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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취소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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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은 2011 신춘문예 시 부문 강정애(59)씨의 ‘새장’ 당선을 취소합니다. 2009년 제8회 지용백일장 고등학생 부문 차상(次上) 수상작인 이슬(19)씨의 ‘우산’과 상당 부분 흡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강씨는 “2008년 가을쯤 ‘새장’을 썼으며 당시 함께 시 수업을 받던 이씨에게 이 습작시를 보여주고 합평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씨는 “강씨와 함께 시 수업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사람에게 시를 가르쳤던 박해람 시인은 “강씨와 이씨가 여러 차례 함께 시 공부를 했으며 강씨가 ‘새장’을 먼저 쓴 것이 맞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이씨는 “내가 쓴 ‘우산’ 초고를 박 시인이 손질해 줬고, 이 중 일부 표현을 박 시인이 강씨에게 줬다.”고 재반박했고, 박 시인은 이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서울신문과 시 부문 심사를 맡은 4명의 위원들은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상 강씨가 표절했다는 혐의는 없는 것으로 자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주장이 엇갈리는 데다 비슷한 작품이 이미 이씨의 이름으로 발표된 만큼 미발표작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 규정에 어긋난다는 판단 아래 당선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춘문예 응모작을 더욱 면밀히 검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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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 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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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 말하지 않을 때 시가 왔다

 

야구 시즌이 끝나고서야 잠자리가 사라진 걸 알았다.

 

인적 없는 공원. 불빛만이 맑게 새어나왔다.

 

내가 나를 피해 다녔으므로 바람 한 장도 햇살처럼 빛났다. 시를 쓰고 있었지만 시는 좀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언제나 나였고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가 쓸 시간이다.

 

볼륨을 줄인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내 숨결에 따라 소리가 변하는 변주곡.

 

대문에서 쉰다.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아닌, 그 때 골드베르크가 흘러나온다. 여기 대문 앞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미 문이 닫히고 길은 사라지고 없다. 저기 까맣게 타는 불빛이 길이 되는 건 아닐까.

 

커피를 붓는다. 밤에 쓰는 편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둠이 커피향처럼 퍼져나간다. 덜컹거리는 창문에 마음을 놓는다. 당선 소식을 받고 산책을 나간다. 눈발이 반갑다. 밀감장수가 파는 귤이 보인다. 귤보다 귤빛이 만져지는 시를 쓰고 싶다. 먹지 않아도 따스한 그 귤빛을 맛보고 싶다.

 

우선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정배, 윤미, 의주, 재호, 석진, 많은 힘이 되어준 성우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채규판 교수님과 정영길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강연호 교수님, 열심히 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실 거죠?

 

 

 

 

 

 

[심사평] 거친 행간 오늘보다 내일에 더 기대

 

시를 읽고 쓰지 않아도 시간은 잘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경제는 미세하게나마 성장한다. 시하고 상관없이 삶은 잘도 돌아간다. 그리 시적인 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놀라운 일이다. 이 땅을 마지막 시의 나라라고 불러도 지구인 중에 시비를 걸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시의 풍요와 다양성을 이번 심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 열여섯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이 중에서 류성훈, 강윤미, 김희정, 최설, 손현승, 이길상씨의 작품을 1차로 골랐다. 모두들 중요한 패를 하나씩은 움켜쥐고 있었다. 심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당선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논의했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갱신할 뒷심이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손현승씨의 시들은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시에 가한 바느질 솜씨를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선배 시인의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점도 지적되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 최설씨의 시는 시적 대상을 해석하려는 끈질긴 탐구심이 볼만했다.

 

그러나 사유를 서술하는 방식이 일방적이어서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길상씨의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는 때때로 거친 어휘와 난해한 이미지가 날것으로 드러나 있으나 속에서 올라온 어떤 찐한 것이 스며 있는 시이다. 자아가 세계를 통과할 때의 단절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일상 속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점을 좋게 읽었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것보다는 불안하고 거친 것을, 오늘의 시보다는 내일의 시를 택한 결과다. 축하한다. 이제 좋은 시인으로서 그가 응답할 차례다.

