(詩)라는 한 매듭을 달고 산 20년 동안, 거미줄에 걸린 듯 끊어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적도 있었고, 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것만을 안타까워했던 시기도 있었다.때로는 시에 너무 매달려 삶이 무거워졌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잡고 온 20년 동안의 시가 겉으로 보기엔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울했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기쁜 날 아는 형의 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이십여 년 동안 써 온 시를 줄줄이 묶어 혹 시집 한 권 내게 되면/ 책을 텔레비전 받침대로 쓰는 친구에게 꼭 줘야겠다./찌개그릇 받침으로 가끔 쓰는 아내에게도 한 권 주고. 갈 길이 멀기만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안개 속의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다. 그 길을 언제까지나 함께 가 줄 거라고 믿는 친구 권택삼과 이상문 형, 그리고 끝까지 나를 믿어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 주신 이승훈, 이영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독창적 구조 갖춘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한영서씨의 ‘나무 위의 아이’ 외 6편과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 그리고 유태안씨의 ‘관계1’ 외 4편이었다. 한영서씨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나무 위의 아이’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성과 추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기존의 서정적 틀에 고착되어 있어 독창성이 미흡하여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 시적 언어감각과 어휘 선택, 언어 배치에 따르는 문장호응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4편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었다. ‘오징어’는 선착장의 풍경으로 죽어가는 오징어를 통해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긴장감 있는 리듬감각과 상황묘사,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한 것이 흠결로 남는다. 독창성을 지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계1’ 외 4편을 응모한 유태안씨의 작품은 입체적 구성으로 TV드라마와 나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이 ‘틈’의 장면을 절묘하게 매치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독창적인 구조와 시적 언어감각과 시의 생명인 리듬감각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미는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평범하고 안일한 소재선택이나 추상적인 시제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들로 남는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