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찾다 / 김종숙
요동치던 밥솥에 뜸이 들고
솥뚜껑을 열면 거기
너무도 고요해진, 반듯한 밥알들
끓어 넘치고 치솟던 설익은 시간이 지나고
잦아든 잘 지어진 밥
까칠한 쌀알들이
반지르르한 한솥밥이 되기까지
가령, 몇억 년 동안 쌓인 사막의 무늬들이나
물에 씻긴 돌의 생김새 같은
저의 격렬을 저도 종잡지 못한 일을
따라 했을 뿐이다
또는, 반듯한 간격을 맞추어
파랗게 자란 벼포기들이
탈곡이 되고 같은 자루에 동량으로 담기는 동안
바르르 떨다 잠잠해진 저울의 바늘이 함께 들어 있어
더도 덜도 없는 정량,
들쭉날쭉 흐트러진 적이 없다
흔들릴 만큼 흔들린 벼 포기들
털릴 만큼 털려 본 낟알들
갈 만큼 다 걸어가 보고야
능숙하게 제 길을 가거나 돌아오는 답습처럼
그 뒤끝은 저렇게
결 고른 한솥밥이 되는 것이다
이쪽도 넘보고 저쪽도 넘보던
휘청이며 허기진 몸이 그 고요해진 밥을 먹고
제힘을 힘껏 잡는 것이다
[수상소감] "마흔 중턱 늦깎이 해거리 詩공부, 뚜껑 열린듯 결실"
뚜껑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의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결국 열지 못했던 뚜껑, 그건 내가 아직 미끄럽고 땀이 많이 나는 손을 가졌다는 뜻이었겠습니다. 어쩌다 뚜껑이 열리는 패는 늘 허수였지만, 꽉 잠긴 한계에서 한 호흡을 더 힘준 덕분일까요, 열린 뚜껑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 지경입니다.
한때 삶을 견딜 수 없어 신을 찾았고, 신은 내게 자유와 시를 주셨습니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애착이 떨어져 나갔고 또 공허했지만, 마흔 중턱에서야 늦깎이로 시에 입문했습니다. 바쁜 직장 일들로 해거리 시 공부를 했습니다. 절실한 시간을 할애한 만큼 모든 결실들이 생긴다면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예부터 시인은 신과 인간의 메신저로서 삶 자체가 구도의 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시를 쓸수록 와 닿는 말입니다. 때로 '신은 시인에게 인간의 오관으로 느낄 수 없는 초감각 계들을 몽환처럼 열어 보이기도 한다' 고 생각합니다.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런 감각조차도 벼려 이 시대에 일익을 해 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앞서 걸으며 방향이 되어 준 분들이 계십니다. 졸고를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맹문재 선생님과 문우님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명서 선배 시인님, 그리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신춘문예 공고에서부터 당선자 고지까지 한 번도 나이를 묻지 않아 주신 머니투데이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두보, 소동파, 이백, 김삿갓의 한시(漢詩)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와 솜씨를 물려주신 어머니도 하늘나라에서 무척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곁에서 알게 모르게 외조를 아끼지 않은 남편과 응원해 준 세 아이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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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인 삶의 깊이 詩에 고스란히
올해엔 시 부문 응모작품 수가 적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 많았다.
<도배사>는 여자 도배사의 아슬아슬한 삶과 닮은 작업 과정을 통해 "벽이 꽃그림자 속으로 환하게 스며드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종결어미가 모두 "~다"로 계속 이어지면서 시가 둔탁하고 리듬감이 부족했다.
<어머니 몸 속에는…> 작품은 뼈마디마다 삶의 무게로 점철된 통증들이 신음소리인 비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애정이 잘 담겨져 있다. 다만 응모작 대부분이 시의 주제나 의도와 달리 너무 길어 산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목수의 딸>은 목수였던 아버지의 삶을 아련하게 반추하고 있다. 목장갑을 빨면서 아버지의 한 생애를 뒤돌아보는 시인의 눈이 따뜻하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선정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고요를 찾다>였다. 벼 낟알이 쌀이 되고 밥이 되기까지, 하여 고요해지기까지 과정을 그야말로 '반듯하게' 그리고 있다. 잘 익은 따뜻한 밥을 앞에 대하듯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작품 중에 "가령", "또는" 같은 추임새도 시적 긴장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를 느끼게 하고 있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이순원 소설가, 이희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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