 

심사위원 황지우(왼쪽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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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황사 / 정영효

 

 

이 모래 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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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어

 

언젠가라는 말을 믿으며 지냈다. 언젠가가 일찍 온 것인지 늦게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밤들은 행복했다. 비록,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자괴감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일지라도 그 속에 희망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출발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확신한다. 시라는 아포리아에서 계속 길을 잃고 싶다.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을 호명하는 것으로 들뜬 소감을 채운다. 존경하는 어머니 서 여사, 사랑하는 누나들과 매형들. 시를 쓰는 걸 모르고 지내줘서 오히려 감사하다. 귀여운 조카들. 유성, 정우, 수인, 재욱에게도 지금만은 부끄럽지 않은 삼촌이 된 것 같다. 빈자리를 채워주신 삼촌들과 숙모들, 고모와 고모부께도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문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겨준 동국대 국문과와 문창과 선생님들, 선후배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특히 홍신선 선생님과 김춘식 선생님, 허혜정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가장 엄한 독자였던 용목 형, 상우 형, 판식 형. 결핍과 오기를 키워준 덕희와 수호. 폭탄주 같은 시분과원들. 경성대 민족 국문과 사람들과 감전동 식구들,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부족한데도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치열하게 살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계속 열리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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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의 체험을 유려한 시적 언어로

 

특별한 작품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은 높았다.현실투쟁적인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도 금년도 응모작들의 한 경향이었으며 추상적 의식을 실험하는 작품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편을 읽은 뒤 최종심의 대상을 네 편으로 압축하였다. 류성훈의 월면 채굴기’, 최호빈의 얼음묘지’, 정영효의 저녁의 황사’,정재영의 윤회등이 그것이다. ‘월면 채굴기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도 독특하고 언어 구사도 유려했다. ‘얼음묘지는 이미지의 전개가 참신했으며 저녁의 황사는 상상력의 전개가 돋보였다. ‘윤회또한 나무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유추하는 통찰력이 자연스러웠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각각 가지고 있었는데 심사과정에서 우리들이 주목한 것은 체험의 구체성이었다. 언어의 유려함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응모작을 검토하였다.

 

최종적으로 월면 채굴기저녁의 황사가 검토의 대상이 되었는데 두 편의 시가 만만치 않은 수준을 지니고 있어 상당한 시간 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 ‘월면 채굴기병들도 힘 빠질 무렵과 같은 뛰어난 구절을 구사하는 시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후반부 처리가 조금 약해 보였다. 같은 응모자의 하늘은 연직선 쪽으로도 함께 논의했으나 체험의 구체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 ‘저녁의 황사는 사막으로부터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상상력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자신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른 응모작 마방이나 바람과의 여행이 영상물을 통한 간접 체험을 다룬 것이라면 저녁의 황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우리들은 주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월면 채굴기저녁의 황사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두 분 다 충분히 당선권에 드는 작품이라고 판단하였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한 편의 작품을 정해야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심사위원 황동규·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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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산 / 이선애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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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라는 느낌 들어

 

매년 이맘때면 문학을 좋아하는 엄마들끼리 모여서 자그마한 여성문학지를 만든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있는 엄마들의 곱고 섬세한 손길로 엮은 이 책은 지역사회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책 읽는 습관, 문학의 저변확대를 꾀하고자 함이다. 어언 여섯 번째 세상에 나올 우리들의 아기를 기대하면서 출판사 편집실에서 최종교정을 마치고 OK 사인을 내던 찰나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선소식이다. 떨리는 손끝과 가슴에 또 하나의 산통이 스친다. 몸속 아기가 앉았던 자리에 시를 앉히고 자신을 낳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수많은 언어들이 시간의 벽을 허물며 웅웅 메아리친다. 이제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란 느낌이 든다. 세상에 갓 던져진 갓난아기인 나를 위하여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엄마가 된 것이다.

 

