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가득 찬 책* /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민음사에서 주관하는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강기원(49)씨가 4일 선정됐다. 수상 시집은 '바다로 가득 찬 책'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은 지난해까지 매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시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지만 올해부터 등단 10년 이내 기성 시인은 물론 등단하지 않은 예비 시인으로까지 문호를 넓힌다는 취지로 공모제로 심사 방식을 전환했다.
올해 수상자 강씨는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2005)를 냈다.
민음사 측은 "최근 시의 경향이 일반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강씨는 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뚜렷이 나타냈으며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시도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강씨는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천형의 고통이라 하지만 내면에 구멍을 뚫고 내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평범한 무명시인이 상을 받아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은 18일 오후 5시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에서 열릴 예정이며 상금은 1천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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