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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만세 / 박정대

 

 

희미하게 그대의 얼굴이 보일 정도면 된다

천창을 통해 별빛들이 쏟아지면 된다

선반에 쌓여 있는 약간의 먼지는

음악이라고 생각하자

술을 마시는 날들을 위해

뜨거운 국물을 끓여낼 수 있으면 된다

아무리 담배를 피워도 금방 공기가 맑아지는

히말라야 근처면 된다

다락방 위에는 청색 하늘

다락방 아래엔 끝없는 대지

다락방 곁으론 날마다

그대 맑은 숨결 같은 바람이 불면 된다.

사랑하는 그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면 된다

당나귀, 굳이 차마고도를 지나오지 않았더라도 된다

일주일에 한 번 당나귀에 실은 물품이 당도하면 된다

당나귀, 폭설에 길이 끊겨

설령 한 달을 오지 못한다 해도

삐걱거리는 계단이 있고

계단 위엔 다락방 카페가 있고

다락방 카페엔 의자와 탁자가 있으면 된다

한 달 내내 눈이 내려

세상의 길이란 길들 모조리 막힌다 해도

뭐든지 함께 하고 싶어지는 그대만 있으면 된다

약간의 식량과 술과 담배만 있으면 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면 된다

두툼한 스웨터만 입을 수 있으면 된다

조명은 희미해도 된다

별빛이 쏟아지면 된다

히말라야 근처면 된다

 

 

 

 

체 게바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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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주관하는 제22회 대산문학상 수상자로 시 부문에 '체 게바라 만세'의 박정대 시인이, 소설 부문에 '아들의 아버지'의 소설가 김원일 씨가 각각 선정됐다.

 

평론 부문에서는 '폐허에서 꿈꾸다'의 남진우 명지대 교수, 번역 부문에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불어로 번역한 엘렌 르브렝 씨가 각각 뽑혔다.

 

박정대(49) 시인은 4일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제목을 가진 시집에 누가 상을 줄까' 저 자신도 기대를 안 했다""지금도 전혀 실감이 안 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시적 전언의 폭발력으로 최근 시단의 기계적이고 난해한 경향에 대한 의미 있는 반격"이라는 평을 받았다. 박 시인은 "시단의 시들이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 내면화되는 것에 대한 제 나름의 불만이라고 할까, 시집 제목만이라도 사회적인 발언을 해보자고 시집 제목을 '체 게바라 만세'로 했는데 막상 시집을 열면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제목을 이렇게 정하고 제 의도와 상관없이 말이 많을 것 같다는 예상을 했는데 제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읽히는 것 같았다"면서 "시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힘이 없는데 시인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시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대산문학상 상금은 부문별 5천만원이다. 시상식은 오는 26일 오후 6시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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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2005 제19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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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제19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박정대(39) 씨가 13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아무르 강가에서' 13편이다.

 

박 씨의 시는 "장엄하고 스케일이 크며, 표현력이 뛰어나고, 도전 의식과 가슴을 울리는 묵직함이 넘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견 및 원로시인에게 주는 소월시문학상 특별상에는 김춘수 시인의 '쥐오줌풀' 9편이 선정됐다. 우수작 수상자로는 이선영, 이정록, 이재무, 정끝별 시인이 선정됐다.

 

대상 수상자인 박 씨는 고려대 국문학과를 나와 1990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단편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등을 발표했다.

 

시상식은 연말에 이상문학상, 김환태 평론 문학상, 문학사상 신인상, 청소년문학상 등과 함께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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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박정대(朴正大, 1965년 생)

 

 

2. 수상작 「馬頭琴 켜는 밤」 외 4편


<馬頭琴 켜는 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와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창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 마두금-악기의 끝을 말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그녀에서 영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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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상소감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뜻밖의 수상 소식을 듣고, 몹시 민망하고 당황하여 예전에 써놓았던 편지 한 통으로 수상 소감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어져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 속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치열하게 매순간을 살겠습니다.
못난 작품을 혜안으로 밝게 읽어주신 유종호, 신경림, 정진규, 조정권,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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