당장 배고픈 나를 위하여 옥타비오파스의 말을 빌린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자기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시각각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아르테미르 여신처럼 즐겁게 시를 낳는 풍요와 다산의 힘을 기르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하여 늦은 나이에 진학한 광주대학교 문창과 대학원이 고맙다. 열심히 지도해주신 이은봉, 신덕룡 교수님, 외에도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내이기보다는 공주이기를 소망한 나를 탓하지 않고 묵묵한 눈길로 지켜봐 주신 남편과 함께 공부한 지선, 성희, 인드라망 문학모임 식구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다. 예기치 않은 기쁜 소식 주신 서울신문사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고려대 최동호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심사위원님들께도 큰 절을 올린다. 좋은 시로 갚아야 할 너무 큰 빚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치열하게 시를 낳는 엄마가 되기를 자청해본다.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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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돋보여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 온 시편들을 정밀하게 읽고 이에 대해 논의한 다음 다시 최종심의 대상을 다섯 편으로 압축하였다. ‘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송인덕)는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가, ‘난초와 칼´(이연후)은 이미지의 선명성이, ‘양치하는 노파´(한세정)는 시적 함축성이, ‘바닷가 떡집´(김영진)은 진득한 삶의 감각이, ‘가벼운 산´(이선애)은 시적 발상 전환이 돋보였으나 각각 그 나름의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시편을 놓고 좀 더 범위를 좁힌 결과 세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 ‘난초와 칼´은 이미지의 선명성은 두드러지지만 대립 구도가 너무 단순하고, ‘가벼운 산´은 시적 발상 전환이 참신했으나 설명적인 부분이 시적 밀도를 약화시켰으며, ‘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는 자연스러운 시적 전개가 강점이지만 상식의 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엇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가벼운 산´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노파의 손등에서 고통의 향기를 관찰한 시인의 시선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솜씨와 더불어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고 하겠다. 삶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선이 시적 구도 속에서 빛날 때 남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시금 되새겨 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최동호, 오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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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수업시대 / 이강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 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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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쓰자마자 휘발하는 시는 매 순간 절망하는 것

 

프랑스 해변의 민박집에서 나는 TV가 있는 독방을 요구했다. 이제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TV소리를 크게 해놓고 바지를 벗었다. 벗어놓은 바지에서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이국의 언어들이 차츰 공간을 메우면서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불쾌한 소문처럼 커튼을 한껏 부풀렸다. 커튼이 한 덩이의 절정을 토해놓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쓰자마자 백지에서 휘발되는 언어를 가지고 싶었다. 나는 언어의 물질성과 의미의 비정형성 사이가 아찔하다는 것을 안다.

 

허천난 사람처럼 껴안고 핥아도 시의 육체는 매순간 절망할 것이지만 심장을 꺼내들고 생을 고민하는 일과 같이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증명의 방식이 될 것이다.

부족한 작품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뵐 때마다 내 1인칭의 권위가 욕심을 부리는 김명인 선생님과 이창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목요팀 형들과 종원, 소현, 철규 그리고 내가 기쁜 마음으로 부르는 많은 이름의 주인들이 함께 있어 좋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모님께 좋은 소식이 먼저 찾아가 조금은 죄송하고 많이 기쁘다.

 

생각해보면 혼자 찾아간 이국의 해변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처음 육지로 나와 폐를 느끼는 양서류처럼 아득하고 막막한 한 호흡이었다. 그것이 내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심사평] 유연한 언어구사 돋보여

 

예선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우선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 김강산의 엉덩이’, 이산(본명 이강산)연금술사의 수업시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등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대상자를 좁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은 잘 다듬어져 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은 현실적인 체험의 추상적 표현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김강산의 엉덩이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외설적인 부분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두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는 그 유연한 언어 구사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명품 백과 가짜 백을 대비, 여성들의 내면적 심리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그러나 기성시인의 작품을 모방한 흔적이 엿보였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결국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 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신경림,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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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풍경 / 김미령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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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막 외출하려던 참에 옷장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깜빡 잊고 나가려던 참인데 간신히 받은 전화 속 상대방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였다! 나는 실감을 도둑맞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무슨 일의 기미는 그렇게 희미하게 온다. 시가 내게 오는 방식도 그러하다. 시의 기미를 다행히 감지했을 때 나는 납작하게 엎드려 코를 벌름거리며 그 냄새의 방향과 거리와 크기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확실히 기억해둔 뒤에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유유히 사라진다. 며칠동안은 부단히 그 실체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내림굿을 받듯 어느 날 정신없이 받아 적곤 한다.

 

그러나 날것의 실체를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좌절을 맛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보편성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감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감정들을 아름다운 충격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부터 내 시 쓰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 같던 내 말들과 행동이 조금씩 보편성을 찾아가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나를 세상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시가 내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확실히 믿고 있다.

 

오래된 일기장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며 시 비슷한 것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10년 전 일이 생각난다. 그때 내 시를 처음 읽어봐 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신 남송우 교수님, 한동안 외면했던 시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기에 훌륭한 스승이셨던 손진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과 철의 여인 엄마, 가족들, 또 함께 기뻐해 준 선화, 희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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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두 선자에게 전해진 작품들은 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응모작들에 결정적인 그 무엇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주었다. 발상의 참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흔히 언어의 밀도가 따라주지 않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은 호흡이 짧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패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치열함이나 당돌함이 제거된 시적 수련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념에 젖게 했다.

