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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에 대한 형이하학적 진단 / 정명

 

 

1. 현황 보고서

 

서울역 광장에 노숙자들이 비둘기 고기를 서로 먹겠다고 싸울 무렵 남편은 20년 동안 앉았던 의자를 내놓아야 했다. 달포 동안 체류한 사우디출장보고서를 마친 후 점심때였다. 처음으로 그는 한낮에 영원한 퇴근을 했다. 사장도 부사장도 상무도 한 발 앞서 내놓아야 했던 그 의자에 묻은 온기는 너무도 쉽게 사라졌다. 이제 그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않고 주름이 죽은 면바지를 입는다. 바닥에 편안히 눕는다. 헐렁헐렁한 시간들이 계속된다.

 

2. 놈의 동물성에 관한 비유

 

놈은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카멜레온이다

놈은 봄날 늙은 암고양이,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그러다가도 놈은 메뚜기떼, 인정사정없이 논밭을 훑는다

 

3. 놈의 성정 관찰하기

 

놈은 수성(獸性)을 지녔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언제든 약한 자의 등을 물어뜯는다

놈이 얼굴을 할퀴면 흉터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놈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놈 앞에서 세계의 두목들은 무릎을 꿇는다

살살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을 가지고 논다

오대양 육대주는 놈이 활보하는 걸진 굿판이다

놈은 폭군 네로다

허리케인, 토네이도다

도미노의 달인이다

놈 앞에서 나는 벌거숭이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어린 아이다

꾸중들을까 봐 맘졸이는 오줌싸개다

놈의 포효에 남동공단 구로공단 사상공단 하남공단 굴뚝의 연기는 하늘로 치솟는다

그러나 놈은 순한 불독

때때로 발톱을 내리고

코끝을 간질이면 벌렁 드러눕는다

다독이는 손을 핥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때

공장의 기계는 명랑하게 웃는다

 

4. 놈의 신체학적 고찰

 

놈은 세계의 등뼈다

등뼈는 너를 나를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

놈의 등뼈가 휘어지면 허리는 삐끗, 골다공증 다리는 삐거덕삐거덕

놈은 귀가 여러 개다

여의도로 월 가로 런던 시티로 귀를 열어 놓는다

때때로 귓불이 파르르 떤다

놈은 갈퀴손을 그러쥐고 외쳐댄다

"세계는 내 손 안에 있소이다!"

 

5. 놈의 자연성 엿보기

 

놈은 영악한 놈, 바람을 닮았다

모습을 감춘 채 밤새 창문을 덜컹거리다가 아침이면 힁허케 사라지고

삼월에 꽃눈을 간질여 꽃을 피우다가도 시베리아 북풍을 몰고 와 폭설을 퍼붓는다

잎눈은 그대로 눈이되고 대지는 광꽝 얼고

봄은 제 자리에 그대로 돌이 된다

놈은 거대한 바다, 파도를 일으키고 파도를 잠재우는

나는 노조차 없는 쪽배

바람이 가는 대로 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수밖에

 

6. 희망 보고서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들은

지하골방에서 징징대다 잠이 든다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는 이들의 등은

새우처럼 굽어 있다

굽어서 펴지질 않아

그대로 둥근 정물이 된다

바람의 말을 따라 새들이 지저귄다

태풍에 쓰러지고

찬서리에 고개가 꺾여져도

한 줄기 빛은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는 법

긴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라

내숭의 꼬리를 싹둑 자를 때

봄 언덕에는 노랗게 꽃다지 웃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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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올해 경제신춘문예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경제를 주제로 문학작품을 쓴다는 일이 우선 쉽지 않을 것이다.

 

시 부분은 응모된 작품 수가 전년에 비해 적은데다가 그나마 응모자 대부분이 한편 정도의 시를 응모해 그 수준을 심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좋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한편만으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든 일이다. 또 시에서 경제라는 주제의 협소성 때문인지 경제신춘문예가 아닌 평이한 시들이 많았다.

 

경제는, 더 쉽게 얘기해 일반 응모자들이 그것을 아주 협소하고도 그릇되게 받아들이는 바대로의 '돈을 버는 일'이거나 '돈에 관한 이야기', 절대로 우리가 그것을 적대시하거나 백안시할 부분이 아니다. 내년 응모자들은 이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최종 본선에 올라온 작품은 시 부문에서는 '천정에 사는 남자' 4편의 시와 '놈에 대한 형이하학적 진단', 소설 분야에서는 '엘도라도는 어디 있는가', 동화부문에서 소중한 1리얄', 기행문과 제안을 수기 형식의 '꽃으로, 꽃으로 히말라야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라며'이상 5편이었다.

 

이 중에서 '천정에 사는 남자'4편의 시들은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들과 전혀 차별성이 없다는 점에서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고, 소설 '엘도라도는 어디 있는가'는 원고지 200여매 이상 되는 소설이 친구와 나 사이에 문답으로만 거의 이루어지고 결말 또한 석연치 않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남은 작품 가운데, 우수상으로 뽑은 시 '놈에 대한 형이하학적 진단'은 우선 어휘구사력이나 길게 끌고 가는 호흡과 작품의 구성력이 돋보였다. 주제 또한 정면에서 경제를 다루었다는 점이 많은 점수를 얻었다. 바람이 있다면 작품이 길다 보니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최우수상을 놓고 막판까지 고민을 하다가 우수상으로 정한 '소중한 1리얄'은 아주 잘 쓴 동화이다. 작은 동전 하나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또 우리 삶의 아름다운 미래를 이야기한다. 흠이라면 동화적 상상력보다는 지나치게 교훈적이라는 점이었다.

 

최우수상으로 뽑은 '꽃으로, 꽃으로 히말라야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라며'는 고등학생이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놀랍다. 네팔의 경제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나름대로의 제안 방안도 그 나이의 청소년다운 독창성이 돋보인다.

 

한창 공부할 나이의 청소년에게 이토록 큰 상을 주는 것이 이 소년을 위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아닌가를 오래도록 토론한 끝에 심사의 공정성을 우선하여 최우수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부디 오늘의 이 영광이 미래의 독이 되질 않길 바란다.

 

심사위원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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