 

결국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당선권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네 명의 응모자의 작품을 추려내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김미령의 흔한 풍경이 마지막으로 낙점을 받게 되었다. 얼핏 보아서 무더운 날의 나른한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별 무리없이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단면에 대한 담담한 소묘가 돌연 삶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절실성을 획득하고 다가온다.“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같은 표현도 대범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응모자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다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시세계의 구축에 보다 신경을 쓴다면 한 뛰어난 신인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 가운데 김영수의 들키지 않은 걸음걸이어두운 독서는 선자들을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시에 담긴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이 시를 너무 건조하게 만든 감이 있고 불필요한 추상어의 남발도 거슬렸다. 이밖에 오징어 등불을 투고한 이병일과 사나운 연어떼가 밀려갔다의 박성현도 숙련된 솜씨를 선보이고 있지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분발과 정진을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김명인·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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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 / 권혁재

 

 

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 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汽笛소리

누이의 嬌聲이 흘러 다니는 三 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 오는

갈 길 먼 꿈들은,驛廣場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 시간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三 里에 내리는 비릿한 土雨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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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서해대교에 걸린 노을을 따라 서해로 잠입해 가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을빛이 흔들리면서 트로이의 목마처럼 버티고 서 있는 교각에 부딪쳐 갈기갈기 찢기어 나갔다.

 

한순간 열기가 오른 얼굴에 숱한 詩語들이 뒤섞여 피어났다. 내가 진실로 수용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아직도 끝이 없는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심정이다. 빛에 적응이 되는 거리에 다다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동안 통과제의 때문에 가졌던 중압감을 서해로 떨어지는 노을과 바꾸고 싶다.

 

어려운 시기에 답답한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본모습을 쉽게 열어 볼 수 있도록 열쇠 하나를 쥐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온화한 미소로 이끌어 주신 김수복 선생님, 시창작 실기와 이론을 지도해주신 박이도 선생님, 이남호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글 쓰는 것에서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이제는 정말 글 쓰는 것에서 다시 굴레를 뒤집어 쓰는 진짜 시인이 되고 싶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도 한 번 더 귀 기울여 들으면서.

 

 

 

 

그대의 어깨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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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본심으로 넘겨진 20여 분의 응모작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개성이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다는 거였다.(하긴 그런 작품을 선자로서 만나는 것도 복이다.)대신 오랜 연마기가 느껴지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은 꽤 있었다.

 

우리는 다섯 분의 작품들을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박성희의 유년의 계단은 얼핏 담박하면서도 어릴 적 기억과 어른의 일상의 어울림이 만만찮게 복잡하지만 후속작은 추억과 일상으로의 2분법이다. 김경진의 달팽이가 무섭다는 자연과 자아의 관계가 절묘하지만 후속작에서는 무너진다. ‘전남성로원을 쓴 김창헌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 가능성들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주인이 아니다.

 

천서봉의 나무에게 묻다는 자연과 일상과 종교적 신비의 구경이 산 속의 고요 속에 절묘하게 녹아 들어 있으나 심상 사이 모호한 주름이 장식적이며 화려한 수사의 찌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끝내 지울 수 없다. 선자들로서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었음을 굳이 적어둔다.

 

토우3편을 투고한 권혁제는 토우2행의, 버려진 도시의 향토적이기까지 한 정서(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누이의 嬌聲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아픔으로 끌어올리는 광경이 흥건하고 또 흥건하다.그리고, ‘토우=웃음=비명의 등식이 만만찮은 복잡성을 시의 육체에 부여한다. ‘밀물우기에서도 흥건=복잡은 적당하다. 우리는 이 광경을 뽑아 선에 들지 못한 사람을 적셔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김명인 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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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 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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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유령처럼.

그대를 비 내리는 창 밖에서 처음 보던 순간이 생각나는군요 나는 은유로 출렁이던 그대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가요 알 수 없는 세상의 거친 은유에 대해 나는 자주 연민합니다 어머니,아버지,고향,그리고 그대…,그래요 그대라는 계절을 타는 동안 나는 시를 썼던가요 한량없는 마음으로 나는 틈만 나면 노트에 나의 계절들을 옮기기 위해 애썼지요 오늘 첫눈 같은 당선 소식을 받고 무작정 수화기를 들었다가 마음에 주소하나 없이 떠다니던 그 손끝의 떨림에 대해선,맥없이 내려놓는 나의 어정쩡한 자세에 대해선 침묵하겠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詩 이전에 이미 詩이셨던,생각하면 눈물로이루어지는 어머니,너무 야위어져버린 종아리로 오늘도 새벽에야 겨우 주무시고 계실 아버지,그리고 두분 당신이 지상에 내리신 희끗희끗한 눈발들 희경+현수,나경… 이승에 없는 누님,아직도 눈빛만 보고 나의 뒤통수를 아무런 이유없이 툭 때려줄 수 있는 고향들 희상 경석 봉섭 성환 진영 승필 계택,나의 파란 피 필용형,힘들게 공부하시는 진이형 등등, 끝으로 부족한 작품에 죽비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까지 살아 있어 주어 감사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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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편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높낮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 중에서 당선시 한 편을 고른다는 것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번갈아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고,선자들은 한여진의 ‘나의 서가’외 5편,권오영의 ‘투입구’외 4편,김경주의 ‘꽃 피는 공중전화’외 4편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정하였다.

이 세 편의 시들은 저마다 장단점이 있었다.‘나의 서가’외 5편의 시들은 평이한 서술로 진솔한 감정을 유연하게 드러냈지만,시적 수사에서 약세를 보여주었고,‘투입구’외 4편의 시들은 유전자 조작 실험쥐나 공룡알 화석 등을 통해 과학적 상상력을 독특하게 포착하고 있지만 이를 시적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었다.

김경주의 ‘꽃 피는 공중전화’외 4편의 시들은 이런 약점들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관심을 끌었다.삶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는 시선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동시에 사물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시적 역량이 신선하게 다가왔다.예를 들어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가슴 속에 고스란히 박혀온다”와 같이 사물의 속살을 파고드는 그의 ‘꽃 피는 공중전화’는 당선시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다.다른 투고작의 고른 수준 또한 참고가 되었다.

최종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그리고 아깝게 탈락한 응모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드린다.또한 신춘문예가 일회성 연례 행사가 아니라 모든 시인 지망생들에게 지속적인 분발과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황동규·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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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석원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고,바람은 그때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피곤한 바람이다. 나는 백 송이 수련이 내뱉은 한숨이다.

 

햇빛이 몸을 데워 비상했고, 몸 속에는 한 방울 물이 갈증을 태우고 있다. 내 몸은 지금 구름빛이다.

 

나는 가볍다. 후두둑 떨어지는 적색 열매처럼 가까운 미래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 이마에 떨어지는 것, 얼굴에 번지는 것내게 쇄도하는 현기증. 그대 몸에 얼룩지는 오래된 바람,흰 손길에 갇혀 나는 물 밑에 있고 나는 오므라들어 졸고,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고, 물 위를 지나던 나는 바람이요 장막이요, 그때 저기 부유하는 꽃잎.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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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개념으로 쪼갤 수 없는 시간인 사랑의 순간.그런 순간이 있는 오후의 풍경 속에서 나와 나의 시는 동시에 경계 너머의햇빛을 보았다.사랑하는 두 존재는 ‘동시’라는 명사에 갇힌다.어느 한 쪽의 사랑으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나 혼자의 사랑이 날 지치게 했다.사랑의 동시성은 시간의 그물에 포박되지 않는다.사랑하는 존재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같이 존재하면서 같은 곳을 쳐다본다.사랑에 빠진 사람에게‘그’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이제 나와 시 너머에있는 ‘그들’을 향해 나아간다.시는 감옥이었다.‘나’와‘너’가 이루는 세계에서 ‘나’와 ‘너’와 ‘그들’이 이루는 세계로 떠나고,다시 다른 ‘그들’이 존재하는 다른 곳으로 유목하는 내 언어의 출발이 기쁘다.출옥하지만 나와 시는 ‘동시에’ 존재한다.나는 다시 그 감옥을 선택하고,시는 나를 선택했다,동시에.

나의 출발을 있게 해 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과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내 시에 살고 있는 ‘그들’이 떠오릅니다.내 시가 탄생했던 ‘poetika’의 벗들과 혁웅 형,찬기형,순원 형,행숙 그리고 장욱.내게 처음으로 시를 쓰게 했던 국문과 문창반의 선후배님들,가족들….

 

 

 

역진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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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끝까지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4명.이영옥의 ‘주먹 만한 구멍 한 개’ 외 4편,천서봉의 ‘뿌리 내리는 아버지’ 외 3편,김정문의 ‘賊反荷杖’ 외 2편,그리고 장석원의 ‘낙하하는 것의…’외 6편이었다.

이영옥의 ‘주먹만한…’은 “겨울바람은/아버지 자전거의녹슨 귀를 때렸다”의 첫 2행에서 보이는 일상-추억 풍경화(化=畵)의 고전적 품격을 장장 26행씩이나 무리 없이 유지-발전시키고 있는 솜씨가 놀랍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순서대로풍경의 긴장이 처지고 감상적이며 심지어 감상주의적이다.천서봉의 작품은 수준이 고르지만 ‘뿌리내리는…’의 “절망에 대한 썩지않는 공식”과 “소풍 같은 봄날”의 모순이 끝내 미학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김정문의 ‘賊反荷杖’은 표면적인 산문-이야기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설과 시의 차이를 예각의 미학으로 형상화한,도시변방(불광동)의 대표적인 풍경화(化=畵)라고 하겠다.하지만,제목의 서투름이 좀 불길했는데,과연 ‘웃음’을 아직 길들이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낙하하는…’은,물,문,바람,피곤,갈증,태움,구름,현기증 등 온갖 인간형상과 자연현상이 시 전체를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요가 단아하다.제목의 질문혹은 자문과 마지막 행 “~이요”의 음풍농월투까지 포함해서 그렇다.이 절묘한 세파 속 ‘단아한 고요’는,“찍 침을뱉으며 햇빛 속으로 귀향하”는 ‘건달’(‘물결 그리고 물결’),‘게르니카’와 ‘김추자의 꽃잎’과 ‘5공화국 대통령 취임 연설문’(‘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군화’와“사타구니보다 따뜻한 곳”(‘파로호’)까지 거느리면서도단아한 고요며,급기야 거느리므로 단아한 고요다.우리는 이분을 뽑기로 합의했다.

 

심사위원 김명인 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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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 신혜정

 

 

분홍빛 말이 나를 유혹했어요.

말을 타려고 하는데 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보이네요

말장사 아저씨가 입은 회색 점퍼 소매에도 누런 솜털이 삐죽거려요

아까부터 아저씨는 저기 공장굴뚝처럼 기침을 토하고 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말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위로 솟으면 초록과 빨강 줄무늬 천막이 보이고

내려오면 내 바지처럼 군데군데 구멍난,

쓰레기더미 같은 판자집이 보였어요

연탄재들은 오늘 아침 차에 실려 떠났어요

말장사 아저씨는 네발 달린 의자에 안장처럼 앉아 있네요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발굽 소리 대신 녹슨 스프링만 자꾸 삐그덕거렸어요

창호지 바른 우리집 창문에 불이 켜지네요

이제 말들이 리어커 바퀴에 실려 떠날 거예요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다리가 없는 분홍빛 말 위에서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연탄재는 왜 또 내놓으세요?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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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마지막까지 당선을 다투었던 작품은 신혜정씨의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과 조동범씨의 ‘심야 배스킨 라빈스 살인사건’ 이었다.이들의 시적 재능은 응모 시의 전편에 걸쳐서 고루 확인되었다.

신혜정씨의 시편에는 어떤 가능성 앞에 열려 있는 발랄한 시적 감수성이 있다.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시어는 그 정밀성에 값하는 당돌함과 당당함이 느껴졌다.그럼에도 말의 운용에 다소의 무리가 끼어 들고 그것을 쇄신할 역량이 일천하다는 약점도 함께 읽혀진다.어쩔 수없는 선택의 결과라 하더라도 결점이 있는 시를 당선작이라고 밀어올리는 선자들의 심사가 마냥 편편한 것만은 아니다.선자들은 이 응모자의 잠재적 기대치를 평가한 것이다.더욱 정진하여 거기에 부응하길 바란다.

조동범씨의 시편에도 그 착상의 무거움에 비교적 선명하게 반응하는시어의 운용이 돋보인다.표제 시는 심야의 적요가 삶의 무심한 표징과 어울리면서 섬뜩한 풍경을 빚어낸다.그리하여 문명한 세계의 이면에 감추어진 그로테스크한 삶의 편린들이 시의 전면에도 부상된다.그럼에도 선뜻 당선작으로 밀지 못한 것은 그 풍광이 만들고 있는 지극히 어두운 시선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증권사 법당에서의 한나절’을 응모한 전인식씨, ‘겨울강’ 등을 응모하여 견고한 시풍을 선보인 문신씨, ‘다슬기를 잡는밤’ 외를 응모한 안명희씨등 아쉽게 당선의 자리를 내어준 낙선자들에게도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송수권 김명인

 

 

 

여전히 음악처럼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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